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음을 만난 날은, <킬미, 힐미>가 종방된 다음 날이었다. ‘황정음스럽게’ 인터뷰 장소는 강남의 한 호프집. 올 블랙 의상에 은색 구두를 매치한 그녀가 발랄하게 걸어 들어왔다. 단발머리의 황정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앉자마자 <킬미, 힐미> 얘기부터 시작됐다. 고백하자면 기자 역시 <킬미, 힐미> 마니아였다.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이 드라마를 통해 ‘드디어’ 황정음의 팬이 됐다. 몸을 아끼지 않는 열연,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진짜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인드, 남자 배우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몰아주는 배포. 그녀는 분명 또래 여배우와 달랐다.
“<킬미, 힐미>는 나를 위한 작품이 아니라 지성 오빠를 위한 작품이에요. 오빠를 빛나게 하는 것, 그거 하나면 족해요. 배우에겐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충실히 했을 때 드라마는 더욱 빛이 나고 저 역시 빛난다는 걸 알았거든요. 정말 정말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킬미, 힐미>는 7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차도현)와 정신과 여의사(오리진)의 사랑을 이야기한 작품. 2년 전 드라마 <비밀>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 지성과 황정음이 다시 만나 일촉즉발 로맨스를 그렸다. 황정음은 죽지 못해 사는 우울한 인격부터 폭력성을 지닌 까칠한 인격까지 7개의 인격을 오가며 극강의 연기력을 선보였던 지성 옆에서 강약을 조절했다.
황정음은 드라마 속 지성의 7개 인격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인격으로 신세기를 꼽았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에 폭력성을 띤 인물로 숱한 어록을 남긴 캐릭터다. “기억해. 2015년 1월 7일 오후 10시 정각. 내가 너한테 반한 시간” “그새 내 눈빛을 잊은 건가?” “뭘 봐, 잘생긴 사람 하품하는 거 처음 봐?” 손이 오그라들지만 오그라드는 맛에 보는 게 드라마 아닌가. 한 설문조사에서 원래 인격인 차도현보다 신세기의 출현을 기다리는 시청자가 더 많은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저 역시 신세기 캐릭터에 가장 애착이 갔어요. 극 중 제가 맡은 ‘오리진’이라는 여자를 정말 좋아해주는 캐릭터거든요.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캐릭터이기도 해요. 내 호흡이나 내 감정을 따라와주는 게 아니라 제가 ‘신세기’의 호흡과 감정에 맞춰야 했거든요. 반대로 부러웠던 캐릭터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고생 인격 ‘안요나’요. 저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웃음) 요나가 처음 등장하는 신이 있어요. 그 장면에서 지성 오빠 연기를 보고 ‘우아, 대박!’이라고 느꼈을 정도로 차지게 연기를 해서 대사를 잊었죠. 이번 작품을 하면서 지성 오빠의 연기를 구경하다가 대사 NG를 얼마나 많이 냈는지 몰라요. 원래 제가 대사 실수만큼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랍니다. 하하.”
고민도 많았다. 신세기나 안요나, 페리박 등 다양한 성격의 인격이 출몰할 때마다 달려져야 하는 리액션 때문이었다.
“장동건 오빠나 조인성 오빠, 전지현 언니는 오버액션을 해도 그림 같잖아요. 그런데 전 그림이 아니니까 고민을 해야죠.(웃음) 그때 김진만 감독님이 ‘황정음스러운 것’을 요구하셨어요. 저다운 연기요. 그래서 꾸미지 않고 저인 듯 아닌 듯 자연스레 연기했어요.”
<킬미, 힐미>가 남긴 최고 시청률은 11.5%(닐슨코리아 기준). 동시간대 드라마와의 경쟁에서 ‘1등’이었다. 그만큼 지성과 황정음이 남긴 명대사, 명장면도 수두룩하다.
“자살하고 싶어 하는 인격 안요섭에게 조언하는 장면이 있어요. ‘넌 돌연변이가 아니야.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구나 마음속에 여러 사람이 살아. 죽고 싶은 나와 살고 싶은 내가 있어. 포기하고 싶은 나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내가 매일매일 싸우면서 살아간다고. 넌 싸울 용기도 없는 거야’라는 대사였죠. 제가 뽑은 명대사예요.(웃음) 죽고 싶은 나와 살고 싶은 내가 있다는 말이 너무 공감됐어요. 제 직업 자체가 행복한 면과 고통스러운 면을 동시에 갖고 있잖아요. 제가 힘들었던 시기를 생각하면서 연기를 했어요.”
명장면으로는 ‘신세기’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을 꼽았다. 너무 추웠고, 그래서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됐던 묘한 경험이었다.
“사실 쪽대본이었거든요. 시간이 없어 대본을 두 번 읽어보고 카메라 앞에 섰어요. 지성 오빠의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추웠어요. 근데 촬영장이 숙연할 정도로 감정 몰입이 자연스러워 한 번에 오케이 됐죠.”
황정음의 매력을 꼽으라면 화려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톡톡 튀는 성격이다. 실제로 그녀는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에 공식 연인 SG워너비 김용준과 함께 출연하며 발랄한 이미지로 인지도를 높였다. 이후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천방지축 과외 선생님 캐릭터를 통해 지금의 ‘배우’ 황정음이 만들어졌다.
“<하이킥> 이후에 코믹 연기를 하지 않았던 건 그 이상의 코믹 연기는 못할 것 같아서예요. 캐릭터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점점 더 진한 감정이 필요한 캐릭터를 찾았죠. 그러면서 깨달은 게 ‘연기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였어요.(웃음) 그런 끝에, 그동안 내가 했던 연기 중 몇 가지를 혼합해서 보여줄 수 있는 걸 찾았고 그것이 <킬미, 힐미>예요. 아, 갑자기 ‘신세기’가 보고 싶네요.(웃음)”
욕심부리지 않았다. 스스로 <킬미, 힐미>는 지성을 위한 작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욕심을 부리면 작품을 망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모든 걸 지성에게 맡겼고, 그의 움직임을 따랐다.
“지성 오빠보다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었다면 욕심을 부렸겠죠. 하하. 캐스팅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감독님이 저를 캐스팅한 이유는 지성 오빠를 잘 보필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감독님의 의도에 맞게 연기하는 게 중요했어요. 저에게 주어진 미션을 차분히 잘 해내고 싶었어요.”
데뷔 후 짧지 않은 시간을 무명으로 보내야 했던 황정음. ‘아유미와 아이들’이나 ‘김용준의 여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자신의 이름이 없던 시기를 보내야 했기 때문에 슬럼프는 자연스러웠다.
“제 인생에서 큰 슬럼프가 두 번 있었어요. 한 번은 아이돌 그룹 ‘슈가’로 활동할 때였고, 또 한 번은 드라마 <골든타임>에 출연할 때였죠. 결과적으로 제가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인데 말이에요. 사람은 고생을 해봐야 성장하나 봐요. 그래도 저는 아직 멀었어요. 하하.”
그럼에도 너무 힘들면 기운이 빠진다는 그녀는 “바쁜 스케줄에 지쳐 누워서 옷을 입은 적도 있어요”라며 “힘들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죠” 하며 무장해제 된 웃음을 보였다. 그 시절 자신을 다시 만난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즐기고 감사한다면 더 나은 내일이 오지 않겠느냐며 말이다.
인터뷰 말미에 공식 연인 김용준과의 결혼 계획을 물었다. “서른네 살에는 결혼하고 싶다”고 똑 부러지게 말한다. “솔직히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상대가 누구일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결혼할 준비가 됐을 때 옆에 있는 사람과 할 거예요. 너무 솔직한가요?(웃음) 내일이 화이트데이인데, 용준이에게 멋진 이벤트를 준비하라고 지시(?) 해놓은 상태예요. 기대해봐야죠.”
황정음은 한 시간가량 이어진 대화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솔직함과 당당한 매력으로 특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어떤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자신의 생각을 조근조근 말했다. 뭐랄까, ‘여유’보다는 ‘내공’이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황정음의 서른한 살은 이렇듯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