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계에 이어 연기, 예능, 광고까지 섭렵한 혜리는 ‘텐션’이 남달랐다. 그 씩씩함과 밝음이 상대에게 전해지는 에너지는 ‘인간 비타민’이라는 수식어에 부족함이 없었다.
야무지기까지 했다. 스스로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본다”는 말을 할 정도로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혜리의 인생관을 생생하게 보여준 인터뷰였다.
혜리가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영화 <빅토리>는 제목만큼이나 밝은 영화다. 1999년 경남 거제의 한 고등학교에서 치어리딩 동아리를 만든 ‘필선’(혜리 분)이 만년 꼴찌인 학교 축구팀을 응원하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국내 영화 최초로 치어리딩을 소재로 한다. 극 중 필선 역을 맡은 혜리는 영화 속에서 1990년대 명곡에 맞춰 춤춘다. 1999년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분해 힙합과 치어리딩을 선보인다.
사실 혜리는 처음엔 출연 제의를 고사했다. 사투리부터 힙합 댄스와 치어리딩까지 소화해야 했기에 부담감이 컸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 만큼 영화에 행여 민폐가 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혜리여야 한다”는 박범수 감독의 지속적인 ‘플러팅’에 마음을 열었다. 역시나 혜리는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죽자 사자 맹연습을 했다. 오죽했으면 완성된 작품을 본 걸스데이 멤버들이 “네가 그렇게 춤을 잘 췄었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혜리의 모든 것은 ‘완벽했다’.
혜리는 2010년 걸 그룹 걸스데이로 데뷔했다. ‘기대해’, ‘Something (썸띵)’, ‘Darling(달링)’ 등 여러 히트곡으로 사랑을 받았고, MBC 예능 <진짜 사나이>(2014)에서 국보급 애교를 선보여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의 ‘성덕선’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쳐 배우로서도 입지를 다졌다. 이후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필모그래피를 구축했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혜리표 에너지’로 출연하는 작품마다 건강한 매력을 발산했다. 최근엔 유튜브 채널 <혜리>를 통해 남다른 예능감과 함께 인맥왕의 면모를 발휘하고 있다.
영화 <빅토리>에 대한 평이 좋다.
언론 시사회 때 너무 떨렸다. 이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다행히 긍정적으로 봐준 것 같아 오늘 인터뷰 자리에 신나게 왔다. ‘영화 얘기 잔뜩 해야지’ 하며 들떠서 왔다.
실제로 언론 시사회가 끝난 후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긴장을 안 하는 편인데 떨렸던 것 같다. 근데 첫 질문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들으니까 울컥했던 것 같다. 내 작품을 보면서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애초엔 출연을 망설였다고 들었다.
사실 시나리오가 너무 완벽해서 고민이었다. 시나리오를 보다 보면 아쉬운 점도 있기 마련인데 <빅토리>는 그런 부분 없이 끝까지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읽자마자 필선 캐릭터가 너무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이렇게 멋있는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까’, ‘나도 멋있는 사람인가’ 하는 걱정에 출연을 망설였다.
이 작품은 누구나에게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 또 눈물 버튼.(하하) 내가 이런 거에 약하다. 누구나에게 한 번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지 않나. 나는 어렸을 때 좋은 기억과 추억이 많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나를 힘나게 하는 원동력은 가족이다. 좀 더 확장하면 내 사람들, 나를 응원해주는 모든 사람이 원동력이다. “이 영화로 인해 응원받았어”, “우리 딸 최고야”라는 말 한마디에 힘든 순간이 다 잊힌다.
“지금 아니면 못 해. 기회는 지금뿐이야, 라는 말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이 말은 내가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외우는 주문 같은 것이다”
극 중 필선과 혜리의 이미지가 비슷하다. 실제로 연기해보니 어땠나?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내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본 친동생이 “틱틱거리는 거 언니랑 똑같네” 하는 거다.(하하) ‘내가 저런다고?’ 의외였다. 비슷한 부분은 ‘열정’이 아닐까 싶다. 나도 뭐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본다. 후회하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점은 필선은 의리도 있고 용기도 있는데, 나는 의외로 소심하고 겁이 많다.
극 중 치어리더로 나온다. 춤을 기본기부터 배웠다고 들었다.
극 중에서 내가 소화해야 하는 곡이 11곡이다. 이걸 어떻게 다 하지 싶어 부랴부랴 스케줄을 짜고 연습을 시작했다. 3개월 이상 연습했다. 멋있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심적으로 부담감도 있었다.
의상이나 헤어가 자연스러웠다.
춤추는 분들이 조언하길 일단 의상은 무조건 크게 입어야 한다고 하더라. 춤은 90%가 옷이라는 거다. 그래서 평소 알고 지내는 댄서 리정 언니에게 “춤은 90%가 옷이야?”라고 물어봤더니 95%가 옷이라는 거다. 그때부터 옷의 중요성을 알고 더워 죽겠는데도 후드 티를 입고 춤을 췄다.
극 중에서 1990년대 명곡에 맞춰 춤춘다.
조금 낯설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학창 시절엔 동방신기, 원더걸스를 좋아했다. 영화 속 배경과 세대는 다르지만 이번에 1990년대 명곡들을 제대로 듣게 됐다. 사실 어릴 때 할머니 집에 가면 친척 언니들과 노래방에 많이 갔다. 어릴 때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어렴풋이 들었던 음악도 있는 반면, 아예 처음 듣는 음악도 있었다. 진짜 명곡이 많구나 싶었다.
배경이 1999년이라 추억의 물건이 많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CD플레이어가 신기했다. 나는 MP3 세대다. 극 중에서 춤을 추다 보니 카세트테이프, CD플레이어 등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소품이 많았다.
배경이 너무 예쁘다. 특히 인상 깊은 장소가 있나?
특히 거제도가 진짜 예쁘더라. 평소 빛을 싫어해 차에 커튼을 치고 깜깜하게 하고 다닌다. 집에서도 암막 커튼을 친다. 근데 거제도에서는 커튼을 다 걷고 풍경을 감상하며 다녔다. 그만큼 정말 예쁘더라. 촬영하면서 벚꽃 구경도 원 없이 했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유채꽃밭도, 해 질 녘 바다도 너무 예쁘더라. 덕분에 눈이 즐거웠던 촬영이었다.
1990년대 문화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
나는 어릴 때 친구 집에 가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참 많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고, 걸어서 3분 거리의 동생 친구 집에는 컴퓨터가 있었는데 그 동생 친구가 집에 없는데도 혼자 가서 “아줌마, 저 컴퓨터해도 돼요?” 하고선 들어가서 테트리스 게임을 하곤 했다.(웃음) 그런 게 허용되는 시대였다. 요즘엔 위험한 것도 많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쉽게 연락하고 쉽게 헤어진다. 그래서 과거의 그런 정서가 그립다. 물론 아줌마에게는 안 좋은 기억일 수 있겠지만.(웃음) 나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걸 그룹 걸스데이 멤버로 데뷔해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연예계에서 예능인, 연기자로서도 종횡무진 활약해왔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찍었고, 예능 <놀라운 토요일>에 출연했다. 생각해보면 그때가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때였던 것 같다. 자아 성찰을 고등학생일 때 했어야 하는데 활동하느라 바빠서 못 했다. <놀라운 토요일>을 20대 중반에 했는데 그제야 자아 성찰을 했다. 문득 ‘나는 뭘 하는 사람이지?’, ‘예능만 할까?’, ‘연기할 때 사랑해주는 분도 있는데…’ 등등 굉장히 많은 생각을 했던 시기다. 그리고 이제 30살이 된 지 두 달 정도 됐다. 또 챕터가 바뀌었다. 이제는 그런 고민을 담아 작품을 선택한다. 용기 있게 하나씩 실현해보고 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내가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고 또 도전하던 순간이 <응답하라 1988>, <놀라운 토요일>, ‘30살’ 때였던 것 같다.
인맥왕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작품을 함께했던 배우와 다시 작품으로 만난다는 게 참 어렵다. 굉장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활동했지만 한 번도 못 본 배우도 많다. 그래서 그 인연이 참 소중하고, 좋은 영향을 받는 관계 자체가 고맙다. 상대방에게 조금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들 나 역시 별로인 구석이 많은 사람이라 언젠가부터 상대방에 대해 ‘사정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잘 안 미워지더라. 그래서 많은 사람과 친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아, 대단한 인맥왕은 아니다. 주위에 친한 사람이 많다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것뿐이다.
배우 인생에 있어서 대표작은 <응답하라 1988>이다. 이번 작품으로 <응답하라 1988>을 뛰어넘고 싶은 욕심은 없나?
그렇진 않다. 덕선이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다. 언론 시사회에 오신 한 PD님이 이 작품을 보고 내 작품들 중에 <응답하라 1988> 빼고 제일 재밌게 봤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응답하라 1988>은 너의 마스터피스(걸작, 명작)이지 않느냐는 극찬을 해주셨다. 그때는 얼떨떨했는데 그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내 마음속 마스터피스라서 덕선이를 이기면 너무 서운할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지만 관계에 집착하지 말자는 마음이 있다.
그런 것들이 모든 관계를 건강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다. 휴식기 없이 늘 활동을 열심히 했다.
2010년 걸스데이 멤버로 캐스팅돼 데뷔했다. 그렇다고 데뷔하자마자 주목을 받은 케이스도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알아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걸스데이의 노래가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진짜 사나이>로 화제가 됐다. 신기했다. 곧바로 <응답하라 1988>로 글로벌한 관심을 받았고, <놀라운 토요일>과 유튜브도 다 좋아해주신다. 내가 열심히 하면 다들 알아준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자존감도 올라갔다.(웃음)
지금 인터뷰 자리도 그렇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결과물을 봤을 때 속상하다. 이번 작품에서도 ‘지금 아니면 못 해. 기회는 지금뿐이야’라는 말로 마인드 컨트롤을 계속했다. 이 말은 내가 어떤 걸 할 때마다 외우는 주문 같은 것이다. 그래서 미미하게라도 성장하고 있지 않나 싶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더 나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실 혜리는 지난 3월 연예 활동 외의 이슈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 남자친구인 배우 류준열과 한소희의 사생활 이슈였다. 그간 공식 석상에서 혜리는 “더 이상 답변드릴 내용이 없다”고 말을 아껴왔다. 이날 역시 이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혜리는 한참을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그때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면 인간 이혜리의 생각으로 그런 마음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무엇보다 팬들에게 미안하다. 늘 완벽할 수 없지 않나. 그래도 <빅토리>가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아 기대된다. ‘혜리가 정말 애썼네’라고 해주시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 작품의 무대 인사를 빨리 가고 싶다. 팬들을 빨리 만나고 싶다.
오늘 인터뷰에서도 느꼈지만 정말 밝고 씩씩하다.
사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좋고, 인터뷰 자리도 신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지만 관계에 집착하지 말자는 마음도 있다. 그런 것들이 모든 관계를 건강하게 해주는 것 같다.
30살 혜리는 딱 30살의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자체로 독보적인 엔터테이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