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딸, 여자, 아내, 배우, 봉사활동….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역할을 조화롭게 해내고 있는 정애리. 10년 넘게 하루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해왔지만 오히려 요즘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 비결은 나눔에서 오는 여유로움일 터다. 오히려 바쁘게 일하고 남을 도울 때 힘이 나기에 그녀는 자꾸만 바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 그녀가 최근 ‘작가’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추가했다. <축복-그러나 다시 기적처럼 오는 것>(포북)이라는 책을 낸 것이다. 첫 에세이집 <사람은 버리는 게 아니잖아요> 이후 8년여 만이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오후, 홍대 앞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악수를 청한다. 손이 따뜻했다.
오랜만에 에세이집을 출간하셨어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모아 엮은 책이에요. 편지 형식을 빌려 일상과 나눔 활동, 연기자로서 삶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풀어나갔죠. 평소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분들의 응원에 힘입어 제가 가진 작지만 따뜻한 힘을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책을 내게 됐어요.
평소 SNS를 즐겨 사용하시나 봐요. 아뇨. 그 흔한 미니홈피도 안 했는걸요. 페이스북은 남편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어요. 그저 나에게 일기 쓰듯, 또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그날의 묵상을 사진과 함께 올리기 시작했을 뿐이죠. 간단한 문자 메시지를 페북으로 이사시킨 정도라고나 할까요.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분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조금 다르긴 했지만요. 그런데 여러분이 달아준 댓글에 저절로 힘을 얻었고, 또한 지인들과 안부를 나누는 시간이 참 행복하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수수한 이야기를 페북에 많이 올리게 됐어요.
글 말미에 종종 붙여놓은 ‘축복합니다! 아자아자, 파이팅!’이라는 문구가 참 친근해요. 축복하고 싶었고, 위로하고 싶었고, 힘을 주고 싶었어요. 사실 “축복합니다”, 하면 되게 조용하고 경건하게 나올 것 같은데, 바로 ‘아자아자, 파이팅!’ 하니까 순진무구하면서도 귀여운 문구가 된 것 같아요. 제 페이스북 친구들 사이에서 먼저 유행어처럼 번졌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대부분의 글 말미에 넣었어요.
사진도 직접 찍으셨다고요. 몇 개 빼고 전부 스마트폰으로 찍은 거예요.(웃음) 평소 사진을 찍어서 남기고 기록하는 스타일이에요. 흔들리는 차 안에서, 촬영하다 잠시 짬을 내어, 혹은 걷다가 잠시 발길을 멈추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죠.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더욱 애정이 가는 책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모든 사진에 의미를 두었고,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그림이고 작품이었다.)
글은 주로 언제 쓰세요? 특별한 날에 특별한 주제로 글을 쓰진 않아요. 그저 사소한 일상을 바라보고 깨닫는 과정을 글로 풀어서 쓸 뿐이죠. 누구라도 보고 듣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에요. 다행히 저는 여러 촬영 현장을 통해 다양한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남들보다 조금 특별한 풍경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들이 주는 선물 같은 메시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애정이 가는 글귀가 있나요? 모든 글이 다 특별하지만 그중에서도 ‘이태리 봉선화’라는 제목의 글이 애정이 가요. 제가 원래 지인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을 때, 제가 보고 느낀 저의 이야기를 더불어 같이 전하곤 하는데, 그때 처음 보낸 글이 ‘이태리 봉선화’예요. “얼마 전, 우리 집 대문 사이에서 발견한/ 이태리 봉선화입니다./ 봄에 화분을 놓아두었는데 그 꽃씨가/ 날아가 새 생명을 키웠더군요./ 이미 화분은 없어졌는데…/ 너무나 장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아무도 보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희망의 씨앗만 가지고 있으면,/ 한 줌도 채 안 되는 흙으로라도 버티기만 한다면,/ 이렇게 또다시 꽃을 피울 수 있겠지요./지금 열매가 보이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라/ 희망의 씨를 품고 있는 것이 더 큰 생명이고/ 열매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내용인데,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마음으로 받아주고 기뻐하셨어요. 때로는 위로를 얻는다는 분도 계셨고요. 그 덕분에 저 또한 위로를 받았어요.
책이 편지 콘셉트인데, 실제로 손 편지 같은 걸 쓰는 편인가요? 손 편지는 거의 딸에게만 써요. 그러고 보면 남편에게도 엄마에게도 딸에게 표현하는 것만큼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늘 사랑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굳이 말을 안 해도 당연히 알 거라 생각하는 거죠. 이번 책에 실린 ‘엄마에게 쓰는 편지’ 부분을 보고 엄마가 그렇게 우셨어요. 감동받으셨대요. 앞으로 자주 표현하고 살아야겠어요. 손 편지든 카드든, 문자든 전화든.
나눌수록 채워지는 기쁨, 봉사
1978년 KBS 신인 탤런트로 데뷔한 정애리는 35년간 수십 편의 드라마와 연극, 영화를 아우르며 활약하고 있다. 절정의 연기력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MBC 방송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서울연극제 최우수연기상, MBC 연기대상 중견배우 부문 황금연기상 등을 수상하며 대한민국 대표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힌 천생 연기인이다.
연기 못지않게 정애리의 선행과 기부 열정은 대단하다. 지난 1989년부터 아동시설인 ‘성로원’을 매주 방문하며 지원해왔고, 2004년부터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국제 구호단체 월드비전을 통해 2백 명 넘는 아이를 후원하고 있다. 또한 매년 가나·모잠비크·우간다·콩고·에티오피아·르완다·인도 등으로 해외 구호활동도 다녀온다. 2005년 자신의 나눔 활동을 에세이 형식으로 펴낸 책 <사랑은 버리는 게 아니잖아요>의 인세 전액도 ‘정읍 사랑의 도시락 나눔의 집’에 내놓았다. 그녀가 매년 기부하는 금액은 1억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봉사의 시작이 ‘성로원’이죠. 그곳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처음엔 방송 촬영차 간 거였어요. 촬영 후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자꾸 맘에 걸리더라고요. 생각보다 가까운 곳(노량진)에 있었고, 원래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 달 후쯤 혼자 다시 찾아갔어요. 그런데 저처럼 정말 다시 온 사람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알리지 않고 혼자 다니자는 마음에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며 8년쯤 버텼어요. 그러던 중 방송에 나가서 한 번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후 굉장히 많은 분이 동참하고 후원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생각을 달리하게 됐죠. 어느 정도 선을 지켜가며 알릴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해외 아동들을 돌본 건 언제부터인가요? 2004년부터 했으니 햇수로 10년째네요. 도움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관심을 갖다 보니 월드비전을 알게 되었고, 이후 나눔으로 할애하는 시간과 정성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됐어요. 도움이 필요한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다 보니 결연 이후 두 번 이상 만난 아이들도 간혹 있어요. 절망적인 상황에서 만난 아이가 두 번째 만남에서 새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나눔과 희망의 아이콘인데, 살아온 환경이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저희 친할아버지가 한의원을 하셨는데 무료 진료를 많이 하셨대요. 진료하다가 환자 몸에서 고름이 나오면 입으로 그걸 빨았을 정도로 환자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이 대단했다고 하더군요.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존경받는 할아버지를 뵌 적은 없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나중에 고모들한테 얘기 들어서 알게 됐어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제 모습이 할아버지를 꼭 닮았다고요.
요즘은 딸아이가 제 걱정을 많이 해요. 제가 힘들까 봐 걱정, 행여 아플까 봐 걱정이래요. 그런 딸을 보면서 오래전 나는 왜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고 돌이켜보게 돼요. 어른스러운 딸이 저에게 좋은 공부 하나 가르친 셈이죠
정애리씨 딸도 엄마를 닮아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라고 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봉사활동을 다녔거든요. 딸아이가 7살 때 중국에서 꽃제비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쓴 시가 있어요. ‘난 참 궁금하다./ 북한의 아이들은/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하나?/ 아빠가 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하나?/ 난 참 궁금하다’라는 내용이죠. 당시에 그 시를 읽고 가슴이 뭉클했어요. 그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살아야 한다는 게 어떤 걸까, 하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예전에는 “엄마는 나보다 딴 (고아원) 아이들을 더 사랑해?”라고 말하던 어린 딸이 자라서 이제는 저보다 마음 씀씀이가 더 나아요. 특히 노인들이 방치되고 있다는 뉴스에 안타까워하고요. 엄마가 봉사에 열심이다 보니 딸도 그런 마음을 남보다 조금 일찍 품게 된 것 같아요.
자녀교육은 어떻게 시켰나요. 공부하란 말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다만 학생의 신분에서 해야 하는 건 공부라고 가르쳤어요. 또 ‘이거 하면 이거 해줄게’ 식의 조건부 약속은 하지 않았어요. 뭐든 아이의 선택에 맡겼고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도록 했어요. 단, 자신의 말과 행동엔 반드시 책임지도록 했죠. 마지막으로 ‘네가 내 딸이어서 고맙다’ ‘네가 내 딸인 게 참 자랑스럽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딸이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나요? 한동안 딸아이가 뮤지컬 배우를 할까 NGO 일을 할까, 흔들리고 있기에 진지하게 얘기해줬어요. 뮤지컬 배우로 성공하려면 그 일을 엄청나게 좋아하거나 아주 뛰어난 가창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우니 잘 생각하라고요.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더니 엄마 말이 맞고 자기에게 배우 소질은 없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NGO 쪽으로 마음을 굳혔죠. 이번에 서울에 있는 한 대학 국제학부에 수시합격을 했는데, 이곳에서 외국 언론기관이나 NGO에 가도록 훈련시킨다고 하더군요. 여러모로 잘됐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타고난 딸아이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모녀관계가 무척 특별해 보여요. 우린 많이 닮았어요. 닮아서 유난히 친한 모녀가 있고, 너무 닮아서 오히려 티격태격하는 모녀가 있는데, 우린 전자에 해당해요. 서로 편지도 자주 쓰고 쪽지도 많이 주고받아요. 늦게까지 일이 있는 날은 딸의 침대에 쪽지 남기고 나오고, 또 아이는 제 침대에 ‘엄마가 자랑스러워, 힘내세요’라는 쪽지를 남기는 식이죠. 요즘은 딸아이가 제 걱정을 많이 해요. 제가 외로울까 봐 걱정, 힘들까 봐 걱정, 행여 아플까 봐 걱정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딸을 보면서 오래전 나는 왜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고 돌이켜보게 돼요. 어른스러운 딸이 저에게 좋은 공부 하나 가르친 셈이죠.
어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평생을 부지런히 살아오셨어요. 지금도 여전히 집안의 모든 일을 혼자서 다 찾아 하시고 밤만 되면 “애고, 애고!” 낮은 신음을 내시죠. 여든다섯의 연세에도 ‘엄마’라는 짐을 덜지 못하신 채 자식들 대신해 눈비를 다 맞아주시고, 딸인 제가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시면서도 드라마에서조차 고생하는 제 모습을 보는 건 싫다고 하세요. 누군가에게 선물이라도 받으면 맛있는 식사를 꼭 대접해야 하고, 정치 얘기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도 젊은이에게 뒤질 것 없는 멋쟁이시죠. <가요무대>를 볼 때면 늘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노래가 있는 ‘귀요미’ 엄마세요. 저에게 엄마란 존재는 큰 언덕이고 산이고 꿈이에요.
그렇다면 정애리씨는 어머니에게 어떤 딸인가요? 지금까지 늘 같이 살면서(정애리는 결혼 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큰 사랑과 도움을 받고 있어요. 4남2녀 중 막내딸인 저를 볼 때면 어머니는 피곤할까 봐 더 많이 쉬게 해주고 싶으면서도 다른 자식과 있었던 이야기, 간혹 섭섭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신가 봐요. 언제나 어머니가 제 옆에 있어줄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5년 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난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됐어요.
어머니께 더 잘해드려야겠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 어머니도 많이 쇠약해지셨어요. 그리고 얼마 후 막내 오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다음엔 숨 한 번 편히 쉬지 못하시죠. 남편 먼저 떠나고, 애끓는 마음으로 자식마저 가슴에 묻고는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 전에는 부산하게 집을 나서는 저에게 갑자기 패물을 정리해야겠다며 폴리백을 사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마음이 짠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톡 쏘아붙였어요. 생각해보면 엄마는 언제나 제 생각의 울타리 안에 머물면서 저를 이끌어오셨어요. 한없이 베풀고, 희생하는 천생 엄마 덕분에 지금껏 흔들리지 않고 살았고요. 그런데 때로 잊어요. 엄마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당신도 누군가의 아내였으며 여전히 여자라는 것, 그리고 한없이 약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말이죠. 엄마 없는 삶은 생각해본 적도 없으면서 엄마 앞에서는 늘 투정 부리고, 짜증도 내는 저는 여전히 부족한 철부지 딸인 것 같네요….
정애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는 어느 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해진다는 그녀는 당신의 어머니 박소례 여사가 어디 가지 말고, 너무 빨리 가지 말고, 오래오래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 그리고 엄마의 세월이 담긴 물건을 함께 정리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도 들어드려야겠다고 다짐한다. 정말로, 참 예쁘다 이 여자.
또 하나의 여행, 결혼
알려졌다시피, 그녀는 지난 2011년 4월 8일 ‘민들레영토’의 지승룡 대표와 결혼식을 올렸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는 2005년 20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방송과 신앙생활에 전념해오다 교회에서 지승룡 대표와 인연을 맺었다. 이혼의 아픔을 겪은 바 있는 두 사람은 틈틈이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애리는 “젊은 연인처럼 가볍게 만난 사이는 아니었다”며 “믿음과 소명, 그 한결같은 마음으로 만난 벗이자 선배 같은 사람”이라고 남편을 소개했다.
결혼을 결정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겠죠? 두 사람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있는 만큼 조심스러웠죠. 서로의 결정에 신중해야 하고, 책임지고 끌어안아야 할 일이 많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믿음 아래 한뜻으로 만나 기쁘게 나누는 봉사의 삶, 그 길을 꽤 오랫동안 걸어왔어요. 그래서 인생을 크게 보고 멀리 보는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기도로 꾸린 가정이니 결국은 하나님께서 중매를 해주신 셈이죠.
딸의 반대는 없었나요? 결혼한다고 했을 때, 딸이 저에게 딱 한마디만 묻더라고요. 지금 행복하냐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했더니 그럼 됐다고 하면서, 엄마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고, 엄마 인생 존중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참 고맙고 고운 딸이에요.
결혼생활은 어떠세요?일단 어머님이나 시댁 식구들이 워낙 저를 좋아했던 분들이어서 참 잘해주세요. 칭찬도 아끼지 않으시고요. 남편도 늘 저를 칭찬해줘요. 친구들한테도 잘하고 내조도 잘한다면서, 저같이 훌륭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늘 치켜세워주죠. 신앙생활, 봉사활동하면서 서로 신뢰가 쌓였기에 가능한 것 같아요. 우리 부부는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존중해요.
남편 자랑도 해주세요. 백 프로 일반적인 분은 아니에요.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창의적인 생각이 남달라요. 또 그 나이에 비해 순수한 면도 있고요. 몰입도도 만만치 않아요. 무언가에 빠지면 다른 것 하나도 안 보고 그것에만 올인해요. 결국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남편이 CEO이기도 하지만 목사님이기 때문에, 때로는 동역자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제가 본업은 배우지만, 사람들을 돕고 때로는 영혼을 치유하고 터치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신혼은 좀 즐기셨나요? 주변에서는 다리 한 번 펴볼 틈 없이 분주한 아내 때문에 남편이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이런 걱정을 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남편도 저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저보다 더 바삐 사는 통에 서로의 빈자리를 봐줄 시간조차 없거든요. 특히 남편이 페이스북을 통해 각계각층의 믿음 동지들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요즘은 전국 팔도를 누비며 아주 기쁜 마음으로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답니다.
섭섭하지 않으세요? 나이 오십 넘어서 선택한 결혼은 그전과는 다른 개념인 것 같아요. 제게 결혼이란 또 다른 여행이에요. 당연히 소소한 가정의 일상을 꿈꾸지만 내 집, 내 가족을 위해서만 시작한 결혼이 아니었으니까요. 배불리 살겠다거나 편히 살아보겠다고 시작한 결혼도 아니었으니 또 그렇죠. 믿음의 사명으로 만난 우리 두 사람은 남은 인생을 위한 여행의 동반자예요. 살면서 조금 지칠 때, 게을러질 때, 삶의 유혹에 흔들릴 때 손잡아 일으켜줄 수 있는 벗이 있으니 그 여행은 한결 더 든든하겠죠. 그 마음 변치 말고 오래오래 함께 갔으면 해요.
남편과 딸의 관계는 어떤가요? 딸아이가 장성한 뒤에 만나서 그런지, 남편이 굉장히 조심스러워했어요. 처음엔 서먹한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잘 지내요.
결혼하고 달라진 게 있다면요?
그전에는 나만 보면 됐던 것에서 영역이 넓어졌죠. 일도 더 많아졌고요. 아무래도 남편이 목사니까 아내로서 내조해야 할 부분이 많아요. 교인들의 멘토 역할도 해줘야 하고요. 즐기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두 분은 왠지 부딪힐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이 사는데 부딪히는 일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어요. 그동안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패턴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른데, 안 부딪힌다면 그건 거짓말이죠. 다만 신뢰가 두텁고 대화가 잘 통하니까,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거죠.
지금, 행복하세요? 행복은 우리 안에 늘 있어요. 그걸 느끼면 행복이고 못 느끼면 불행이죠. 행복을 느낄 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지금 행복함으로 충만한 그녀는 몇 년째 꾸고 있는 간절한 꿈이 있다. 환갑잔치를 아주 어마어마한 규모로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축하받고 싶어서가 아니다. 부족한 힘이지만 다 퍼내어 후원하고 있는 그녀의 또 다른 자식들, 기도로 키우고 있는 전 세계 수백 명의 아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내 품에 한껏 끌어안고는 다 함께 만나고 싶은 것이다.
“낳아준 땅이 다르고 부모가 다르지만 또 다른 엄마인 저를 만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된 아이들이에요. 그러니 모두가 다 저에게는 꽃 같은 자식들이죠. 그 아이들 모두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제가 아이들에게 받고 싶은 환갑 선물이에요. 언젠가 오게 될 그날을 가슴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네요. 그때까지 온전히, 더 힘을 내어 뛰면서 살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져야 할 것 같아요.”
정애리가 다시 손을 내민다. 만날 때처럼 헤어질 때도 악수를 청한다. 그녀의 온정이 손에서 전해온다. 정애리란 이름의 축복 에너지는 그렇게 뜨거웠다.
제게 결혼이란 또 다른 여행이에요. 당연히 소소한 가정의 일상을 꿈꾸지만 내 집, 내 가족을 위해서만 시작한 결혼이 아니었거든요. 우리 두 사람은 남은 인생을 위한 여행의 동반자예요. 그 마음 변치 말고 오래오래 함께 갔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