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의원(56세)은 ‘박 대통령의 남자’ ‘박의 아바타’ ‘박의 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는 정치인이다. 그런 그가 호남에서 그것도 새누리당 후보로 당선된 것을 놓고 정치권은 ‘기적에 가깝다’고 평하고 있다. 이를 놓고 주민들이 지역 발전을 위해 이정현이라는 참일꾼을 갈망한 데 비해 상대편 경쟁자는 지역주의 장벽에만 안주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많았다.
하지만 이정현 의원은 당선 공로를 평생 동지이자 연인인 아내 김민경씨(51세)에게 돌린다. 그녀는 2011년 말 유방암 판정을 받은 이래 여섯 차례 수술을 받았을 정도로 몸이 쇠할 대로 쇠한 상태. 하지만 김민경씨는 이번 선거에서 남편 이정현 의원을 돕고자 순천시와 곡성군 일대를 누볐다. 남편이 밀짚모자에 빨간 조끼를 입고 자전거를 탄 채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며 “참일꾼을 뽑아달라”고 외칠 때, 그녀는 남편이 방문하기 어려운 복지관을 방문해 독거노인의 손을 잡았다. 식당에서 배식을 하는 육체 봉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정현 의원이 부족했던 여성 표심을 사로잡은 것도 그녀의 힘이었다는 평이다. 기자는 7월 22일, 8월 6일 등 당선을 전후해 이정현 의원을 세 차례 만나서 남편 이정현 의원과 아내 김민경씨의 순애보를 들었다.
이정현 의원은 당선 공로를 평생 동지이자 연인인 아내 김민경씨에게 돌린다. 그녀는 2011년 말 유방암 판정을 받은 이래 여섯 차례 수술을 받았을 정도로 몸이 쇠한 상태에서도 이번 선거에서 남편 이정현 의원을 돕고자 순천시와 곡성군 일대를 누볐다.
이정현 의원은 부인 김민경씨를 처음 만난 1987년을 잊지 못했다. 6월 민주항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1987년 당시 그는 29세였다. 국회의원 비서관 업무로 분주하던 어느 날 지인한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자네, 내 대학 동창 딸하고 선을 한번 볼 텐가?” 이정현 의원은 이에 응했다. 그리고 맞선 날짜를 잡은 지 며칠 뒤 다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 집사람이 대학 동창 딸을 소개해주고 싶다는데, 하필 그날이네. 오전에는 집사람이 소개하는 사람하고 선을 보고, 오후에는 내가 소개하는 사람하고 선을 보는 것이 어떤가?” 이정현 의원은 지인의 소개를 뿌리치지 못하고 오전과 오후에 모두 맞선을 보기로 했다. 맞선 당일 오전. 저만치에서 빛이 나는 한 여성이 걸어 들어왔다. 바로 김민경씨였다. 이정현 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멀리서 걸어오는데, ‘아! 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릎을 쳤죠. 그 자리에서 바로 오후 선을 취소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사랑에 빠져 6개월 뒤 광주에서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상견례를 했다. 사위와 며느리가 될 사람을 마주 본 양가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흔쾌히 결혼을 허락했다.
“어찌나 서로 마음에 들어하셨던지, 그날 양가 부모님이 광주에 있는 처가댁과 곡성에 있는 우리 집을 모두 방문하셨어요. 예식은 딱 한 달 뒤에 올렸습니다.”
신혼여행지는 당시에 인기를 끌던 제주도였다. 신혼집은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있는 36.36㎡(11평)짜리 작은 아파트로 잡았다. 아내 김민경씨가 장만해 온 혼수를 놓을 공간도 부족한 그런 좁디좁은 곳이었다. “장롱처럼 큰 가구들은 처가댁에 맡아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어요.” 3남 1녀 중 장남인 그는 당시 대학생이던 동생 둘을 보살피고 있었다. 좁디좁은 아파트에서 부부와 동생 둘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나 비좁았다. 가족을 위해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구한 곳이 아파트는 아니지만 좀 더 넓은 지하 셋방이었다. 당시 아내는 임신 8개월이었다.
“하루는 자고 있는데 임신한 아내 배 위로 시커먼 쥐가 지나가서 놀라 깼어요. 또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늘 집으로 물이 들이쳐, 빗물이 무릎까지 차서 둘이서 양동이로 하루 종일 퍼내기도 했고요. 참, 그때 지하 셋방과 옥탑방에 지겹도록 살아봤습니다.하하.”
고되기는 하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 속에서 결혼 이듬해인 1988년 장녀 소정씨가 태어났고, 5년 뒤 장남 태호씨가 태어났다. 현재 장녀는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장남은 육군 일병으로 군 복무를 할 정도로 장성했다. 이정현 의원은 관악구 봉천동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시켜서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정현 의원은 늘 묵묵히 내조하는 아내를 볼 때면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한다. 그는 이 같은 아내의 헌신 속에서 늘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들이 태어난 지 몇 해 뒤인 1995년 광주시의원 선거에서 보수정당 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낙선. 이어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로 광주 서구을에 출마했다. 결과는 7백20표(1.03%)를 받는 데 그쳤다. 지역주의를 깨는 일은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그때마다 부인 김민경씨는 묵묵히 그의 곁에서 내조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이정현 의원을 눈여겨보다 발탁했다. 당대표가 총선 후 낙선한 후보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했는데, 이 자리에서 이정현 의원이 “당이 호남을 포기해선 안 된다”며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것을 보고, 그를 당 수석부대변인으로 임명한 것이다. 열정을 다하면서도 맡은 일에만 매달리는 점을 높이 샀다. 이후 ‘박근혜의 입’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는 열심히 뛰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경선에서 그는 당시 박근혜 후보의 공보특보로 활동했다. 급여가 나오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석패했다. 그때 마침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이정현 의원에게 정무부지사직을 제안한다. 부지사라는 직함과 번듯한 급여는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정현 의원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주변에서 혀를 차는 이도 많았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이 그를 부른 일화는 유명하다. 박 대통령이 “왜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자꾸 그러시면 정치 그만둘라요”라고 응수했다. 박 대통령은 “고맙다. 잊지 않겠다”며 웃었다. 그는 대선 경선에서 패배 후 박 대통령이 칩거할 때도 ‘대변인 격(格)’이라는 직함을 갖고 뛸 정도로 열정을 다했다.
그 후 이정현 의원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다시 광주 서구을에 새누리당 후보로 도전장을 냈다. 그는 여론조사에선 앞섰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39.7%라는 득표율로 낙선했다. 보수정당 후보가 호남에서 40% 가까운 득표를 한 것만으로도 굉장한 선전이었다.
이후 2012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다. 처음에는 정무수석으로 활동하다 2013년 윤창중 전 대변인이 성추행 사건으로 물러나자 이남기 전 홍보수석 후임이 됐다. 대통령이 그를 중용한 것이다. 남편이 분주하게 국정에 매달릴 무렵 내조를 하던 아내가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이 무렵 그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의 연인상은 순한 여자였다. 나는 밖에서 활발하게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집에 와서만큼은 정치 이야기 안 하고 좀 쉬고 싶었다. 그런데 제대로 만났다. 내 아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내게 딱 맞춤형이다.
정말 첫눈에 내 짝이다 싶었다. 아내는 순하디순하고 착하디착하다. 조용하다. 그러면서 강하다. 지금까지 아내가 어떻게 그 어려움을 다 헤쳐왔는지 기적 같다. 남편인 나는 가난하고 무심하고 사생활도 없고 재미도 없다. 아내는 최근 4개월 사이에 3번의 전신마취 대수술을 받았다. 두 군데 암 수술 때문이다. 많이 힘들어하고 괴로워한다. 아내가 아프고 난 뒤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새로 연애한다. 내 아내 민경이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쓰려 한다. 집 친구의 고생은 지금도 진행형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내가 고맙다는 것,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것, 그리고 남은 나의 생은 아내를 여왕처럼 받들며 살고 싶다는 것뿐이다.”
이정현 의원이 호남에 다시 도전장을 낸 것은 올 6월이었다. 세월호 침몰 사태라는 어려운 정국에서 그는 7월 재보궐 선거에 고향인 순천·곡성을 택했다. 이 지역은 김선동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한 곳으로 이정현 의원의 고향 집이 곡성이었다. 그러나 순천시 유권자는 21만5천4백79명, 곡성군 유권자는 2만6천8백19명이었다. 경쟁자인 서갑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는 순천 출신이었다. 보수정당 후보인 데다 고향 유권자 수에서도 크게 밀리자 주변에서는 또다시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나왔다. 다행히 아내 김민경씨는 순천 출신이었다.
이정현 의원이 처음 출마할 뜻을 알리자 아내는 남편이 내려가지 못하게 말렸다. 하지만 남편의 진심을 받아들인 아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순천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묵묵히 내조했다. 침을 맞아가면서 주민들의 손을 잡고 남편을 위한 한 표를 호소했다. 이정현 의원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유세했기에 아내와 함께 활동하는 일은 적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이정현 의원은 유세차에 올라탔다. 더 많은 주민을 빨리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7월 26일 오후 순천시 조례동에 있는 호수공원에서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 유세차에 이 후보 고교 선배이자 ‘순돌이 아빠’로 유명한 배우 임현식(69세)씨가 올라탔다. 임현식씨는 특유의 입담을 과시했다.
“소개할 분이 있습니다. 이정현 후보를 위해 언제나 스케줄 관리하고, 비가 오는데도 신발 닦아주고요. 그런 제수씨 보면 안부를 묻는 게 저희 일입니다. 제 처도 10년 전에 2~3년 (암으로) 고생하다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출마할) 그런 생각을 하다니!”
유세차 주변은 배우 임현식씨 특유의 입담에 “하하, 나쁜 놈”이라며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유세차에 올라탔던 이 후보는 미안함을 참지 못해 손에 꼈던 장갑을 벗고 눈물을 연신 훔쳤다. 이정현 의원은 집에 돌아가 세 시간을 자더라도 고통을 호소하는 아내를 꼭 주물러주고 눈을 붙였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이렇게라도 보답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같은 위기감에 새정치민주연합은 서갑원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지도부가 모두 뛰어들었다. 순천·곡성을 찾은 정치인은 7월 22일 김한길 전 공동대표, 25일 이해찬 의원, 26일 문재인·박지원 의원, 27일 안철수 전 공동대표, 28일 정동영 상임고문 등 수두룩했다.
칠전팔기 인생, 끝내 호남서 승리하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하늘은 이정현·김민경 부부의 손을 들어줬다. 이정현 의원은 6만8백15표, 49.43%라는 득표율을 얻어 상대방을 10%포인트 가까운 큰 차로 이겼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순천을 떠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시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지막 휴식을 곡성에 있는 고향 집에서 보낸 뒤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고향 집은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관암촌에 있다. 그는 고향 집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요. 담임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부임하실 때 곡성 읍내에서 ‘목사동면이 어디냐’고 물으니 마을 주민이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나룻배를 타라고 가르쳐줄 만큼 산중에 있어요. 저는 논에서 우렁이를 잡고 온갖 산새가 지저귀는 숲 속 바위에 누워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산 너머 세상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곳이 내 고향이었죠.”
그의 좌우명은 대공심 대공심(大空心 大公心)이다. 크게 비워야 크게 공공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국회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국민들은 국회가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손가락질합니다. 국민을 위해서 입법과 예산심의를 정성을 다해 해야 합니다. 국회도 뼈를 깎는 자기 혁신이 필요하고, 저도 저부터 기본적인 책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 이정현 의원은…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은 이번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텃밭인 전남 순천·곡성에 출마해 1988년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이래 26년 만에 ‘보수정당 후보 전남 당선’이라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당내에서는 ‘슈퍼스타’로 부상해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됐다. 4수 끝에 얻은 결실이다. 그는 앞서 1995년 광주시 시의원, 2004년과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각각 광주 서구을 등 호남에 지속 출마해 ‘뚝심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18대 국회에서 비례대표 의원을 한 차례 역임해 재선이다. 청와대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으로 발탁돼 당과 청와대 간 소통의 적임자라는 평을 받는다. 1958년 전남 곡성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광주살레시오고, 동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전남도지사를 지낸 구용상 전 민정당 의원의 총선 캠프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