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왕비의 일상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고 대부분 행복하지 않았다.
얼마 전 MBC 사극 <기황후>가 인기리에 종영되었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 자리에까지 오른 인생역전의 드라마가 전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전에도 궁궐 여인들의 이야기는 사극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여인천하>는 평소 사극을 즐겨 보지 않던 주부들까지 브라운관 앞으로 불러 모았고, <장희빈>은 잊힐 만하면 다시 리메이크되곤 했다.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에서 최근의 김태희까지 장희빈 역할을 거쳐 간 여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궁중 여인들의 일상은 실제로 어땠을까? 그녀들은 화려한 만큼 행복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비의 일상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고 대부분 행복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광해군의 왕비인 류씨는 평소 궁중에 불상을 모셔놓고 ‘다음 생애에는 왕가의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을까?
보통 왕비는 ‘간택’을 통해 왕비 혹은 세자빈으로 궁궐 생활을 시작한다. 왕과 왕세자의 혼인이 결정되면 우선 전국에 ‘금혼령’이 선포된다. 그리고 왕비와 세자빈의 후보자들을 물색하는데, 일단 1차 서류심사(?)에서 거른 후보자를 대상으로 ‘초간택’이 이루어진다. 평상복 차림의 처자들이 입궁하면 왕을 비롯한 왕족들이 먼발치에서 보고, 경험 많은 상궁들이 심사를 맡는다.
여기서 5~7명의 후보자를 걸러 다시 선을 보는 것이 ‘재간택’이다. 그리고 다시 3명의 최종 후보를 놓고 마지막 관문인 ‘삼간택’을 치른다. 이렇게 세 번의 관문을 통과한 후보자는 집으로 가지 않고 별궁에 머물면서 궁중 법도를 익힌다. 이렇게 엄격한 절차를 거쳐 들어간 궁궐 생활은 스트레스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선 왕비에게 궁궐은 감옥과 다름없었다. 국왕이야 그나마 선왕의 묘를 찾아가는 능행(陵幸)이다, 병 치료차 가는 온행(溫幸)이다, 해서 바깥바람을 쐬었지만 왕비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조선시대 왕비와 궁녀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왕비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왕자의 ‘생산’이었다. 결혼해서 아이 낳는 것이 무슨 큰일이냐고? 그게 왕비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다. 우선 국왕과의 합궁 날짜가 너무 적었다. 삼재가 끼거나 바람이 세게 불어도 불길하다며 내시와 상궁들이 합궁 불가를 외치니 합궁이 가능한 날은 겨우 한 달에 하루 이틀이었다.
그래서인지 왕비는 후궁에 비해 ‘생산성’이 매우 낮았다. 어렵사리 왕자를 얻었다 해도 당시의 높은 유아사망률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고, 다행히 건강하게 잘 자라 세자로 책봉되었다 하더라도 왕이 되기까지는 또 다른 관문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세자빈으로 출발했다면 남편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노심초사해야 했다.
이미 세자가 되었는데 임금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냐고? 물론 그렇지 않았다. 27명의 조선 국왕 중에서 원자 출신의 세자가 왕위에 오른 것은 단 4명뿐. 세자로 책봉되었다 하더라도 죽거나 쫓겨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왕비 또한 정치적 격랑에 휩쓸리면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까지 풍비박산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왕비가 되고 아들을 낳아 왕의 어머니로 대우를 받거나 심지어 수렴청정으로 권력까지 잡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그렇게 권력의 정점에 선다 하더라도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말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명성황후조차도 평소 “죽어서는 사대문 안을 돌아보지도 않으리라”고 했다니 말이다.
글쓴이 구완회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역사학도로서 저서 <아빠가 알려주는 문화유적 안내판>이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청소년 권장도서, 경기도 교육청의 수행평가 추천도서 등으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역사책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중학생을 위한 딱 2시간 한국사>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