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BS2 드라마 <힐러>에서 짐승 같은 촉과 무술 실력을 지닌 업계 최고의 심부름꾼 힐러 ‘서정후’ 역을 맡아 열연한 지창욱은 3년 전 만났을 때보다 한층 성숙해 있었다. 2012년 겨울이 되기 직전, 드라마 <다섯 손가락>을 막 끝냈을 때였는데 외모도 내면도 앳된 모습이었다. 그때는 상큼한 레몬 향을 풍겼다면 지금은 진한 풍미까지 더해진 향기가 난다.
그는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난 네게 반했어>(2008)를 시작으로 <솔약국집 아들들>(2009)을 거쳐 가뿐하게 <웃어라 동해야>(2010)의 타이틀 롤을 거머쥐었다. 이제 막 데뷔 3년 차였으나 보란 듯이 국민 드라마 반열에 올려놓았고 이후 <무사 백동수>(2011)와 <다섯 손가락>(2012) <기황후>(2014)를 거쳐 오늘의 <힐러>까지, 짧지만 긴 세월인 지난 7년 동안 안방극장을 웃기고 울리면서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다. 물론 귀공자 같은 외모에 ‘훈내’ 나는 기럭지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지창욱은 거침없이 도전했다. 2013년 뮤지컬 <그날들>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무대에 오르고 있다. 스스로 “내 연기는 <그날들>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다. 뭐랄까, 차곡차곡 건강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똑똑한 남자랄까?
인터뷰 내내 느껴졌다. 말 한마디에 진심을 담으려는 노력,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눈빛, 그리고 진중한 태도. 이제 지창욱은 소위 말하는 ‘진짜’ 배우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떠오르는 신예에서 대세로, 대세에서 또 기대되는 배우가 되기까지, 장르를 불문한 다양한 작품을 거쳐 오면서 다듬어진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또 한 작품을 끝냈어요. 기분이 어떤가요? 연기는 제 삶이고 인생이잖아요. ‘끝났다’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그냥 ‘흘러가는 거다’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요. 다만 생활 패턴이 바뀌니까 적응하는 게 조금 힘들긴 해요.
캐릭터에 빠져 사는 스타일은 아닌가 봐요? 솔직히 말하면, 캐릭터에 빠져 산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예를 들어 살인마 캐릭터를 맡으면 자신도 악해지고, 우울한 캐릭터를 연기하면 우울해진다고 하잖아요. 그건 정신적으로 나약해서 그런 게 아닌가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캐릭터에 빠진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은 그런 경험이 없어요.
다른 배우들은 연기하면서 또 다른 나를 만난다고 하던데요? 그건 그래요. <힐러>를 하면서 또 다른 저를 만났어요. ‘나도 요즘 시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힐러>는 정의나 도덕 같은 게 없는 요즘 세대를 풍자하는 작품이에요. 사실 저도 환경이나 사회문제엔 관심이 별로 없거든요. 오히려 무인도를 사고 싶어 돈 되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하는 ‘서정후’와 비슷한 부분이 많지요. 저 역시 팍팍한 시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도시인이잖아요. 이런 것도 또 다른 나의 발견이라면 발견이겠죠?
삶에는 계기라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돌멩이가 오랜 세월 동안 강물에 휩쓸리면서 둥그렇게 바뀌듯 저도 천천히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변화하는 점들이 이어져 지금의 제가 만들어진 것이고요
드라마 종영 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요. 촬영이 끝난 다음 날 배우들과 쫑파티를 했고요, 그리고 이어서 미뤄놨던 화보 촬영을 했어요. 그러곤 쉬면서 머릿속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내가 연기한 인물은 어떤 사람이며,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요. 모든 것을 다 끝내놓고 작품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거죠. 보통은 작품 시작 전에 하는데 저는 이상하게 마지막에 하게 되더라고요.
다르게 말하면 캐릭터나 작품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연기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웃음) 그렇게도 들리네요.(웃음) 추가 설명을 하자면 물론 캐릭터는 이해하고 작품에 들어가야죠, 당연히.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는 의미예요. 처음과 끝의 생각이 다른 경우도 있고, 더 깊어지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아쉬운 장면도 생각해보고 뭔가를 정의 내리기도 해보죠.
안 그래도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웃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연기하는 걸 싫어해요. 그래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끝까지 물어보고 생각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뭔가요? 스태프와의 관계요. 드라마를 하면서 아쉬운 것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갈수록 거의 생방송 수준이죠. 연기적인 면도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스태프와 더 친해질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 작가, 모든 스태프가 다 있을 거예요. 다만 배우와 스태프의 관계가 좋아야 더 편하게 작업할 수 있고 그 분위기가 작품에 묻어난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단순히 배우와 스태프의 관계가 아니라 동료인 형, 누나라고 생각하려고요.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게 시청률을 높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렇게 저도 철이 드는 거겠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시청률 1위를 했던 날의 촬영장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어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스태프의 모습을 보면서 묵직한 책임감이 들더라고요. 겉으로 드러나는 직업도 아닌데 진심을 다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로는 하나하나 소홀할 수가 없었어요. 자부심 하나로 일하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존경스러웠죠. 열정과 진심이 없이는 방송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방송이 매력 있는 것 같아요.
많이 친해졌나 봐요? 고백하자면 이전 작품에서는 느끼지 못한 경험이었어요. 종방 이후에도 계속 스태프와 연락을 하며 지내죠. 깊은 동지애 같은 것, 그걸 느꼈다니까요.
짧은 시간 동안 유난히 타이틀 롤을 많이 맡았어요. 부담이 없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죠.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는 늘 불안, 부담, 걱정,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와요. ‘반응이 안 좋으면 어떡하지?’ 등 온갖 걱정을 다 하죠.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같이 일하는 사람을 믿는 것, 그 외에는 없는 것 같아요. 경쟁작인 <펀치>에 조재현·김래원 선배님이 있다면 우리한테는 송지나 작가 선생님이 있고, 유지태 형이 있으니까요. 무엇이든 혼자 이끌어가는 건 불가능해요. ‘내가 이끌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망한다고 봐요. 조화이고 팀워크죠.
계속 타이틀 롤을 맡는다는 건 연출자와 작가의 믿음을 얻고 있다는 의미예요. 연기를 하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누군가가 나를 믿고 있다는 생각보다 제가 그분들을 믿어요. 서로가 서로를 믿는다는 건 무척 고마운 일인 것 같아요.
연기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겠죠? <웃어라 동해야>를 할 때였어요. 연기적으로 계속되는 좌절을 했지요. 나는 안 되나 보다, 나는 재능이 없나 보다….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때 김유석 형님이 제게 해준 얘기가 큰 힘이 됐어요. “재능 있는 배우는 없다. 노력하면 다 된다.” 맞아요. 재능은 제가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로 살아온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어때요? 아무것도 모르던 애기가 이렇게 컸구나 싶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던 일인데, 수많은 선배들을 지켜보고 경험하면서 저 나름대로 연기 철학도 생겼거든요. 연기에 대한 고집은 확고해요. 다만 유연하게 변하고 싶을 뿐이에요. 지금도 그 과정 중에 있고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게 있다면요? 삶에는 계기라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돌멩이가 오랜 세월 동안 강물에 휩쓸리면서 둥그렇게 바뀌듯 저도 천천히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변화하는 점들이 이어져 지금의 제가 만들어진 것이고요. 어떤 계기나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바뀐 건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을 거예요.
고민하는 중이다. 천천히 걸어가는 중이다. 변화하는 중이다. 전진하는 지창욱의 내일에 브레이크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