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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마른 몸매이지만 예뻤다. 카메라 앞에 선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고, 이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현장이 숙연해졌다. 눈빛과 표정, 손짓과 발짓이 하나 되는 순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결혼 후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 살면서 발레리나 윤혜진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거든요.”
2001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프로 무용수의 삶을 살던 윤혜진은 ‘몸의 라인이 가장 아름다운 무용수’로 통한다. 2006년 마크 에크 안무작 <카르멘>에서 주인공 마담M 역을 맡아 존재감을 각인시키며 명실상부 최고 발레리나에 이름을 올린 그녀. 무용수에게는 꿈과 같은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으로의 이적을 포기하고 엄태웅과의 결혼을 발표했을 때 발레계는 충격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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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와의 결혼은 제가 발레를 만난 것처럼 운명적이었어요. 친하게 지내던 언니에게 소개받은 후 사랑에 빠졌어요. 비슷한 시기에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모나코 발레단에 합격했어요. 한국인으로서, 또 무용수로서 인정받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다가 아킬레스건에 부상을 당해 치료차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데 두 달 만에 다시 만난 오빠가 결혼하자고 하더군요. 그러던 와중에 지온이가 생겼어요.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모나코에서 부상을 당해서 돌아오게 된 것도, 오빠와 결혼하게 된 것도, 지온이를 만난 것도 모두 운명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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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가정을 꾸렸다. 어느새 3년 차 주부가 된 윤혜진은 발레리나에서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고 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지만 하루아침에 삶이 바뀌어 힘들기도 했어요. 출산 후에는 산후우울증도 찾아왔고요. 엄마가 된다는 게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던 것 같아요. 발레에 대한 미련도 있었고요. 모나코에서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발레복을 입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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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 후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엄마가 된다는 게 두렵기도 했는데 지온이를 통해 성장하는 저를 발견하곤 해요.
윤혜진은 최근 잠시 벗어두었던 토슈즈를 다시 꺼내 신었다. 발레단에서 후배들과 함께 연습을 시작했다. “저는 무대에서 열심히 하는 발레리나였어요. 대중적인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공연을 보러 와주는 한 분 한 분이 감사했죠. 완벽한 공연, 뭉클한 감동을 선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저를 아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팬들을 위해서라도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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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와 아내, 그리고 엄마 중 가장 힘든 건 무엇일까? 윤혜진은 ‘엄마’를 꼽았다. 지온이를 키우면서 때때로 찾아오는 고민과 갈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가장 힘들다고 .
“엄마가 된 후 처음 겪는 일들이 많아요. 저는 서툰 엄마예요. 이런 엄마 밑에서 지온이는 얼마나 힘들까요? 그동안 발레가 제일 힘들다고 했었는데 아이를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래도 딸의 웃는 얼굴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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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 한 켠에 놓인 강아지 모형에 얼굴을 부비고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대화를 나누는 지온이. 실수로 잘못 던진 토슈즈에 맞아 울던 지온이가 토슈즈를 ‘때찌’할 때 무거웠던 현장은 온기로 가득 찼다.
“엄마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온이는 순수한 아이에요. 지금처럼 때 묻지 않고 밝은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사회성 좋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동생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엄두가 안 나네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남편을 위해 아침상을 차리는 아내 윤혜진. 결혼 전 ‘아침상은 꼭 챙겨주길 바란다’는 시어머니의 당부를 단 하루도 거스른 적이 없다. 프로 발레리나는 내조도 프로급이다.
“내 남편인데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죠. 남편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저의 몫이잖아요. 꼼꼼히 방송 모니터를 해주고 가끔은 시나리오도 봐줘요. 시청자의 입장에서 남편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봐주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내조가 아닐까요?”
아내의 눈에 비친 ‘엄포스’ 엄태웅은 어떤 배우일까?
“결혼 전까지 오빠가 출연한 작품을 본 적이 없어요. 팬도 아니었고 이상형은 더더욱 아니었죠. 연애하면서 오빠가 출연한 작품을 봤는데 평소와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남편은 감수성이 뛰어나 아이 얼굴만 보고도 우는 사람인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지온이를 만나면서 감성이 더 짙어졌어요. 항상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하는 내 남편을 저는 존경해요.”
윤혜진은 남편·아빠 엄태웅에게 100점을 선사했다. 윤혜진이 본 엄태웅은 가족과의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자상한 남편이자 따뜻한 아빠다.
“오빠는 가정적인 남자예요. 취미가 승마인데 가끔 말을 타러 가는 것 빼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요. 지온이가 흙에서 뛰어놀 수 있게 이사한 집의 정원을 직접 가꿀 정도로 딸에게 많은 걸 주고 싶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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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한 남편과 무럭무럭 자라는 사랑스러운 딸이 옆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윤혜진. 종종 찾아오는 슬럼프에 발레를 포기하고 싶었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이 행복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말했다.
“무용수들은 종종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어요. 부상당하거나 맡은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때, 실력 있는 후배들이 등장할 때 회의감이 들고 의지가 약해지죠. 저도 몇 번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이끌어주셨어요. 그때 제가 발레를 그만두었다면 지금의 윤혜진은 없었겠죠. 다시 생각해도 저희 엄마, 아빠한테 고마워요.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으로 보답하려고요.”
윤혜진은 지혜로운 엄마,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우아한 발레리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