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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루머, 스캔들…

김동성이 입을 열었다

차가운 빙상 위, 화려하게 빛났던 김동성의 오늘은 거센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은은하다. 지난 10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On June 17, 2015

2002년 겨울이었다. 미국에서 열린 19번째 동계 올림픽. 긴장감 때문에 땀나는 두 손을 움켜쥔 채 목청 높여 응원하던 김동성이 1등으로 들어오던 그 순간, 할리우드 액션 못지않은 미국 선수 오노의 프로급 연기에 금메달을 뺏겨 억울해하던 그의 표정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김동성(36세)은 2005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입담을 과시하며 새 삶을 살았다. 언론에 근황을 종종 알리며 팬들과의 소통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행복한 것이 문제였을까?

그를 시기한 사람들은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도 트집 잡기 시작했고 각종 커뮤니티에 루머를 퍼 날랐다. 아내와의 이혼설도 순식간에 알려졌다. 그럼에도 그는 의연했다. 풍문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중심을 지켰다.

그런 그가 최근 강연 문화를 주도하는 기업 ‘마이크임팩트’의 대표 연사로서 새 삶을 살고 있다.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서 딴 기적 같은 금메달에 얽힌 사연부터 안톤 오노 선수와의 안 좋은 추억까지, 자신이 살아온 ‘가슴 뛰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고 있는 것. 그의 스토리는 결코 짧지 않는 시간 동안 겪은 크고 작은 일에 단련이라도 된 듯 거침없었다.

“3년 전부터 강연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사연을 비롯해 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창피했거든요. 몇 번 거절하다가 어렵게 강연장에 올랐는데 그때부터 인생이 바뀐 것 같아요. ‘남자 김동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운동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다면 강연을 통해 진짜 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됐거든요. 강연을 듣고 저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가시는 분도 많더라고요.”

김동성에 대한 오해는 루머에서 시작됐다. 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 석 자를 검색하면 줄줄이 쏟아지는 확인되지 않은 가십거리들. 모 여배우와의 불륜설, 나이트클럽 목격담 등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소문 때문에 그를 ‘잘 노는 왕년의 스포츠 스타’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2002년 겨울이었다. 미국에서 열린 19번째 동계 올림픽. 긴장감 때문에 땀나는 두 손을 움켜쥔 채 목청 높여 응원하던 김동성이 1등으로 들어오던 그 순간, 할리우드 액션 못지않은 미국 선수 오노의 프로급 연기에 금메달을 뺏겨 억울해하던 그의 표정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김동성(36세)은 2005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입담을 과시하며 새 삶을 살았다. 언론에 근황을 종종 알리며 팬들과의 소통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행복한 것이 문제였을까?

그를 시기한 사람들은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도 트집 잡기 시작했고 각종 커뮤니티에 루머를 퍼 날랐다. 아내와의 이혼설도 순식간에 알려졌다. 그럼에도 그는 의연했다. 풍문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중심을 지켰다.

그런 그가 최근 강연 문화를 주도하는 기업 ‘마이크임팩트’의 대표 연사로서 새 삶을 살고 있다.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서 딴 기적 같은 금메달에 얽힌 사연부터 안톤 오노 선수와의 안 좋은 추억까지, 자신이 살아온 ‘가슴 뛰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고 있는 것. 그의 스토리는 결코 짧지 않는 시간 동안 겪은 크고 작은 일에 단련이라도 된 듯 거침없었다.

“3년 전부터 강연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사연을 비롯해 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창피했거든요. 몇 번 거절하다가 어렵게 강연장에 올랐는데 그때부터 인생이 바뀐 것 같아요. ‘남자 김동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운동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다면 강연을 통해 진짜 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됐거든요. 강연을 듣고 저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가시는 분도 많더라고요.”

김동성에 대한 오해는 루머에서 시작됐다. 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 석 자를 검색하면 줄줄이 쏟아지는 확인되지 않은 가십거리들. 모 여배우와의 불륜설, 나이트클럽 목격담 등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소문 때문에 그를 ‘잘 노는 왕년의 스포츠 스타’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김동성. ‘상남자스러운’ 그는 애처가에 ‘자녀 바보’였다. 아이들을 위해 감독으로 사는 것도 포기했다. 한창 성장기에 있는 자녀들 곁에 아빠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스케이트를 배우고 있어요. 바쁜 시간을 쪼개 종종 코치를 해주곤 해요. 선수가 되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아이의 인생은 전적으로 아이의 의사에 맡길 거예요. 스케이트 감독을 해보지 그러냐는 제안도 있었어요. 그런데 감독을 하면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지잖아요. 지금은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최근에는 함께 장난감 시장에도 다녀왔어요. 남산에 올라가 돈가스를 먹기도 했고요. 사실 예전에는 사람 많은 곳은 자연스럽게 피했는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와야겠더라고요. 집 밖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김동성이 세계적 스포츠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건 우연의 일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빙상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다른 선수의 모습을 우연히 본 게 시작이었다. 막연히 ‘나도 타고 싶다’는 생각으로 취미 삼아 시작했고 우연찮게 감독의 눈에 들어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빙상장의 차가운 기운이 볼에 스치는 것이 기분 좋았다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훈련해야 하는 고된 스케줄에도 지칠 줄 몰랐다.

“좋아서 시작했고 스스로 재미있는 일을 하다 보니까 상위권에 들 수 있었어요. 처음 시합에서 진 날 아버지가 ‘운동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까 오히려 제가 해야 할 일은 스케이트라는 걸 알았어요. 그때부터 단순히 즐기는 운동이 아니라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걸 향해 달려야 하는 훈련을 시작했어요.”

그는 ‘스케이트 분야에서 최고가 되자’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인 선수들과 같은 강도의 훈련을 받았다. 180kg짜리 역기를 들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근육을 키우고 지구력을 높이고 스피드를 향상시키는 데 주력했다. 다른 것에 한눈팔 시간이 없었다. 오로지 미래를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고등학생 때 국가대표에 발탁되면서 처음으로 사회의 쓴맛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단 순간부터는 선배도 선배가 아니라 경쟁 상대가 돼요. 죽기 살기로 하지 않으면 안 돼요. 메달을 따느냐 못 따느냐가 인생을 바꾸는 거니까요.”

성공의 뒤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출전한 세계선수권대회 경기장에 찾아와 응원해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 기억이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살면서 처음 마주한 슬픔이었다.

“아버지가 제 경기를 처음으로 보러 오신 날이었어요.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두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죠. 경기를 마치고 대기실에 있는데 같은 팀 동료의 아버지께서 다급하게 부르더라고요. 영문도 모른 채 병원으로 갔어요. 어머니가 울고 있었고, 몇 분 뒤 누나와 형이 왔어요. 그리고 다시 몇 분 뒤에 의사 선생님이 사망 선고를 내리더라고요. 믿기지 않았어요. 지병이 있으셨지만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신 아버지거든요.”

덤덤한 듯 회상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고 말을 이었다.

“장례식장에 있는데 어머니가 ‘내일 시합에 나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아버지를 편히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서요. 아버지가 저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속을 많이 썩였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라이벌 선후배를 이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성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보니까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지금도 늘 생각나고 그리워요.”

김동성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고 운동했다. 훈련 강도를 스스로 높였다. 오기와 악으로 버틴 고된 훈련이 남긴 건 ‘무릎인대 파열’이라는 부상이었다. 처음으로 찾아온 위기, 하지만 포기하려고 할 때 기회가 찾아왔다.

“발을 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아팠어요. 약물에 의존해야 했는데 도핑테스트 과정이 너무 복잡해 무릎에 테이핑만 하고 경기에 임했죠.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까 아프다는 생각보다 이겨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동메달이라도 따자는 마음으로 결승 경기에 임했고, 마지막에 다리가 너무 아파 발을 쭉 뻗었는데 우승했어요.” 1998년 일본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서 선보인 일명 ‘날 밀기’ 기술이다. 당시를 회상하던 김동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당시에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어요. 미리 구상한 작전이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죠. 그때 제가 다리를 쭉 펼 수 있었던 건 어렸을 때부터 해온 훈련 때문이었어요. 늘 ‘피니시 라인을 통과해야 비로소 끝나는 거다’라고 강조하셨던 감독님의 훈련 방법이 통했던 것 같아요. 결승선을 통과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습관이 다리를 뻗게 한 것 같아요.”

선수 인생의 마지막을 금메달로 장식하기 위해 도전했던 제19회 동계 올림픽에서 안톤 오노에게 금메달을 뺏긴 후 스케이트를 쳐다보기도 싫었을 때 다시 한 번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국민들의 격려 때문이었다. 함께 분노하고 함께 울어주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세기의 라이벌 안톤 오노와의 두 번째 시합을 꿈 꿀 수 있었다.

“은퇴 경기에서 금메달을 뺏긴 게 아무래도 억울한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달려보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오노 선수가 출전을 안 했더라고요. 분한 마음으로 치른 경기가 바로 ‘분노의 질주’예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죠. 거의 2바퀴를 다른 선수들보다 먼저 들어왔어요.” 김동성은 여러 번의 부상과 몇 번의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스스로 돌파구를 찾았고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신앙이 있었다.

“선수 생활을 할 때는 워낙 바쁜 스케줄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힘들 때만 찾던 곳이 교회였죠. 은퇴 후 결혼하면서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교회에 가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요. 루머나 논란 때문에 힘들 때도 기도했고, 아내와의 사이에 힘든 일이 있을 때도 교회를 찾았어요. 저에게 위기가 닥칠 때 힘을 주는 건 사랑하는 가족과 믿음인 것 같아요.”
숱한 고비를 건너온 김동성은 비로소 행복을 찾은 듯 보였다. 강연자로 새 출발을 알린 김동성의 가슴 뛰는 삶을 응원한다.



CREDIT INFO
취재
이예지 기자
사진
김승환
2015년 06월호
2015년 06월호
취재
이예지 기자
사진
김승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