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연예계 선배를 만나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역시나 자연스럽게 아이들 학업 이야기로 이어졌다. 고등학생 학부모인 선배는 아이에게 크게 간섭하기보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편이라고 했다. 학원도 아이가 원하는 만큼만 보내고, 설령 주변 학부모들이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학년이 올라갈 때 아이가 스스로 학원을 바꿔달라고 해서 원하는 학원에 등록해줬더니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아 대견하다고 했다.
쉬운 얘기 같지만, 모든 부모는 다 안다. 주변 얘기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선배는 학원도 공부도 아이와 친밀하게 소통하며 하나씩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안이의 성적표를 받아볼 시기가 됐다.
주안이가 3학년 무렵, 생각했던 것보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내가 선물 공약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보다 더 좋은 성적이 나오면 선물을 사주고, 또 다음 학기에 더 좋은 성적이 나오면 선물을 사준다는 공약이었다. 그러면서 5학년 때는 전 과목 올 A가 나올 수 있도록 열심히 해보자고 얘기하자 주안이는 “올 A를 어떻게 받아요?” 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해주기 싫으면 선물 같은 거 안 사줘도 된다며 대화를 끝내려고 했다. 순간 ‘앗! 사춘기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곤 주안이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내 마음을 얘기했다.
“성취감을 느끼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작은 선물 같은 거야. 아빠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니?” 가만히 듣고 있던 주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는 되지만 올 A를 바라는 건 압박감이 너무 커서 좋게 들리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더 미안했다. 그렇게 그날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보자는 약속을 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 6학년이 됐고 여름방학 전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이 된 것이다.
주안이가 하굣길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방을 열며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성적표를 받았다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공부를 하면서 힘들었던 적도 있고, 특히 학원에 가는 게 피곤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으니 너무 잘한 선택이었고, 동기부여도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주안이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일단 친구들과 놀아야겠다며 자기 방에 들어가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하며 ‘방 탈출 게임’을 하러 가는 계획을 세웠다. 한껏 신난 목소리가 방문 사이로 전해졌는데, 듣는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 대견스러운 한편 미안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공부와 성적 때문에 좌절도 성취감도 맛볼 시간이 분명히 올 걸 알기에 더욱 그랬다. 학부모로서 나 역시 얼마나 흔들릴지 모르지만 아들과 대화로 잘 헤쳐나가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글쓴이 손준호
1983년생으로 연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뮤지컬 배우다. <팬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페라의 유령> 등 다수의 뮤지컬에 출연했다. 2011년 8살 연상의 뮤지컬 배우 김소현과 결혼해 2012년 아들 손주안 군을 얻었다. 뭘 해도 귀여운 아들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