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대표 휴머니스트’ 곽경택(58세) 감독이 4년 만에 신작을 공개했다. 역시 자신과 꼭 닮아 있는 감동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소방관>이다. 자신과 닮은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작품이다. <소방관>은 2001년 홍제동 화재 참사 사건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화재 진압과 전원 구조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투입된 소방관들의 상황을 그린 이야기다.
곽경택 감독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친구>(20021)부터 사주로 유괴된 아이를 찾 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극비수사>(2015), 감옥에서 7건의 추가 살인을 자백하는 살인범과 자백을 믿고 사건을 쫓는 형사의 실화에서 출발한 영화 <암수살인>(2018), 772명 학도병의 장사상륙작 전 실화를 그린 영화 <장사리:잊혀진 영웅들>(2019)까지 실화가 주는 진정성을 작품에 담아왔다.
이번에도 2001년 홍제동 화재 참사 사건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들의 이야기다. 여기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한 작품이다. 곽 감독은 일선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얼마나 힘든 업무를 하는지, 그들의 삶이 얼마나 뜨겁고 열정적인지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2001년 3월 4일 오전 3시 47분,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다세대주택에서 방화로 인해 발생한 홍제동 화재 참사 사건은 당시 서울 서부소방서에 근무 중이던 소방관 6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3명이 큰 부상을 입은 대형 참사였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소방관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처우가 알려진 바있으며, 오늘날 화마에 휩싸였던 곳을 중심으로 약 382m 구간이 소방영웅길로 지정돼 국가적으로 이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있다. 곽경택 감독은 홍제동 사건 생존자를 작품 촬영에 앞서 만났다. “생존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고 구체적인 사건을 그리기보다는 그들의 정서를 영화에 녹여보자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팀워크가 중요한 영화이기에 주원, 곽도원, 유재명, 이유영, 김민재, 오대환, 이준혁, 장영남까지 명품 연기자들이 실전과도 같은 영화 현장을 소화해냈다. 주원은 “우리 세대라면 대부분이 곽경택 감독의 팬이었을 거다. 나 역시 그랬고 <소방관> 시나리오도 좋았지만, 곽경택 감독 연출이라는 사실에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준혁은 “곽경택 감독은 영화 <소방관>과 비슷한 결의 분이었다.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따뜻한 영화 색깔과 비슷했다”고 전했다. <소방관>은 코로나 19와 주연배우 곽도원의 음주 운전 등으로 촬영 후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개봉 직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곽경택 감독을 만났다. 곽 감독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기자를 반겨주었다.
<소방관> 4년 만의 개봉 “고개가 숙여지는 과정”
오랜만의 개봉이다.
감독은 편집이 끝날 무렵이면 객관성을 잃어버린다. 그렇다고 주변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진이 다 빠진다. 그 과정에서 ‘이제 더 이상 못 하겠다’ 싶을 때쯤 영화가 개봉하더라. 늘 그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주연배우 곽도원의 음주 운전 악재로 4년 만에 극장에서 개봉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끝에 개봉한 작품이라 의미도 남다를 것 같다.
일단 후련하다. 늪에 빠진 심정이었는데 결국 목적지에 도달했다. 내가 엄살을 부린다기보다는 요즘 영화산업 환경이 힘들다. 모가 나올 확률이 너무 적어졌다. 나는 내 영화라서 기대를 하지만 관객의 평가는 냉정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과거와는 너무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이 영화는 누가 봐도 ‘곽경택표’ 영화다. ‘도전’, ‘변화’가 미덕인 시대에 오히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장르를 꿋꿋하게, 그리고 촌스럽지 않게 해내는 것이 대단해 보이더라.
감사하다. 벗어날 수 있겠나? 나는 내 영화 스타일에 대한 변화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같은 스타일이지만 매번 할 때마다 도전이다. 해야 할 고민이 많아 온통 정신이 빼앗겨 있다 보니 스타일 변화는 엄두도 못 낸다.
주연배우인 곽도원의 음주 운전이 뼈아프다.
여전히 내 마음은 그렇다. 한 개인으로서 잘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함께 작업한 내 주연배우로서의 감정은 조금 다르다. 두 가지 감정이 내 머릿속에서 싸우니까 힘들다. 그를 캐스팅한 이유는 곽 배우가 가지고 있는 묵직함이 좋아서다. 목소리 톤이나 체격이나 연기하는 스타일 등등이 내 머릿속에 있던 ‘진섭’ 캐릭터와 닮아 있었다.
유재명, 곽도원, 주원, 오대환, 이준혁 등 소방관으로 출연하는 배우들의 조화가 좋다. 캐스팅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폼을 안 내는 배우. 표정이나 눈매에 폼이 들어가는 배우들이 있다. 소방관이라는 역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유재명이라는 배우는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주연 배우가 됐음에도 예나 지금이나 현장에서의 모습에 변화가 없다. 얼마나 인품이 훌륭하냐면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촬영장에서 누군가가 “재명이가 화가 났대” 하면 정말 화가 많이 난 거다. 그 정도로 성품이 좋다. 주원이 역시 이른바 ‘꽃돌이 연기자들’ 중 성품이 좋은 친구로 유명하다. (오)대환이랑 (김)민재는 학교 때부터 친구이기도 하고 에너지가 참 좋은 사람들이다(두 사람은 나이는 같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선후배 사이다).
2001년 홍제동 화재 참사를 담았다. 취재는 어떤 식으로 했나?
여러 소방관을 만나 들은 얘기와 신문 기사를 통해 접한 이야기 등을 모아 만들었다. 가족들의 서사도 있지만, 유족들을 만나진 않았다. 대신 제작자와 프로듀서가 가서 동의를 구했다. 개개인의 이야기라기보단 큰 틀을 가져왔다. 소방관들의 열정과 유족들이 어떤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지를 조금이나마 그리고 싶었다.
20년이 지난 사건임에도 소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솔직히 말하면 내 기획은 아니었다. 나한테 시나리오 초고를 건네면서 감독을 제안했다. 당시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2019)의 후반 작업 중이라서 거절했다. 시나리오도 갈 길이 먼 것 같았고, 밝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서다. 그런데 평소 고맙게 생각하던 분들의 이야기라 계속 마음에 남더라. 감정적으로 시달리더라도 한번 해보자 싶었다. 무엇보다 화재 현장을 제대로 찍어보고 싶었다. 다른 감독이 찍으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아 내가 하자 싶더라.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소방관이라는 직업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 궁금하다.
취재하면서 구조대, 구급대, 행정부 등의 파트가 나눠져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중에서도 구조대는 선봉에 서는 위험한 업무다. 표현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분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도 그런 대사가 있다. “용기? 그것도 다 생각해야 나오는 거야. 우린 그런 거 있으면 안 돼.” 이런 분들이니까 이 일을 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듣는 마음 한편이 찡했다.
이번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직관적이지만 ‘불이 나면 무섭구나’ 하는 경각심이다. ‘가스 불을 잠그고 나왔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굳이 119를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한 번쯤 해주셨으면 한다. 만만한 게 119가 아니다. 특히 술 마시고 119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게 안타깝다.
“힘들고 불안정해도 나는 ‘감독’이 좋다”
최근 극장 상황이 좋지 않다. 베테랑 감독으로서 그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힘들다. 그럼에도 영화를 하는 건, 현장이 좋아서다. 나는 현장에서 모니터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것 때문에 취재하러 다니고, 시나리오를 쓰고 투자자를 만난다. 감독은 오만가지를 다 해야 하는 직업이다.
영화 <억수탕>(1997)으로 입봉했으니 30여 년 감독으로 살았다. 직업관에 대해 듣고 싶다.
힘들고 불안정해도 나는 좋다. 감독으로 안 살아본 사람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직업을 좋아한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어차피 사람은 한 번 살다가 죽지 않나. 감독은 소방관도 돼보고 권투 선수, 군인, 형사도 돼볼 수 있다. 한 인생에서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깊이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무엇보다 현장이 좋다. 호흡 맞는 스태프와 신나게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 그 과정에서 생기는 동료애가 주는 기쁨이 크다. 끝까지 감독을 하고 싶다.
영화감독을 그만둔 뒤의 모습을 상상해봤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공부를 해서 글을 쓰며 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보다 휴대전화로 영화 찍는 게 더 행복할 것 같다. 아마도 계속 무언가를 찍으며 살지 않을까 싶다. 영화라는 게 그렇다. 수 개월의 모든 고된 과정이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 속이 내가 상상하던 그 세상이 된다. 그래서 영화가 참 좋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연출해왔고, 많은 성공도 거두었다.
잘된 작품은 잘돼서 고맙고, 잘 안된 작품은 안돼서 미안하다. 자식 같은 마음이다. 타고나길 잘 태어나서 경쟁력 있는 놈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놈도 있었다. 안된 놈들을 생각하면 더 아프다.
감독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나?
세계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 큰 영화제에서 상을 타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열심히 만든 우리 영화가 더 많은 관객에게 공감대를 얻었으면 한다. 영화라는 게 그렇다. 감독이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도 동의하세요?”라고 묻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더 폭넓은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얘기를 하고 싶다. 그것이 내 기준에선 세계적인 영화다.
<소방관> 이후 다음 작품 계획은 어떻게 되나?
투자받을 수 있는 작품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래저래 서너 개를 걸쳐놓은 게 있는데 뭐가 걸릴지는 모르겠다. 대부분 감동 실화 방향이다. <희생부활자>(2017, 관객 수 32만 명)를 만든 뒤 상업적으로 손해를 봤다. 투자자들에게 큰 실패를 맛보게 했다. 그때 작심했다.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고 말이다. 그게 실화 모티브와 휴머니즘이다. 누아르까지는 괜찮겠다 싶다. 딱 여기까지 영역을 좁히자고 작심했다. 헛발질해서 괜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말자 다짐했다.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무엇인가?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을까’다. 사적인 얘기를 하나 하자면, 우리 아버지가 코로나19 때 돌아가셨다. 아들이 영화감독, 딸이 영화 제작자(영화 <기생충>의 제작자인 곽신애 대표), 사위가 영화감독(<은교> <해피 엔드>를 연출한 정지우 감독)이니 온 가족이 영화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 생전에 아들과 사위가 영화 만드는 모습을 보시더니 하루는 가족들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말이다. 경택이는 ‘실화’ 하고, 지우는 ‘불륜’ 하라우” 하시더라. 아버지가 보시기엔 뻔했던 모양이다. 아들은 실화 했을 때가 제일 낫고, 사위는 불륜 소재가 제일 볼만했던 모양이다.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구나 싶었다.
그야말로 영화 패밀리다.
여동생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탄 적이 있다. 기분은 좋은데, ‘쟤가 그 정도인가?’ 싶기도 하고.(웃음) 당시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면 오스카 트로피는 케이스가 없더라. 아버지한테 먼저 가서 보여드리고 그날 저녁에 온 가족이 식당에서 모였다. “신애야, 트로피 한번 꺼내봐라” 했더니 뽁뽁이를 막 풀더니 꺼내더라.(웃음)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건가?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가 어릴 때 고향에서 대본을 써서 동네 애들을 모아놓고 보여주고 그러셨다고 하더라. 그러다가 전쟁 통에 피란을 가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 생존이 절실해 의사가 되신 거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인생에서 기회를 얻어 감독이 된 거다.
4년 만에 나온 <소방관>이라는 작품이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나?
나는 2년 이상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생산력이 좋은 감독 중 한 사람인데, 이번에는 구렁텅이로 빠졌었다. 4년간 한 작품을 잡고 있다 보니 사람이 겸손해지고, 매사에 조심스럽더라. 모든 일이 내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다시 한번 주었다. 고개 숙이는 과정이었다. 다행히 <소방관>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개봉하게 됐다. 그 모든 과정에서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영화는 수개월의 모든 고된 과정이 한 번에 카메라에 농축된다.
카메라 속에 내가 상상하던 세상이 펼쳐진다. 그래서 영화가 좋다,
(촬영) 현장이 좋다. 호흡 맞는 스태프와 신나게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 그 과정에서 생기는 동료애가 주는 기쁨이 크다.”
개봉 2주 차에 접어든 <소방관>은 현재(2024년 12월 16일)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라 있다. 입소문을 타고 개봉 첫 주보다 오히려 관객 수가 증가했다. 현재 누적 관객 수는 176만 명이다. 2주 연속 정상을 지켰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모아나 2>는 <소방관>에 밀려 2위로 하락했다. 흥행 불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제쳐버린 지금, 곽경택 감독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말대로 인생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겸손해진다.
2001 친구
2003 똥개
2005 태풍
2007 사랑
2008 눈에는눈 이에는이
2011 통증
2015 극비수사
2017 희생부활자
2018 암수살인
2019 장사리:잊혀진 영웅들
곽경택 감독의 필모그래피. 그는 “잘된 작품은 잘돼서 고맙고, 안된 작품은 안돼서 미안하다. 자식 같은 마음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