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그래! 임시완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장그래
tvN 드라마 <미생>은 웹툰과 높은 싱크로율로 원작 팬들까지 열광케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주인공 장그래 역을 맡은 임시완이 있다. 장그래는 고졸 검정고시 출신으로 한때 바둑 영재였지만 낙하산으로 원인터내셔널에 입사해 미운 오리 새끼가 된 인물. 새하얀 피부에 무슨 말만 하면 금세 귀가 빨개질 정도로 쑥스러움이 많은 임시완은 안쓰러운 장그래 캐릭터를 120% 소화하며 누나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고 있다. 캐릭터에 너무 빠지다 보니 임시완 스스로도 자신의 실제 성격이 헷갈릴 정도란다.
“불쌍하고 처량한 역을 맡으니까 평상시에도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결여되고, 괜히 위축돼서 장그래처럼 살고 있어요. 극 중 당황했을 때 귀가 빨개지는 것도 실제로 제가 장그래와 같은 감정을 느끼다 보니 자연스럽게 빨개지는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귀까지 연기하네’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제가 귀 빨개지는 것까지 조절하겠어요.(웃음) 그래서 지금 목표가 <미생>이 끝나는 순간 빨리 장그래를 벗어던지고 자신감을 되찾는 거예요.”
장그래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다지만 어느새 임시완은 ‘장그래’로 사는 것에 꽤나 익숙해진 모습이다. 소심해진 성격 탓에 쉬는 날에도 외출을 자제할 정도. 한편으론 캐릭터에 완벽하게 녹아들고 싶은 배우 임시완의 노력일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연기를 했을 뿐인데 폭발적인 관심을 주시니 겁이 나기도 하고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덤덤하게 그 반응들을 외면하려고 해요. 그리고 장그래가 ‘미생’에서 ‘완생’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저도 좋은 선배님들과 제작진과 함께하면서 많이 배우고 느끼고 있어요. <미생>이 끝나는 순간에는 저 역시 지금보다 몇 단계 더 성장해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를 ‘미생’이라고 말하는 임시완에게 세상의 장그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물었다. 잠시 생각한 그는 진심 어린 답을 내놓았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가 사랑을 받는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힘을 내라는 말보다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오, 신념 이성민
“최선은 학교 다닐 때나 대우받는 거고, 직장은 결과만 대접받는 데고.”
-오상식
이성민은 출연하는 작품마다 소름 끼치는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 배우가 극 중 배역에 몰입해 그 인물 자체가 되어 연기하는 방법)를 보여주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았다. MBC <골든타임>에서는 외과의사 최인혁 역할을 위해 7kg을 감량하며 열혈 의사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영화 <군도>에서는 도적 무리를 이끄는 수장 ‘대호’ 역을 맡아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승부사 기질을 지닌 워커홀릭 오상식 과장 역할을 맡았다. 만성피로로 인해 까칠해진 얼굴과 모니터를 보느라 충혈된 눈, 무심한 듯 장그래를 챙기는 성품까지 이성민은 오 과장이요, 오 과장은 이성민이다. 덕분에 원작 속 인물과 외모적 싱크로율은 가장 떨어지지만 괴리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가. 오히려 드라마를 보고 만화를 보면 이성민 얼굴이 떠오른다는 이들도 많다.
“원작 캐릭터와 머리 스타일이나 외모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얘기하면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오상식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외형이 아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고, 그걸 가장 염두에 두고 연기하고 있어요.”
이성민은 다른 연기자들처럼 외적인 모습을 원작의 주인공처럼 바꾸거나, 회사원처럼 보이기 위한 준비는 따로 하지 않았다. 대기업 회사원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야기를 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드라마가 직장인들만의 이야기였다면 아마 여러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을 거예요. 우리는 직장 내에서 사람들 얘기, 바로 우리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회사 분위기를 살려주는 디테일은 똑똑한 연출부에서 다 해결해주고 있으니 저흰 그저 회사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연기하면 됩니다.”
어느새 오 과장으로 산 지 3개월여, 이성민은 반 직장인이 다 됐다. 촬영장에 오가는 것이 출퇴근 같고, 점심 메뉴는 하루 중 최대 고민이다. 여느 샐러리맨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저희도 배우라는 조금 특별한 직업을 가진 미생일 뿐입니다. 세트장, 촬영장으로 출퇴근하고 있고요, 뭐 먹을까, 점심 메뉴 고민도 하죠. 그리고 퇴근할 때가 되면 신기하게 맥주 한잔이 생각나죠.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 주어지면 너무 행복하고요. 다 그렇게 사는 거죠 뭐.(웃음)”
훈훈한 미생 강하늘
“먼지 같은 일을 하다가 먼지가 되어버렸어.”
-장백기
SBS <상속자들>에서도, 이번 <미생>에서도 강하늘은 똑똑한 엄친아로 등장한다. 외모는 어떤가. 각진 안경 사이로 보이는 냉철한 눈빛과 정직한 ‘2:8’ 헤어스타일, 완벽한 스펙에 표정까지 드라마 속 강하늘은 장백기와 매우 닮아 있다. 게다가 장백기는 항상 모범생에 칭찬만 받아오던 인물로 동기로 들어온 장그래가 맘에 들지 않는다. 고졸 검정고시 출신인 장그래가 서울대 출신인 자신과 같이 경쟁을 뚫고 한 회사에 입사했다는 것이 내심 기분이 나쁜 것. 그 때문에 장그래를 응원하는 다수의 팬들은 장백기를 미워하기도 한다.
“제가 비호감으로 보인다는 것은 시청자들이 어느 정도 드라마에 감정이입이 되셨다는 뜻인 것 같아 그 자체로 큰 칭찬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요즘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장백기가 강하늘이었어?’라는 말인데, 배우에게 이 말만큼 큰 칭찬은 없는 것 같아요. 그만큼 배역에 가깝다는 이야기니까요.”
극 중 장백기는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인재지만 자신이 원하던 자원 팀이 아닌 철강 팀에 배정돼 적응하지 못하며 괴리감을 느끼고 있다. 바로 위 선배인 강 대리(오민석)가 업무를 알려주기보다 엑셀 파일 정리, 철자 확인 등 잡무만 지시하고 있기 때문. 그 와중에 동기 장그래는 영업 3팀에서 제 몫을 하고 있다. 서울대 출신에 화려한 스펙을 소유한 백기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장그래가 미울 만도 하다.
“주변에서 ‘네가 악역이냐?’고 물어보는데 사실 현실에서는 악역과 선역이 따로 없다고 생각해요. <미생>이란 작품이 좋았던 것도 그래서였고요. 다만 장백기는 장그래보다 머리로 보려 하고 좀 더 계산적인 성향이 있어요. 그렇다고 장백기와 장그래를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으로 구분할 수는 없죠. 말 그대로 스타일이 다른 것뿐이에요.” 옆에 있던 김석원 PD가 거들었다.
“강하늘씨는 타고난 장점이 있는데, 바로 긍정적이란 점이예요. 장백기도 곧 우릴 감동시킬 순간이 있을 거예요. 기대해주세요.”
<몬스터>에서 강하늘에게 주연을 맡겼던 김 PD는 <미생>에서 다시 한 번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배우 강하늘에 대한 애정을 짐작할 만하다.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필모그래피라고 할 수 있는데 저는 감독님과 많은 스태프, 연기자 분들을 믿고 어디 가서나 자랑할 만한 필모그래피라고 생각될 때 출연을 결심해요.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고요. 그 안에서 열심히 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녕, 안영이 강소라
“숟가락 올리는 거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삭은 밥엔 올리기 싫어요. 구려서.” -안영이
강소라가 맡은 안영이는 인턴 기간 중 합격 0순위로 꼽혔던 에이스 중 에이스. 하지만 자원 2팀으로 발령받은 후 선배들이 질질 끌어왔던 업무를 척척 해결한 죄(?)로 남자 선배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는다. 하지만 허드렛일까지도 자처하며 불굴의 의지로 버티는 안영이는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워킹걸들에게 자극제가 되고 있다. 극 중 팀에서 유일한 여사원이고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안영이를 연기하면서 강소라는 어떤 고충을 느꼈을까?
“실제로 모든 회사가 그렇진 않겠죠. 어쨌든 극 중 안영이 입장에서는 자기 잘못도 없고 잘할 자신도 있으니 억울한 거죠. 하지만 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실력으로, 노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자이기 때문에 책임과 의무가 더 따르겠죠.”
극 중 안영이의 모습은 실제 강소라와도 많이 닮았다. 강소라는 연기할 때만큼은 자신보다 극 안에서의 조화를 중시한다. 스태프들은 <미생> 촬영을 앞두고 가장 배역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배우도 강소라라고 입을 모은다. 장그래 역할의 임시완은 “강소라씨가 실제 회사생활을 해도 ‘예쁨’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파워포인트, 엑셀 등도 직접 공부했다”고 말했다.
<미생> 1화에서는 원어민 뺨치는 발음으로 러시아어를 구사해 화제를 모았다. 강소라의 소속사 윌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러시아어 선생님에게 딱 한 번, 2시간여 수업을 듣고 이후 녹음본을 틈나는 대로 들으며 반복 학습해 발음을 익혔다”며 “짧은 분량이지만 역할에 완벽히 녹아들기 위해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은 강소라의 노력 덕분에 그 장면이 빛난 것 같다”고 말했다.
한창 예뻐 보이고 싶은 나이의 여배우이지만 캐릭터를 위해 멋보다는 단정함을 택한 강소라. 화려한 드레스보다 안영이의 심플한 오피스 룩이 더 빛나는 이유다.
개벽이 변요한
“장그래씨, 삶이 뭐라고 생각해요? 간단해요.
선택의 순간들이 모아지면 그게 삶이고 인생이 되는 거예요.” -한석율
한석율을 연기한 변요한은 극 중에서 여직원들이 지나가면 벽에 붙어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지켜보는 모습이 강아지 ‘개벽이’와 닮아 개벽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온갖 시련에 허덕이는 동기들에게 존재만으로 웃음을 선사하는 인물로,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미생>에서 보기 드문 밝은 캐릭터이면서 원작 속 캐릭터와 가장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일명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남자)’의 대표 주자다.
“‘만찢남’으로 표현해주셔서 정말 영광이에요. 하지만 제 생각에 한석율이라는 인물은 어느 팀에 가도 잘 어울리는 회사원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변요한은 극 중 한석율에 완벽하게 빙의된 연기로 극의 완성도를 더하고 있다. 독립영화계의 송중기로 불리며 진지한 연기를 선보이던 그의 본래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 애드리브도 척척 해낸단다.
“브라운관에 첫 데뷔라 긴장도 많이 되고 대본에 대한 압박도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 판을 만들어주셨어요. 그리고 배우들끼리 호흡이 좋아서 애드리브를 해도 ‘쿵짝’이 잘 맞고요. 전 우리 동료 배우들 정말 사랑해요.”
기자간담회 도중 배우들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엉뚱함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열혈 배우’다. 중학교 때부터 연기자를 꿈꾼 변요한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중국 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배우의 꿈을 내려놓지 않았다.
결국 부모님을 설득해 스물네 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간 그는 2011년 영화 <토요근무>로 데뷔해 숱한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에 출연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감시자들>에서는 정우성이 이끄는 범죄 조직의 운전사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미생>을 통해 변요한은 원인터내셔널 동기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에게도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독립영화계의 송중기에서 진짜 송중기를 따라잡을 날도 머지않은 느낌이다.
“예전에는 ‘잘해야지’라는 생각만 했는데 이번에는 ‘잘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생>은 저에게 희망을 준 작품이에요.”
<미생>을 살린 숨겨진 1mm
임시완의 헐렁한 양복부터 책상 위 서류 하나까지 허투루 만든 것이 없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숨막히는 디테일.
만찢남’ 캐스팅 비결 <미생>은 동명 웹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일명 ‘만찢남’, 만화를 찢고 나온 것 같은 인물들로 주·조연을 꽉 채워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이러한 캐스팅의 비결은 소속사 파워와 인맥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엄격한 오디션 덕분. 특히 변요한이 맡은 ‘한석율’ 역 캐스팅이 가장 힘들었다는 전언이다. <미생> 관계자는 “‘한석율’은 정말 그 캐릭터의 성격이 아니라면 실감나는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 많은 배우가 오디션에 왔지만 그중 변요한이 제일 연기를 잘해 낙점됐다”라고 캐스팅 뒷이야기를 전했다.
서울스퀘어의 비밀 극 중 원인터내셔널은 서울역 맞은편 서울스퀘어, 옛 대우빌딩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왜 서울의 하고많은 빌딩 중에 서울스퀘어였을까? <미생> 제작을 총괄하는 이재문 프로듀서는 “서울스퀘어는 한국 경제의 상징적 건물이기도 하고 붉은 외벽이 고독한 느낌도 들어 <미생>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선택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옥상에 올라가면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하는 건물 역시 서울스퀘어만 한 곳이 없었다는 후문.
실사 대본 비하인드 발품의 위력이다. 보조 작가 2명이 한 달 넘게 대우인터내셔널이라고 회사에 상주하며 현장 조사를 철저히 한 것. 덕분에 <미생>은 종합상사 직원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사무실 분위기와 업무 용어를 실제에 가깝게 구현하고 있다. 부서 회의에 참석하는 건 물론 직원 회식, 거래처와의 식사 자리에도 동행했다는 게 관계자의 전언. 또한 작가들은 대본을 쓸 때도 수시로 해당 부서 직원들에게 ‘실제 쓰는 말’인지 여부를 확인한단다. 게다가 연기자들도 직접 현장 실습에 나서 직원들이 전화를 받는 것, 복사하는 것까지 지켜보며 상사맨으로 완벽히 변신했다.
싱크로율 100% 사무실 극 중 원인터내셔설 사무실은 실제 모델이 된 대우인터내셔널을 똑같이 재현했다. 책상에는 ‘원인터내셔널’ 로고가 박힌 무역 관련 서류와 메모지, 수첩이 널려 있고 한쪽에 세워진 화이트보드에도 그냥 낙서가 아닌 실제 업무 내용이 적혀 있다. 이처럼 완벽한 사무실 배경을 연출하기 위해 <미생> 미술팀은 대우인터내셔널을 수시로 방문하고 실제로 ‘상사맨’들의 책상을 촬영해 재구성했다. 또 1~2초 등장하는 컴퓨터 모니터 속 화면이나 문서도 꼼꼼하게 제작해 장백기의 스펙이 노출되기도. <미생> 제작진은 “세련되면서도 보수적인 성격인 장백기는 서울대 독문과로 설정해 해당 메일 화면을 준비했다”고 자랑했다.
현실 속의 <미생>
완생하지 못한 자들의 대담
진짜 리얼 ‘미생’을 보여주마. 실사판 장그래와 오 과장 그리고 천 과장까지. 이 시대를 사는 미생들의 대담.
천 과장 18년 차, 10년간의 막내 생활은 천 과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술 좋아함.
오 과장 22년 차, 오 과장과 싱크로율 98%, 오 과장처럼 실제 세 아이의 아빠.
장그래 4년 차, 사원, 실제 장그래와는 달리 서글서글하고 싹싹한 사원.
오 과장 : <미생>이 요즘 난리라며? 난 아이들 때문에 케이블을 다 끊었잖아. 거기 오 과장도 나랑 똑같이 애가 셋이라며? 근데 왜 그렇게 난리인 거야? 너도 나도 회사 생활이 고달파서?
장그래 : 이런 건 술 먹어야 나오는 이야기인데.(웃음) 저 고충 많죠~. 선배들이 맨날 갈구잖아요. 맨날 술 먹자고 그러지, 여자친구 못 만나게 하지. 결혼도 하셨으면서 왜 집에를 안 들어가고 저랑 밤을 보내려고 하세요? 저 여자친구한테 차이게 생겼어요.
천 과장 : 그래도 상사가 먹자면 먹는 거지~! 아, 예전엔 회사 생활이 곧 삶이었는데 요즘 애들은 안 그래.
장그래 : 과장님은 지금도 회사와 하루가 일치되는 삶을 살고 계시잖아요. 아침 7시 반에 출근해서 저녁 7시 반에 퇴근하고, 거래처 사람과 술 먹고, 밤 12시에 들어가서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그 생활의 반복. 저는 불가능해요.
천 과장 : 그렇지.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지.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장그래 : 다 좋은데 왜 그런 생활에 저까지 끌어들이세요? 절 너무 아끼시는 거 아니에요?
천 과장 : 아니지, 전혀 아끼지 않지.(웃음)
장그래 : 무슨 말씀! 장그래는 착하잖아! 장그래만큼 말 잘 듣는 부하직원 아닌가요?
천 과장 : 아니지.(웃음) 사실 과거엔 앞에서 신입들이 일하면 상사들은 편안히 신문이나 보고 결제나 했지. 물론 지금은 못 그러지만.
장그래 : 전 영업을 하지 않는 부서에 있다가 영업부서로 옮겼거든요. 영업 안 할 때는 오히려 제가 대접받다가 지금은 제가 대접을 해야 하니 죽겠어요. 술맛도 다르다니까요.
천 과장 : 난 갑이든 을이든 술은 다 맛있어.(웃음) 그만큼 술로 스트레스를 풀고 또 술로 직장인의 애환을 달래는 거지. 사실 난 영업보다도 후배들 눈치 보느라고 더 힘들어.
장그래 : 맞아요. 엄밀히 따지면 일 외의 것일 수 있는 것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중요한 경우가 있죠. 선배들과 함께 식당에 갔을 때 컵에 물을 따르지 않는다든가 고깃집 가서 고기 자르는 일에 소극적이라든지 하면 센스도 없고 개념도 없는 사람이 돼죠. 사실 거기서부터 벌써 싹수가 보이기는 해요.
천 과장 : <미생>에서도 신입사원들이 우쭐대는 장면이 있잖아. 내가 잘나서 이 자리에 있는 건데 왜 선배들한테 잘 보여야 하냐는 거지. 근데 그게 사회거든.
오 과장 : ‘일만 잘하면 미움받을 일 없으니 일이나 하자’ 이런 생각인 것 같은데 글쎄, 일만 잘한다고 예쁨받을까? 물론 반대로 일을 못한다고 무작정 밉지도 않아.
장그래 : 저는 일도 잘하고 예쁨도 받고 있습니다.
천 과장 : 그래 뭐, 그렇다고 해두자.(웃음)
장그래 : 저는 일 안 하고 뺀질대는 상사가 싫어요. 속이 부글부글 끓어요. 근데 더 싫은 건 무능력한 상사예요. 이건 뭐 답이 안 나와요. 자기 야근할 때 후배도 해야 하잖아요.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결국 잘해야 남에게 피해를 안 줘요.
천 과장 : 해봐야 답답한 이야기죠. 그럼 예쁜 후배들은 어떤 애들이에요? 전 술 먹자고 할 때 군말 없이 따라오는 애들이 최고예요. 다들 술 먹자고 하면 빼서 말이지. 좀 친해져보자는 건데.
오 과장 : 나는 아침에 일찍 와서 회의 준비도 성의 있게 하고, 스스로 프로젝트 구상해 짜보기도 하는 애들이 기특해.
천 과장 : 맞아요. 묵묵히 일 열심히 하는 애들이 좋아요. “이거 좀 하자” 했는데 인상을 쓰고 있으면 ‘날 우습게 보나’ 싶기도 하고요.
장그래 : 진짜로 그런 애들이 있어요?
천 과장 : 너잖아, 너 너 너! 나는 막내 생활을 10년 했어. IMF 때라서 사람은 안 뽑지. 그러니 별수 있냐. 시키는 건 다 해야지.
오 과장 : 나 때는 뭐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하고 술 먹으러 가자고 하면 밤 12시에도 술 먹으러 가는 거였지. 그러다가 다시 5시에 일어나서 또 부랴부랴 출근하고 그런 때도 있었어.
천 과장 : 그런 거 보면 지금은 윗분들 성격이 많이 죽은 것 같아요.
오 과장 :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전체적으로 회사 분위기는 유해졌지만 속으로 더 많이 재게 된 것 같아. 줄을 잘 서야 된다는 말은 어디서 듣고 와서 상사를 두고 ‘썩은 동앗줄일까 아닐까’ 계속 간 보는 애들 때문에 피곤해.
천 과장 : 그리고 이제는 너무 평가받을 게 많아. 예전엔 위에서만 우릴 평가하니까 그냥 알아서 윗사람들에게만 잘하면 됐는데 이제는 후배들도 평가 하니 신경 써야 하고. 상사라고 다 쉬운 게 아니에요. 씁쓸하다.
장그래 : 윗자리들이 안쓰럽긴 해요. 나도 이제 선배 노릇 좀 하나 했는데 당돌한 신입들이 치고 올라오고,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어딜 가나 대접도 못 받고요.
천 과장 : 그래서 내가 술을 못 끊는 거야.
장그래 : 이제 술은 좀 자제하셔야죠. 부하직원도 생각해주셔야지. 저 연애 못 하게 하실 거예요? 그리고 평가 대비해서 공부도 하셔야죠.
천 과장 : 그래도 사내 정치 잘하시잖아요.(웃음) 나쁜 의미가 아니라 모든 분들께 친절하고 인사도 잘 받아주시죠. 제일 인기 좋아요.
오 과장 : 왜 이렇게 띄워주고 그래? 인사평가 때문에 그러는 거야?(웃음)
천 과장 : 제가 그런 거 신경 쓰나요. 저는 그냥 술로 버텨요. 즐거워도 술 먹고, 열 받아도 술 먹고, 대접하면서도 술 먹고.
장그래 : 전 사내 정치는 정말 못 해먹겠더라고요. 정치는 3개월입니다. 실력을 쌓아야죠. 물론 천 과장님과 술 마시는 건 정치와는 별개입니다.
천 과장 : 고맙다 장그래.
장그래 : 매일매일 욱하고 힘든 일도 많지만 어찌 보면 그렇게 사는 삶 자체가 원동력 아닐까 싶어요. 매일매일 싸워 이겨 나가는 힘. 이 시대의 미생들이 고달파도 아름다운 게 그런 이유인 것 같아요.
오 과장 : 오늘 좀 멋있다?
장그래 : 그럼 오늘은 과장님이 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