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이라는 이름은 어느덧 장르가 됐다. 로맨스 장르까지 섭렵한 안재홍이지만, 특히 그의 코믹 연기는 독보적이며 고차원적이다. 함께한 스태프와 동료 배우들은 그를 가리켜 서슴없이 ‘연기 천재’라 말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스크걸>, 드라마 <멜로가 체질> <쌈, 마이웨이> <응답하라 1988>에서 개성 가득한 캐릭터로 열연을 펼친 안재홍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닭강정>을 통해 또 다른 인생 캐릭터를 선보였다. <닭강정>은 의문의 기계에 들어갔다가 닭강정으로 변한 딸 ‘민아’(김유정 분)를 되돌리기 위한 아빠 ‘최선만’(류승룡 분)과 그녀를 짝사랑하는 ‘고백중’(안재홍 분)의 신계(鷄)념 코믹 미스터리 추적극이다. 극 중 안재홍은 민아를 향해 닭강정 랩소디를 들려주는 ‘순정남’ 고백중으로 분해 웹툰을 찢고 나온 싱크로율로 화제를 모은다. 싱어송라이터가 꿈인 ‘모든기계’의 인턴사원으로, 노란 팬츠가 트레이드마크인 캐릭터다. 엉뚱하고 이상한데 자꾸 보게 되는 인물이다.
한국 영화 흥행 2위를 달성한 영화 <극한직업>을 비롯해 수작으로 평가받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이병헌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안재홍을 만났다.
“온 마음 다해 연기하는 중”
닭강정이 된 여자를 구하러 가는 내용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어땠나?
이병헌 감독이 굉장히 신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하는구나 싶어 무조건 참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시나리오를 본 뒤 웹툰을 봤는데, 이건 내가 해야겠다 생각했다. 원작 작가가 나를 보고 그린 건가 싶을 정도였다.(웃음) 작화도 특별했고, 세계관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 독특한 작품을 선택하는 데 일말의 고민은 없었나?
내가 이병헌 감독님을 처음 본 게 아주 오래전이다. 감독님이 영화 <스물>(2015)을 만들기도 전, 내가 영화 <족구왕>(2014)을 막 찍었을 때 사석에서 만났다.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감독님은 그때도 나른한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한결같이 나른하다. 그게 멋진 포인트다. 그 시간 동안 감독님을 보면서 감독님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 때도 그랬지만, 그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때 늘 신이 난다. 감독님은 모든 것이 정교한 사람이다. 이 역할을 할지 안 할지가 아닌, 잘해내고 싶다는 고민이 더 컸다.
이 정도면 이병헌 감독의 페르소나 아닌가?
그건 감독님이 정하는 거다. 감독님과 작업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앞으로도 감독님이 어떤 이야기를 해나갈지 궁금하다.
독창적이어서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다양성을 얘기하는 것에 대한 건강한 반응이지 않나.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수라는 식재료는 호불호가 있지만 나는 아주 좋아한다. 그건 다른 무언가로 대체할 수 없는 맛이다. 그만큼 매력 있고, 끌림이 있다. 시작할 때부터 새롭고 독창적인 것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었다. 이전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기분 좋고 신났다.
캐릭터가 독특하다. 엉뚱하고 이상한데 자꾸 보게 된다.
이 작품이 가진 화법이 분명히 있었다. 일상적인 연기 톤과는 다르게 톤이 업되어 있다. 하지만 분명히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출연한 류승룡 선배님도 같은 생각을 하셨다는 게 연기하면서 느껴졌다.
류승룡 배우와의 호흡이 관전 포인트다.
처음 대본 리딩을 했을 때부터 척척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리허설 과정을 많이 거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작품이 지닌 코미디로서의 신선함을 살리고 싶어서다. 그 에너지를 응축시켰다가 카메라 앞에서 발현하는 그 순간이 짜릿했다.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류승룡 선배님이 조금씩 변주할 때 나 역시 춤을 추듯 호흡을 맞추게 되더라. 그 예상치 못한 호흡이 주는 재미가 배우로서 쏠쏠했다.
류승룡 배우가 인터뷰에서 “위인전에 나올 법한 친구”, “연기 천재”라며 칭찬을 많이 했다. 존경한다는 말도 했다.
후배를 격려하고 응원해주기 위해 칭찬해주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더 잘해내고 싶고, 앞으로 잘 걸어가고 싶다. 류승룡 선배님은 무한한 신뢰를 주는 연기자다. 이번에 선배님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나도 선배님처럼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리고 선배님이 매 순간 진실되고 살아 있음을 표현하려고 할 때 그 순간을 옆에서 나누며 선배님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졌다.
연기 잘하는 사람끼리 함께 연기하는 케미의 맛은 어땠나?
마치 선배님과 복식조로 탁구 대회에 출전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든든했고 설렘도 있었다. 함께 연기하면서 느낀 점은 그 빠른 핑퐁 속에서 계속 리듬을 만들어주신다는 생각이 들더라. 에너지가 확실히 달랐다.
어디에도 없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이병헌 감독은 촬영하면서 ‘현타’가 왔다고 한다. 배우 입장은 어땠나?
종종 왔다.(웃음) 첫 촬영 때부터 왔다. 한강 둔치에서 닭강정 헬멧을 쓴 ‘민아’(김유정 분)에게 물엿을 발라주는 장면이었는데, 모든 게 처음인 상황이었다. 옆에선 공무원들이 서울시 홍보 영상을 찍고 있는데 괜히 민망하더라. 그뿐 아니라 ‘홍차’(정호연 분)의 등장 신도 예사롭지 않았다. 첫 대사가 나(‘고백중’ 역)에게 하는 “넌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니까!”인데, 그 순간에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무언가를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구나 싶었다.(웃음) 정말 신나고 재미있는 순간들이었다.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도 궁금하다.
다양한 감성과 여러 가지 형식의 코미디가 정교하게 짜여 있었다. 어찌 보면 일본 만화 같지만 미국식의 차가운 코미디도 있고, 또 따뜻한 코미디도 있다. 대사로 구현하는 코미디와 몸으로 구현하는 코미디도 배합돼 있다. 그런데 그것들을 대놓고 드러내는 게 아니라 닭강정 소스처럼 자연스럽게 배합해놓은 느낌이랄까. 많은 분이 아직도 <멜로가 체질>의 대사를 많이 언급하는데, 나는 <닭강정>의 대사도 굉장히 좋았다.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나?
1회에서 민아가 내게 하는 말이다. “백중 씨는 자기 얼굴이 아니라 상대방 눈을 바꾼달까? 뭔가 그런 걸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극 중에서 백중이 그 말을 듣고 의아해하는데, 나 역시 당시 촬영장에서는 백중과 같은 마음이었다. 무슨 말이지 싶었다. 그런데 곱씹어보니 참 감사한 말이었다.
노란 바지를 입고 춤을 추며 등장하는 첫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원작도 그렇지만 극 중 단 한 벌의 의상만 입고 나온다. 그게 노란 바지다. 어떤 작품에 임할 때 원작 웹툰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없지만, 이 작품에서는 웹툰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노란 바지를 입고 춤추며 등장하는 장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등장하면서부터 ‘범상치 않은 등장인물이구나’를 단번에 각인시키는 게 중요했다. 어떻게 하면 닭강정스럽게 춤을 출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유명 안무가인 아이키를 찾아가 지도를 받았다. 대단한 춤은 아니지만 색다른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아마도 촬영하면서 웃음을 참는 지점이 많았을 것 같다.
‘웃참’이라는 게 사실 ‘기운’이다. 웃음이 목까지 차오르면 절대 참기 힘들다. 숨소리에도 터져버린다. 그때는 서로가 마주 보기도 쉽지 않은데, 그래서 나는 류승룡 선배님의 눈을 보지 않고 남몰래 미간이나 인중을 봤다. NG를 내면 미안함을 떠나 이 웃긴 상황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게 아쉬워 안간힘을 써서 참아냈다.
온 마음을 다해 임한 작품이 사랑받아 감사하고,
또 그것에 대해 이렇게 인터뷰할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하다.
내가 작품을 대하는 마음과도 같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가 생긴 것 같다.
배우로서 기분 좋은 책임감이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 깊이 있게 연기하려고 노력한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반응을 얻었다.
<마스크걸>의 ‘주오남’을 맡았던 다양한 국가의 성우들이 고백중까지 연기했다. 나의 톤을 너무 잘 살려줘 너무 감사하고 신기했다. 특히 미국 성우는 <닭강정>의 고백중 의상과 똑같은 코스튬을 입고 인증샷까지 올려주셨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나고 싶을 정도다. 참 재미있었다.
“안재홍 장르가 생겼다”란 이야기도 있다.
영광스러운 극찬이다. 덕분에 앞으로도 더 다양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선명해진다.
지난 1년간 활발한 활동을 했다. 장르도 다양했고, 성과도 좋았다.
온 마음을 다해 임한 작품이 사랑받아 감사하고, 또 그것에 대해 이렇게 인터뷰할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하다. 문득, 이렇게 작품이 공개되고 기자들과 작품 얘기를 하는 시간이 나중엔 점점 드물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 예전에는 인터뷰 자리가 낯설어 쭈뼛거렸는데, 지금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다. 내가 작품을 대하는 마음과도 같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가 생긴 것 같다. 배우로서 기분 좋은 책임감이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 깊이 있게 연기하려고 노력한다.
어느덧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스스로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나?
아직 그런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나 자신을 돌이켜보기에는 못 가본 여행지가 너무 많다. 조금 더 뒤에 생각해보겠다.
건국대 영화학과 출신이다. 아직도 담당 교수는 학생들에게 “안재홍처럼만 해라”라는 말을 한다고.
열심히 다녔다. 학기마다 단편영화를 촬영했고, 그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다. 연출도 해보고, 방학 때는 소극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연도 했다.
말이 나온 김에 연출에 대한 계획은 없나?(그의 연출작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2020)는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안재홍은 그 이전에도 단편 <좋은 연기> <열아홉, 연주> <검은 돼지> 등을 만든 어엿한 연출자다)
단편영화를 만들어본 경험이 내게는 소중한 환기가 된달까. 연출자로서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메모처럼 조금씩 긁적이고 있다.
시간이 빌 때는 어떻게 보내나?
아주 춥고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많이 걷는다. 자전거도 종종 탄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걷는 건 아니지만,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