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회장은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지금이 변화의 마지막 기회”라며 엄중한 인식을 드러냈다.
유통, 화학에도 ‘변화’ 요구한 신동빈 회장
지난 1월 9일 오후 1시 서울 송파구 신천동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가치창조회의(VCM·옛 사장단회의)에는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 정호석 호텔롯데 대표, 마쓰카 겐이치 일본롯데 대표 등 롯데그룹 계열사 임원 80여 명이 참석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부사장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에서 모습을 보인 지 하루 만에 이날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는 4시간 동안 이어졌는데 지난 연말 불거진 롯데그룹 유동성 위기 이후 첫 회의여서 분위기가 엄중했다고 한다.
신동빈 회장은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들 앞에서 “지난해는 그룹 역사상 가장 힘든 한 해였다. 지금이 변화의 마지막 기회”라며 “강력한 쇄신과 혁신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뼈를 깎는 변화를 주문했다. 특히 회의 내내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롯데그룹을 먹여 살려왔던 유통, 화학 등 그룹의 성장을 이끈 근본 사업일지라도 가능성이 없으면 과감히 들어내고 조정에 나서라는 얘기다.
회사 또 매각할까
롯데그룹의 위기설은 한 유튜브 채널에서 비롯됐다. 롯데그룹이 유동성 위기가 있다는 우려를 쏟아냈는데, 이를 정리한 지라시가 돌면서 위기설이 확산됐다.
실제로 롯데그룹은 ‘핵심 사업’인 백화점, 대형 마트, 편의점 모두 2024년 매출 정체, 역성장을 이어갔고, 한때 롯데그룹 내 최대 매출을 차지했던 석유화학 사업군(롯데케미칼)도 중국과의 경쟁 심화 속 업황 불황과 고환율이 겹치면서 위기에 몰렸다. 롯데케미칼은 2015~2019년 매년 1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올리던 것이 무색하게 2024년 3분기까지 누적 적자가 6,600억원에 달할 정도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롯데그룹은 지난 연말 ‘알짜 자산’인 롯데렌탈(렌터카 사업)을 약 1조 6,000억원에 매각했고, 롯데그룹의 상징과도 같은 롯데월드타워를 담보로 내놓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임원 인사에서 전체 임원 규모를 2023년 말 대비 13% 줄였고, 최고경영자도 36%(31명) 교체했다. 특히 화학군에서 약 30%에 달하는 임원을 퇴임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 분위기는 회의적이다. 부동산 자산이 충분하다고 하지만 롯데그룹이 내야 할 이자와 유통·화학 사업군의 향후 전망을 고려할 때 ‘기대감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롯데그룹이 추가적으로 비주요 사업군의 계열사들을 매각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신동빈 회장은 이날 회의에서 “이른 시일 안에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유형자산 매각, 자산 재평가 등 다양한 방안을 시행하고 있지만 근본적 해결을 위해선 본원적 경쟁력 강화로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가장 많이 만난 총수지만이번 취임식에 불참하며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과 희비가 엇갈렸다.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는 것이 현재 롯데그룹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아니지만,재계에서 “미래를 대응하는 방식의 차이가 보인다”는 평이 나오는 대목이다.
트럼프 취임 앞두고 신세계그룹과 대비되는 롯데그룹
재계에서는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유통 대기업의 행보가 엇갈리기 때문. 당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두고도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과 비교가 이뤄지고 있다.
신동빈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두 차례 만남을 가진 ‘최다 접촉 총수’지만, 정작 이번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신 회장은 2017년 트럼프 대통령 방한 당시 청와대 국빈 만찬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과 함께 참석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었고, 이후 2019년 롯데케미칼이 31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석유화학공장을 설립한 것과 관련해 한국 기업 총수로는 처음으로 백악관 집무실에 초청을 받아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한 바 있다. 하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달라진 것이다.
반면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1월 20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 기업인 중 유일하게 만찬 무도회에도 초청받았다. 한편 정용진 회장이 지난해 12월 트럼프 대통령의 자택인 미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체류하는 동안 트럼프 당선인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는 소식에 신세계그룹의 주가가 급등하기도 했다.
트럼프 1기 당시 우리나라 기업인 중 가장 주목받았던 신동빈 회장은 트럼프 2기 행정부와의 관계에서 이렇다 할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는 것이 현재 롯데그룹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아니지만, 재계에서 “미래를 대응하는 방식의 차이가 보인다”는 평이 나오는 대목이다.
온라인을 베이스로 하는 한 유통 기업 관계자는 “신세계그룹은 온라인 시장 대응을 위해 SSG닷컴을 만들었지만 시장점유율의 한계를 인지하고 G마켓 인수, 알리익스프레스와의 협업 등 이커머스 시장(온라인 유통)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신세계그룹은 만회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부분이 있다면, 롯데그룹은 그동안 여러 이커머스 회사 인수전에도 적극성이 떨어진다는 평이 공공연했다”며 “거의 모든 것이 온라인 거래가 가능해지며 온라인 시장을 잡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롯데그룹이 굼뜨게 반응했던 것은 윗선의 의지 부족 아니겠냐”고 지적했다.
실제로 롯데그룹은 이베이코리아(현 G마켓) 인수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지만, 정작 입찰 때는 “시너지를 낼 영역이 많지 않은데 무리하게 인수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불참했다. 이때 신동빈 회장이 인수합병에 보수적으로 접근한 것 아니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이베이코리아 측이 원한 가격은 5조원가량인데 신동빈 회장이 상한선을 3조원으로 정해놨다는 것이다(결국 신세계그룹이 이베이코리아를 3조 4,000억원가량에 인수했다).
미래 산업군 진출에도 소극적이었다. 롯데그룹은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굵직한 대기업 오너들이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AI와 로봇, 전기차 등 미래 사업 분야 경쟁에 아직 제대로 참전하지 않았다. 산업군이 다르다고 해도 변화하는 시장을 주도하지 못하는 ‘공룡’이 돼버렸다는 지적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롯데그룹이 아무리 부동산 부자라고 해도 은행 등에 빌린 돈의 이자를 갚다 보면 언젠간 부동산도 처분해야 할 때가 온다”며 “결국 기업은 수익을 내야 이자도 갚고 사업군도 확장하는데 유통은 온라인 시장을 놓치면서 뒤처졌고, 화학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려버린 구조가 됐는데 과연 금융사들이 롯데그룹의 채권 등을 매력적으로 느끼겠냐”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