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7일, 경상남도 통영시의 가오치 선착장은 예상치 못한 인파로 북적거렸다. 여객선 매표창구 안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새벽부터 오셔서 여객선 표 끊어 가신 분이 많아요. 지금 들어가시면 나오는 배편이 없어요. 참고하세요.”
백건우의 섬마을 콘서트가 열리는 사량도행 왕복 여객선 표는 이미 매진됐다. 이제 막 오후 3시가 된 때였다. 그럼에도 1박을 각오하고서라도 일단 섬으로 들어가겠다는 이들이 차고 넘쳤다. 이게 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라는 이름 덕에 벌어진 상황이다. 프랑스 파리를 주 무대로 세계를 주름잡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특히 그는 한 작곡가의 작품 전곡을 섭렵하고 이를 독자적인 해석으로 연주해 높이 평가받고 있다. ‘건반 위의 구도자’ ‘건반 위의 순례자’라는 수식어는 음악에 대한 그의 치열한 탐구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 그가 콘서트를 연다고 하니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설령 그곳이 서울에서 5시간가량 걸리는 남해안 한려수도에 자리한 섬이라 해도 말이다. 지난 6월 3일 울릉도에서 열린 섬마을 콘서트 이후 두 번째 무대가 된 곳이 바로 통영의 사량도다. 오후 5시, 드디어 사량도행 여객선이 출발했다. 여객선 안에는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잡은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아장아장 걸음을 떼는 아기부터 교복 차림으로 깔깔거리는 아이들, 셀카를 찍느라 여념 없는 대학생 커플, 얼굴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40~50대 부부와 어르신들까지. 모두 백건우의 공연을 보기 위해, 그를 만나기 위해 사량도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모두 설레는 모습이 역력하다. 뱃길을 가로질러 40여 분 달렸을까? 어느덧 사량도에 다다랐다.
자연과 음악이 하나 되는 곳, 사량도
여객선 터미널에서 콘서트가 열리는 덕동마을 물양장까지는 10여 분이 걸린다. 공연을 1시간 남짓 앞두고 있어 공연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쳐 흐르고 짠 내음 퍼지는 바다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긴다. 우측으로는 선착장에 정박한 어선들이 보이고, 좌측에는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자리해 있다. 동네 어귀를 돌아가니 사량도 주민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공연장으로 가고 있다. “얼른 가자니께. 지금 가면 자리 있겄지?” 혹여 늦게 출발한 건 아닌지 걱정하는 어르신의 뒷모습이 분주하다. 공연이 열리는 물양장 근처에는 벌써 긴 줄이 늘어섰다. 따가운 뙤약볕이 불그스름한 노을로 바뀌어가는 무렵이었다. 이윽고 물양장에 설치된 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명 하나가 거장이 연주할 피아노를 비춘다. 그 주변에 설치된 조명에는 그물을 걸어 바닷가의 정취를 표현했고, 무대 뒤로는 붉은 등대와 고깃배, 산등성이가 아름답게 펼쳐졌다. 사량도는 남해안 한려수도의 중심에 자리한 작은 섬이다. 사량도의 옛 이름은 박도였지만 이 섬의 상도와 하도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가늘고 긴 뱀처럼 구불구불한 형세에서 유래해 이 해협을 사량이라 불렀고, 이것이 섬 이름의 기원이 됐다고 한다. 아름다운 절경과 바다가 어우러진 사량도야말로 거장 백건우의 무대로 손색없지 않은가. 자연과 음악이 하나 되는 곳, 어민의 섬 사량도는 이제 음악의 섬으로 거듭나게 됐다. 바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런 문화적인 공연을 보기 쉽지 않은데 백건우 선생님이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몰라요. 음악과 자연이 하나 되는 순간을 경험했어요. 개 짖는 소리도,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모두 음악 같았죠. 모든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영원한 파트너, 아내 윤정희가 말하는 행복
석양이 내린 덕동마을 물양장에 조명이 켜졌다. 백건우의 섬마을 콘서트를 다큐멘터리로 담아내기 위해 대기한 촬영팀의 카메라도 돌아가기 시작한다. 공연 시작 전 그의 영원한 파트너 윤정희씨도 객석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매 공연마다 비서를 자처하며 그의 손발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지나간 세월만큼 변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쉬이 스러지지 않는 단단함이 그녀에게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번 섬마을 콘서트 간담회에서 그녀는 말했다. 오랜 세월 함께한 그녀에게도 남편 백건우의 음악을 듣는 일은 여전히 행복한 일이라고. 이러한 믿음과 애정, 그리고 함께한 세월 동안 다져진 그녀의 단단함이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지탱하는 힘이리라. 그렇게 행복한 꿈속에 다시 한 번 발을 디딘 그녀는 두 손을 꼭 쥐고 남편의 선율에 또다시 몸을 맡겨본다. 공연장이 정돈되고 곧 백건우가 등장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에는 박수 소리가 퍼져나간다. 객석을 메운 1천여 명의 눈동자와 귀가 그를 향하고, 객석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거장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앉은 이들도, 서 있는 이들도 모두 숨을 죽이는 순간. 잔잔한 바다에 파문이 일듯 고요함 가운데 그의 담담한 연주가 시작됐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8번 비창’부터 쇼팽의 ‘야상곡’, 그리고 리스트의 ‘베네치아와 나폴리’가 차례로 흘렀다.
유려한 손놀림, 손끝에서 탄생한 선율의 아름다움
역시 거장은 달랐다. 피아노와 하나 되고, 음악과 하나 된 그의 모습은 가슴속에 전율이 일게 했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유랑하듯 움직이는 그의 손놀림은 ‘유려하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응원의 기운을 보내는 관객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칭얼대던 아이도 조용히 그를 응시했고, 클래식은 처음 듣는다며 어리둥절해하던 어르신들도 공연에 완전히 몰입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선율에 감동을 받아 눈가를 훔치거나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대고 눈을 감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거장의 음악은 영혼의 울림으로 변해 관객들의 가슴을 연신 두드렸다. 조용한 바닷가에 홀연히 흐르는 피아노 선율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온전히 몰입해 연주하는 백건우의 뒷모습과 완벽한 강약 조절로 선율을 이끄는 그의 손놀림이 실로 놀라웠다. 그리고 그의 모습 뒤로 펼쳐진 자연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그와 하나였던 것처럼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주변의 공기마저 악보로 삼은 그의 모습에서, 왜 그가 세계 최고인지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바다를 감싸는 동안 이따금 새소리가 들렸는데, 신기하게도 그 새소리가 방해가 되기는커녕 자연스레 하나의 선율로 녹아들었으니까. 1시간여 동안 이뤄진 공연은 막바지까지 그 흐름을 잃지 않았다. 바다도 그의 연주에 호응하듯 음의 높낮이에 따라 일렁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쌀쌀해지는 바닷바람도 따스하게 흐르는 선율과 만나 잔잔해졌다. 문화와의 접점이 상대적으로 적은 곳, 이 작은 섬에서 클래식 무대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더군다나 세계적인 거장이 이곳까지 찾아온다는 것은 더더욱 꿈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 꿈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부산스럽지만 소탈하고 인간적인 섬마을 주민들과 하나 된 그의 무대는 바다 위에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난생처음 함께 공연장을 찾아 현악 4중주 공연을 들었을 때, 공연이 끝날 무렵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어머니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그 순간이 지금 이곳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곡의 마지막 음이 피아노 건반에 닿자 말 그대로 우레 같은 함성이 객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치는 이들이 물결을 이뤘다. 감격적인 순간이다. 다시 한 번 객석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하는 거장을 향해 모든 이들이 힘차게 박수를 쳤다. 서정적인 선율이 내려앉은 섬마을에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객석의 사람들도, 그들을 모두 감싼 자연도 완연하게 빛났다.
힐링과 나눔, 섬마을 콘서트의 의미
“바삐 살면서 잊고 산 순수한 마음이 그리웠어요. 때 묻지 않은 섬마을 사람들을 만나 나 혹은 인간의 참모습을 찾고 싶었습니다.”
섬마을 콘서트를 앞두고 백건우가 전한 말이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에게 바다는 고향이나 다름없다. 본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은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한 그의 여정에 섬마을은 필연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마을 축제가 이어졌다. 공연장 근처에 있는 작은 학교에서 열린 축제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주축이 돼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 백건우와 윤정희 부부도 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서로 격려하며 건배하고 웃음 띤 얼굴로 사진도 찍었다.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거제도에서 왔다는 주부 윤현진(35세)씨는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런 문화적인 공연을 보기 쉽지 않은데 백건우 선생님이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몰라요. 음악과 자연이 하나 되는 순간을 경험했어요. 개 짖는 소리도,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모두 음악 같았죠. 모든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눔을 모토로 한 그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신 안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부었고, 모든 이들이 그 열정을 가슴속 깊이 받아들였으며, 이를 통해 힐링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물론 공연을 이끈 그 역시도 공연의 목적인 인간의 참모습,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발견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의 공연을 단 한 번이라도 직접 목도한 이들은 알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흔해 빠진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님을, 진심을 전하는 그의 연주가 가슴속에 남았기 때문임을. 백건우는 음악이 지닌 소통의 힘을 믿는다. 그는 섬마을 콘서트 간담회에서 “음악회 자체가 대화이며, 하고 싶은 말을 음악을 통해 전달하고 순수한 섬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 클래식을 잘 알지 못해도, 설령 자신을 알지 못해도 음악을 통해 그들과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거장 백건우. 이번 섬마을 콘서트에서 그는 제대로 소통했고, 충분히 교류했다. 사량도의 어느 날 밤, 그와 같은 공간에서 음악을 통해 교류한 모든 이들의 눈빛이 그 증거다. 야외 콘서트임을 잊게 할 정도로 공연에 집중도를 이끌어낸 피아니스트 백건우.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그 시간을 그 역시 잊지 못할 것이다.
“바삐 살면서 잊고 산 순수한 마음이 그리웠어요. 때 묻지 않은 섬마을 사람들을 만나 나 혹은 인간의 참모습을 찾고 싶었습니다.” 연주 소감을 밝히고 무대를 내려오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이 여전히 행복하다는 아내 윤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