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김성수(83세) 주교를 만나러 가는 길. 강화의 가을은 아름답다. 파란 하늘의 가을볕은 적당히 따뜻하고 서늘한 가을바람과 함께 단풍이 시작되고 있었다. 길상공설운동장 담벼락을 따라 들어가니 ‘우리마을’ 이정표가 보인다. 바로 김성수 주교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곳이다.
“아유,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했네. 여기 경치가 정말 좋죠? 사람들이 ‘우리마을’ 하면 장애인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데 이 돌담이 먼저 생각난다고 하더라고.” 아닌 게 아니라 마을을 빙 둘러싼 돌담이 인상적이다. ‘우리마을’을 짓느라 땅을 고르던 중 땅속에서 나온 돌로 멋들어진 담을 쌓은 것이다. 이곳이 원래 돌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땅을 파면서 온천만 나오면 신부들에게 자동차 한 대씩 선물하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13년 전 문을 연 ‘우리마을’은 건축가 조경수가 설계했는데 건물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노출 콘크리트와 나무를 사용하고 예배실은 흙벽돌로 지었는데, 당시에는 파격적인 시도로 건축학과 학생들의 순례 코스가 되었을 정도다.
“60명이 좀 안 되는 장애인이 함께 생활하고 일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콩나물 공장에서 일하고 단순 조립하는 기계부품 일도 하고. 여기 콩나물이 맛있다고 소문나서 찾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친환경 인증 받은 좋은 콩나물이에요. 사실 저는 그저 ‘우리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할아버지일 뿐입니다. 촌장이라고 부르는데 할아버지를 대접하느라 자리 하나 마련해주고 배려해주는 거지 아무런 권한은 없어요. 내 나이가 여든넷인데 자리도 주고 명함도 만들어주니 얼마나 고마워요.”
‘우리마을’에서 장애인들과 콩나물 키우는 주교
‘우리마을’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지적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이다. 일자리를 만들어가면서 그룹 홈과 기숙생활관을 통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2000년 김성수 주교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기부해 ‘우리마을’을 설립했다. 1970년대부터 베드로학교를 통해 장애인 중에서도 지적 장애인들의 교육과 자립에 관심을 쏟았던 김성수 주교는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업교육과 자립을 도울 수 있는 곳인 ‘우리마을’을 만들게 되었다. 김성수 주교는 성공회대 총장직을 마치고 4년 전부터 마을 옆에 사택을 짓고 정착해 생활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여기 들어오는 것이 좀 까다롭기는 해요. 사람 손이 부족하니까 스스로 신변 처리는 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적응할 수 있는지도 고려해야 하고. 사실 이런 시설이야 말로 신변 처리도 못하고 지적 장애가 더 심한 사람들이 와야 하는데 딱하고 안타깝죠. 어제도 중복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자아이가 결국 적응을 못해 엄마가 데려갔는데, 그럴 때 마음이 아프지.”
이들은 ‘우리마을’에서 일을 하고 적게는 30만원, 많게는 80만~9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 각자 받은 월급으로 기숙사비를 내고 나머지는 저금도 하면서 혼자 사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마을에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아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아이가 월급을 받아 부모님 속옷을 사드린 적이 있단다. 그 엄마가 얼마나 감동받았던지 눈물을 펑펑 흘린 것은 물론 동네에 소문이 나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칭찬해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이에게도 희망이 생긴 것이다.
“장애인 중에서도 지적 장애인의 숫자가 가장 많은데, 사실 이들은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없으니까 가장 힘들어요. 빨간 띠를 두르고 시위를 할 수도 없고. 지금도 눈물 흘리는 엄마, 아빠들이 많아요.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정신과 의사도 필요하고, 장애인들을 위해 특수교육을 전공한 교사도 필요하고, 언어치료사, 물리치료사, 의사, 간호사 등이 다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속상하고 안타까워요.”
인터뷰하는 동안 ‘우리마을’ 식구들이 김성수 주교를 향해 “할아버지, 최고다!”라는 말을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우리는 최고다’라는 말이 마을의 공식 인사. 거리낌 없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인사하고 그도 “야, 임마, 짜식들아 잘해~”라고 답한다. 한 여자아이가 다가와 내일 자신의 동생이 놀러 올 거라고 자랑하니 김성수 주교는 동생이 오면 꼭 할아버지한테 인사시켜달라고 답한다.
“이들과 잘 지내고 있지만 아직도 나랑 눈 맞춤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한번은 밥을 식판에 받아서 먹는데 한 사람이 밥만 가져와서 물에 말아 서너 숟가락에 다 먹어치우더라고요. 그저 밥만 혼자 먹어도 기특하고 고마우니까 엄마가 그냥 놔뒀던 거죠. 내가 그 식습관을 고쳐보려고 반찬도 억지로 먹이고 해봤는데 안 되더군요. 나중에는 그렇게 잘 먹던 밥도 안 먹을까 봐 그만뒀어요. 어릴 적에 생활습관을 바로잡아주는 게 중요해요. 장애아를 둔 부모들이 항상 하는 말이 아이보다 하루라도 더 늦게 죽고 싶다는 건데, 먼저 아이들이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제대로 가르쳐주는 게 중요하지. 부모가 천년만년 살 수 없으니까요.”
‘우리마을’로 봉사하러 오는 고마운 이들도 많다. 요즘은 이불 빨래나 식사 준비를 도와주는 단순한 노력 봉사뿐 아니라 장애인들과 함께 놀고, 바깥나들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봉사활동도 늘어났다. 직장에서 봉사하러 올 때도 꼭 자녀들과 함께 오기를 권한다. 강화도가 볼거리가 풍성하니 장애인들과 손잡고 함께 다니며 문화유산도 감상하고 같이 놀고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나랑은 좀 다르지만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경험하다 보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서서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소록도에서 오신 장로님 한 분이 ‘이 세상에 의사 선생님이 있어 고맙지만 의사 한 명 가지고는 안 된 다, 다른 의사가 한 명 더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이웃이다’라는 말을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죠. 그분 말처럼 진짜 이웃은 훌륭한 의사 선생님도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지적 장애인들이 생각을 못 하는 거 같지만 안 그래요. 그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도 ‘내가 여기 있으니 나한테 관심 갖고 나를 좀 제대로 봐라’ 그런 몸짓이거든요.”
나눔 실천한 어머니 영향을 받아 주교가 되다
평생을 장애인과 소외된 사람들 곁을 지키며 살아온 김성수 주교. 그가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고 소외받는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의 어머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높은 교육열로 자녀에게 정성을 다하셨고,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 줄 아는 분이었다.
“저 어릴 때는 거지가 그렇게 많았는데 거지가 오면 어머니는 싫은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으시고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그렇게 잘 도와주셨어요. 어머니의 그런 마음이 은연중에 내 마음속으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저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보거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적이 없어요.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성직자가 된 거죠.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했는데 18살에 덜컥 폐결핵에 걸려 10년 정도를 앓았어요. 처음에는 친구들이 찾아오다가 점점 뜸해졌는데, 그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던 것 같아요.”
김성수 주교는 친척 중에 폐결핵을 앓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주기적으로 그 아이에게 찾아가 말벗도 해주고 주사도 놓아준 적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어릴 적부터의 이런 작은 일이 모여 그의 앞날을 예고한 것이 아닐까? 건강을 회복한 후 앞으로는 대학 졸업장이 꼭 필요한 세상이 될 거라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단국대학교에 진학했고, 그 후 연세대 신학과와 성미카엘 신학원을 거쳐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오히려 어머니가 신부 되라, 장가가라는 말을 안 해 자연스럽게 신부도 되고, 김후리다 여사를 만나 결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국제결혼이 쉽지 않았을 텐데도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다.
“사제 서품 받고 봉사활동 하러 도쿄에 갔다가 마침 봉사활동 온 아내를 만나서 결혼했어요. 천주교는 신부가 결혼할 수 없지만, 성공회는 수녀님과 수사님을 제외하고는 결혼할 수 있거든요. 아들 하나 딸 하나 뒀는데, 남편으로 아빠로서는 빵점이에요. 오죽하면 아들 녀석이 어렸을 때 ‘아버지는 우리 집이 여관인 줄 아십니까?’라고 했겠어요.”
서양인과 비슷하다고 해서 군대를 못 간 탓에 박사학위를 일찍 받아 교수가 되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그만두고 여러 일을 전전하다 현재는 중소기업에서 구매 담당 일을 하고 있는 아들. 건축가 남편을 만나 두 딸을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딸.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미안한 부분이 많다고 한다. 생김새가 달라 힘든 점도 많았을 텐데, 아버지로서 그런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던 것이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대학교수직을 그만둔 아들 녀석이 미워서 말을 안 하고 지낸 지가 여러 해 됐어요. 집에 오면 인사만 하는 식이죠. 이제 슬슬 먼저 말을 걸어봐야 할 텐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되네요.”
김성수 주교 역시 자식에게는 이길 수 없는 우리의 아버지 모습 그대로다.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른 낯선 땅에 시집와 평생을 함께 살고 있는 아내에게 한없이 고맙지만, 무뚝뚝한 한국 남자이다 보니 말로 표현을 잘 못한다.
“아내가 예전부터 장난감도서관 일을 하고 있는데 내년에 세계 장난감도서관 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려요. 그 일로 요즘은 나보다 더 바쁘죠. 제가 사실 밖에서 말을 많이 하니까 집에서는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그것도 아내는 불만이죠. 그래도 제가 저녁밥까지 ‘우리마을’에서 해결하고 들어가니까 집안일을 도와주는 셈이지 않나요?(웃음)”
여느 부부처럼 때로는 부부싸움도 하면서 지내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아내의 모습을 지금도 ‘앙탈’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애정이 넘친다.
장애인에게 편안한 여생을 선사하고 싶다
김성수 주교에게는 또 하나의 과제가 남아 있다. 바로 ‘우리마을’에 양로원을 짓는 일이다. 베드로학교 1회 졸업생이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그의 나이가 올해로 쉰넷. 70년대에 생긴 베드로학교가 40여 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들의 노후를 생각해야 할 때인 것이다. 사회에서도 50이 넘으면 퇴직하고 노후를 걱정하는데, 이곳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퇴직을 하고 나면 갈 곳이 없다. 다행히 아버지가 물려준 땅이 조금 남아 있어 몇 년 안에 양로원을 지어 이들이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는 온 세상이 다 교회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사람들과 생활하는 것이 곧 예배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고. 십자가 달아놓고 그 밑에 모인 사람만 교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좀 더 넓고 포용력 있게 세상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가 여기까지 온 건 사실 다른 지식이 없기 때문이에요.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이 사람들과 노는 것밖에 없으니, 이렇게 놀다 보니까 마치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강까지 가는 것처럼 여기까지 흘러온 거죠.”
그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주기도문의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주교님, 총장님 등의 무거운 호칭보다는 할아버지, 촌장으로 불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며 ‘촌장’이라고 적힌 모자를 열심히 쓰고 다닌다. 인터뷰를 마치고 꼭 밥을 먹고 가야 한다며 김성수 주교가 데려간 곳은 ‘성 안나의 집’이라는 양로원. 마침 자원봉사자들의 식사 봉사가 있었다. 할머니들을 찾아가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손을 잡아주는 김성수 주교. 따뜻하고 듬직한 믿음의 손길로 어려운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그 모습이 가을 하늘보다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아내 김후리다 여사와 함께. 천주교는 신부가 결혼할 수 없지만, 성공회는 수녀님과 수사님을 제외하고는 결혼할 수 있다.
우리마을’은 지적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이다. 김성수 주교는 일자리를 만들어 지적장애인들이 자립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