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어떠셨나요?” 송혜교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자화자찬을 예상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전혀 민망스럽지 않을 만했다. 그야말로 화려한 복귀가 아니던가. 주위에서 쏟아지는 칭찬에 으쓱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딱 한 마디만을 남겼다. “그 겨울, 전 행복했습니다.” 그뿐이었다. 자만심도, 우쭐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반기면서도 흥에 취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대중의 곁에서 잠시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속을 꽉 채워온 덕분이었다.
송혜교를 만났다. SBS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를 끝낸 그녀는 드라마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그 겨울’은 어땠는지 들어봤다. 어떻게 그녀가 스타에서 배우로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송혜교, ‘오영’이 되다
그야말로 <그 겨울> 열풍이었다. 마지막 회 시청률은 15.8%. 하지만 체감 인기는 그 이상이었다. 매주 방송될 때마다 송혜교, 조인성은 화제가 됐고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쏟아졌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KOBACO)가 조사한 프로그램 몰입도(PEI:Program Engagement Index)에서 KBS2 드라마
<내 딸 서영이>와 함께 공동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사실 이렇게 반응이 좋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어요. 좋은 느낌은 들었지만요. 첫 방송 전 1~2부 편집본을 봤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특히 1회는 한 10분 정도 본 듯했는데 1회분 방송이 끝나더라고요. 느낌 있네라고 생각했죠.”
그중에서도 송혜교는 첫 회부터 주목을 받았다. 초반부에는 실감나는 시각장애인 연기로, 중반부 이후에는 섬세한 내면 연기로 호평을 들었다. 특히 절제된 감정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감정이 극대화될수록 차분하게 표현했다. 깊은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은 ‘오영’이란 캐릭터에 딱 들어맞았다.
“너무 힘들었어요. 지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죠. 노희경 작가님의 대본이 정말 어렵거든요. 다른 드라마에서는 감정이 1~2단계라면 <그 겨울>은 4~5단계까지 치고 올라간달까. 오영에 몰입한 채 한 신 한 신 찍어가면서 저도 모르게 지치더라고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죠.”
그럼에도 16부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매순간 캐릭터를 분석했고 감정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송혜교는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오영이 돼갔다. 그녀의 연기가 자연스러워 보인 것도 그 덕분이다. “오영에 빙의했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작품을 하는 내내 마음이 아팠어요. 오영에 빙의했다고 해야 하나요. 지금도 그래요. 가만히 있다가도 오영이 한 대사를 생각하면, 울컥해요. 마음이 아련해지죠. 정말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때가 그립기도 하고…. 지금 제가 그래요.”
동갑내기 조인성은 좋은 파트너
송혜교가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상대 배우와의 완벽한 호흡 덕분이기도 했다. 그녀는 ‘오수’ 역으로 출연한 조인성과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쳤다. 첫 호흡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비결을 묻자 송혜교는 동갑내기 친구였기에 가능했다고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어요. 같은 사무실에 있었거든요. 서로 알고 있는 지인이 겹치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사석에서 함께 술도 마시는 사이였는걸요. 그러니 연기하는 게 편할 수밖에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면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바로 몰입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단순히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송혜교는 시기적인 ‘운’도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20대가 아닌 30대에 호흡을 맞추게 돼서 다행이라는 것. 연기가 더 성숙해졌을 때 만나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설명이다.“시기적으로도 잘 맞았어요. 만약 20대 중반에 만났다면 부딪힐 수도 있었을 거예요. 연기 욕심이 불타오를 때였으니까요. 실제로 그때 전 제 연기밖에 못 봤거든요. 그런데 이제 작품을 해석하는 눈이 생긴 상태에서 만났으니 참 다행이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송혜교가 본 조인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녀는 “나도 ‘오수앓이’를 했다”는 말로 정리했다. 조인성 연기를 볼 때면 시청자 입장에서 보게 됐다는 것. 특히 정형화된 연기 패턴이 아니라 신선했다고 했다. “대부분의 남자 배우들은 우는 모습이 비슷하거든요. 그런데 조인성은 다르더라고요. 여느 여자 배우보다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했어요. 그런 점이 신기했죠. 대단하기도 하고요. 어떻게 여배우들보다도 우는 연기를 잘할까 싶었어요.”
스타에서 배우가 되기까지
하루아침에 이룬 성과는 아니었다. 송혜교는 지난 2008년부터 약 5년에 걸쳐 속을 채워갔다. 흥행보다는 작품을 우선시했다. 대표적인 예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일대종사>다. 단역임에도 불구하고 거장과 호흡을 맞춘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출연했다. 이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4년. 송혜교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너무 힘들었어요. 중국에 갔는데 촬영하지 않는 날이 수두룩했어요. 같은 장면을 30번 이상 찍은 적도 있었죠. 그렇게 4년을 보냈어요. 솔직히 그때는 ‘내가 왜 한국의 좋은 작품을 마다하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싶더라고요. 이제라도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했고요.”
막상 촬영에 들어가 연기 해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오케이 사인을 받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원망하고 탓하며 보낸 시간이 여러 날이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송혜교는 밑바닥부터 다시 밟았다. 기본부터 다시 다진 것. 캐릭터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연기가 생각만큼 안 되니까 저 자신에게 화가 났어요. 어느 날은 위스키를 한 잔 마신 적도 있어요. 가슴이 너무 답답한데 풀릴까 싶어서요. 그렇게 연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간 송혜교의 느낌은 안 나게 했어요. 손짓 하나를 연기하더라도 온전히 그 캐릭터로 보일 수 있게끔요.”
그렇게 송혜교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연기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됐고, 더 잘해내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됐다. 그렇게 송혜교는 스타가 아닌 배우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 4년 사이 성숙해졌다.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고, 연기가 고픈 게 어떤 건지 알게 됐다”면서 “만약에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열정적으로 하지 못했을 것 같다. 더 열심히 할 수 있게 된 발판을 마련해준 셈이다”라고 회상했다.
송혜교, 또 다른 도전을 꿈꾸다
지금 송혜교는 그 어느 배우도 부럽지 않은 위치에 올라와 있다. 미모, 연기, 흥행 모두 거머쥐었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만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하지만 송혜교는 또다시 도전을 꿈꾸고 있다. 그 시작은 오우삼 감독의 <생사련>이다. 또다시 서게 된 출발점. 하지만 조금의 두려움도, 주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왕가위 감독처럼 오래 찍는 스타일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환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 용기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묻자 <그 겨울>이 잘된 덕이라며 “다음 작품은 흥행을 신경 쓰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게 됐다. 모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다”라고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국내 작품도 할 생각이다. 차기작으로 영화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안방극장에도 여전히 마음을 열어놓고 있다. 단, <그 겨울> 못지않은 작품이어야 마음이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첫 번째 이유고, <그 겨울>이 시도한 반사전 제작 시스템에 매력을 느낀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사실 한국 드라마의 제작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쪽대본과 밤샘 촬영은 기본이다. 생방송 수준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을 정도다. 반사전 제작을 한 <그 겨울>은 이례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송혜교는 “앞으로도 드라마를 계속할 생각이 있다”면서도 “다만 여유 없는 현장이라면 고민이 될 것 같다. 힘들기 때문만이 아니다. 완성도가 높아야 보는 사람도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겨울>을 통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송혜교는 내일을 꿈꾸는 배우다. 지금 서 있는 자리보다 미래를 점친다. 그녀가 스타로 시작해 배우로 자리 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꼬박 17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한길만을 걸어왔다. 이제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 아직 못다 보여준 것도, 남은 시간도 많다고 했다. 송혜교가 또다시 보여줄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갈수록 작품을 선택하기가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저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절 있는 그대로 지켜봐주셨으면 해요.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잖아요. 저, 그러긴 싫거든요.”
연기가 생각만큼 안 되니까 저 자신에게 화가 났어요. 어느 날은 위스키를 한 잔 마신 적도 있어요. 가슴이 너무 답답한데 풀릴까 싶어서요. 그렇게 연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간 송혜교의 느낌은 안 나게 했어요. 손짓 하나를 연기하더라도 온전히 그 캐릭터로 보일 수 있게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