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사춘기를 지나면서 서인이는 변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몸을 나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몸의 변화뿐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까지 꽁꽁 싸매어 숨기기 시작한 것이다
1995년 5월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몇 날 며칠을 고민 끝에 나는 마침내 중대한 결정을 했다. ‘그래, 가는 거야. 한번 부딪쳐보는 거야.’
돌을 앞둔 서인이와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이었다. 육아 프로인 엄마들에게는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는 것이 별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같이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허구한날 좌충우돌하는 엄마에게는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는 건,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당시 공황장애 초기 증상을 앓고 있었던 내가 겨우 걷기 시작하는 딸을 데리고 평소에도 가지 않는 대중탕에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일이었다(지금은 완치에 가까울 정도로 나았다. 솔직히 ‘혼자 애 키우면서 사는 여자에게 공황장애는 굶어 죽기에 딱 알맞은 병이다’라는 인식이 들자, 나도 모르게 호전되었던 것 같다. 아니, 살다 보니 저절로 그 증상이 없어졌다).
안 해도 그뿐인 것을 왜 굳이 그런 모험을 해야 하나. 그깟 목욕탕 가는 것을 모험처럼 여기는 것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꼭 가야 했던 이유는 친구가 선물로 준 가족사진 촬영권 때문이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뷔페를 빌리고 사돈의 팔촌까지 초대해 상다리가 휘어지게 돌잔치도 못해주던 시절, 친구의 선물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으나 ‘목욕 깨끗하게 하고 예쁘게 찍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딸의 첫 번째 생일에 첫 번째 가족사진을 촬영하는데 동네 슈퍼에 가는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앉고 싶지 않았다. 마음도 행동도 특별해야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돌쟁이 딸과 목욕탕에 함께 가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직도 그날이 어제 일처럼 떠오를 때면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다. 배 속에서 열 달, 태어나서 일 년 동안 아이를 배 안에 담고 가슴에 품고 등에 업어 키웠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맨몸의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는 또 다른 느낌과 감동이었다. 36.5℃의 맨살이 주는 따뜻함, 살아 있는 온기가 주는 그 충만함에 나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비로소 엄마와 딸로서 맺어진 우리 관계의 특별함이 우연이 아닌, 인류의 창조만큼이나 특별한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너무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를 위해 뭔가 해줬다는 뿌듯함에 나 역시도 행복감에 젖어드는 시간들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소풍 가는 기분으로 아이와 목욕탕을 찾았다.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발을 담그기 시작하니, ‘내가 과연 목욕탕을 싫어했었나?’ 싶을 정도로 중독되어갔다.
목욕탕은 이제 겨우 돌이 지난 어린 딸과 내가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었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똑같아보였다. 그가 어떤 남편이랑 사는지, 얼마나 돈이 많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지. 목욕탕에서는 그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때 밀러 온 알몸의 사람들뿐이었다. 목욕탕의 옷장 숫자들을 보고 서인이는 숫자를 익혔고, 목욕탕에서 먹은 우유갑을 가지고 놀면서 한글의 기초를 배웠다. 그리고 나는 목욕탕에서 내 아이의 몸이 자라는 것을 지켜봤다. 목욕탕은 우리 모녀의 놀이 공간으로서, 또한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목욕탕에서 놀면서 우리 생애의 한때를 보냈다.
그런데 그런 목욕탕 놀이는 서인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더운물이 나오고 욕조가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시들해져버렸다. 그전에야 욕실은 고사하고 겨우 세수만 할 수 있는 집에 살아서 목욕탕에 가면 때를 미는 보람이 있었는데, 굳이 욕실이 있는데 꼬박 꼬박 목욕탕에 가기도 그렇고 해서 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아이의 몸이 자라면서 아이를 씻겨주는 것이 힘이 들기 시작한 내가 꾀가 난 것이다. 서인이 역시 언젠가부터 엄마와 목욕탕에 가는 것을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래도 가끔씩 목욕탕에 갈 때면 예전의 다정한 모녀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때를 미는 엄마와 거부하는 딸의 실랑이 때문에 이제 목욕탕은 우리 모녀 갈등의 장소가 되었다. 중학생이 되자 서인이의 반발은 커졌다. 이제는 혼자서 충분히 씻을 수 있으니 자신의 때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는 서인이의 말에 나는 ‘어느새 이렇게 컸구나’라는 대견함보다 ‘이게 좀 컸다고 엄마와 내외를 하겠다고?’라는 서운함이 더했다. 그렇다고 싸울 수는 없는 일. 결국 우리의 목욕탕 놀이는 아쉽게 종결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몰랐다. 서인이와 목욕탕 가는 일이 그렇게 마지막이 될 줄은.
폭풍 사춘기를 지나면서 서인이는 변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몸을 나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몸의 변화뿐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까지 꽁꽁 싸매어 숨기기 시작한 것이다. 사춘기 딸의 몸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아쉽게도 나는 단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속옷을 갈아입거나 샤워를 할 때면 철통 수비를 하는 것이, 무슨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엄마와 단둘이 사는 딸의 행동에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서운함이 더 컸다.
“어떻게 엄마한테 이래? 너의 살들은 다 내 것이고, 네 피도 다 내 것이야. 너의 뛰고 있는 그 심장이 봉곳하게 솟아오른 네 가슴의 씨앗들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데, 엄마한테 숨겨? 난 네 엄마야. 넌 아들도 아니고 딸이잖아.”
나는 제법 멋지게 포장해 열변을 토했지만 서인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엄마와 같이 목욕탕에 가는 사춘기 딸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나온다고!”
결국 사춘기 딸과 목욕탕에 가고 싶은 나의 소박한 꿈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더 이상 엄마와 목욕탕에 함께 가지 않는 딸이 주는 상실감은 의외로 컸다. 가끔씩 혼자 목욕탕에 가서 모녀가 함께 오는 장면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누려야 할 몫의 행복을 저들에게 뺏긴 것 같은 가당찮은 억울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한 날은 서인이에게 부탁을 했다.
“서인아, 엄마와 목욕 한 번 가면 만원 줄게.”
“십만원 준대도 싫어.”
“왜? 왜? 왜? 넌 엄마가 부끄러워? 엄마가 좀 뚱뚱하다고? 다른 애들은 엄마와 잘만 다니더라. 그런 딸은 특별한 거야?”
“어. 진짜 특별한 거야. 엄마, 다음에 목욕 갈 때 다시 한 번 봐봐. 엄마가 보고 싶은 것만 봐서 그렇지. 엄마처럼 혼자 다니는 엄마들이 훨씬 많다고.”
그런가? 싶은 나는 마침내 포털 사이트에 ‘엄마와 목욕탕 가기 싫어하는 딸을 어떻게 할까요?’라며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서인이의 말이 맞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의 몸을 보지 못한 엄마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서인이가 나와 함께 목욕탕에 가기 싫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엄마. 난 그냥 목욕탕에서 때 미는 게 귀찮아. 집에서 씻는 게 좋아. 목욕탕, 친구들이랑도 안 가.”
사춘기를 지나고 십대의 소녀 시절도 지나고 이제는 이십대 아가씨가 되었지만, 서인이는 여전히 엄마와 목욕탕 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엄마뿐 아니라 그 누구하고도 목욕탕 가는 걸 싫어한다는 것. 2013년 나의 작은 바람 하나는 스무 살이 된 딸과 목욕탕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목욕탕 문 앞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다.
봄의환 작가는…
2003년 KBS <드라마시티> 극본 공모전에 <귀휴>가 당선되면서 등단, 영화 <마지막 선물>, 뮤지컬 <황진이>, MBC 드라마넷 <별순검 시즌3>을 집필한 작가이자 싱글맘. 본지를 통해 예술적 재능과 성향이 엄마를 꼭 닮은 딸 김서인양과 투닥거리며, 이해하며, 사랑하며 사는 정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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