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자산이 됐다
배우 유태오가 최근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한국 배우 최초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다. 수상은 불발됐지만 특유의 감성 연기로 찬사를 이끌었다. 앞서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 부문 후보에 오른 <레토>(2019)에서는 고려인 로커 ‘빅토르 최’를 연기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신인 감독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부문에 올랐으며, 3월 초 현재 전 세계 75관왕, 210개 부문 노미네이트라는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거장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지난 20년간 본 최고의 장편 데뷔작, 정교하고 섬세하며 강렬하다”라는 찬사를 했다. 함께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오펜하이머>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최근에 본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주저 없이 <패스트 라이브즈>를 꼽으며 “미묘하게 아름다운 영화”라는 호평을 보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첫사랑 ‘나영’과 ‘해성’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 끊어질 듯 이어져온 그들의 인연을 돌아보는 이틀간의 운명적인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데뷔작이다. 유태오는 24년 전 이민을 간 첫사랑 나영(그레타 리 분)을 만나기 위해 뉴욕을 찾아가는 해성 역을 맡아 인생 캐릭터를 선보인다. 셀린 송 감독은 유태오에 대해 “4시간에 달하는 오디션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극찬했다.
<패스트 라이브즈>가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고 있다.
결과를 우선시하며 작품에 임하지는 않는다. 작품을 할 때마다 좋은 작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또 어떻게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한다.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해외 관객을 대상으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인연은 사람 관계나 물건 등에 자주 쓰는 말이지만 내게는 유독 특별했다. 이 작품에선 동양적인 인연, 그러니까 팔자나 운명을 믿고 연기해야 해성의 슬픔을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믿고 연기하다 보니 작품이 끝난 뒤엔 실제로 철학적인 생각을 하게 되더라. 덕분에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태도도 조금 달라졌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더 이상 내가 캐릭터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떤 기술이나 장치 등 상업적인 공식에 얽매이지 않게 됐다. 이 작품을 촬영한 뒤에 드라마를 두 편 찍었는데, 한 작품은 텐션이 업되는 로맨틱 코미디였다. 내 감정을 그대로 담으면 캐릭터가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연기했다. 앞으로 연기할 캐릭터도 전생의 영혼쯤으로 생각할 정도로 철학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과거의 힘들었던 일들을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자존감이 낮아 오히려 배우가 되고 싶었다.
결핍이 있어 인정을 받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극 중 한국어는 익숙한데, 영어는 미숙한 역할이다. 어렵진 않았나?
연기 코치님과 매일 연습했다. 여러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을 관찰했다. 스스로에게 ‘왜 저러지?’, ‘왜 저걸 저렇게 받아들이지?’ 하는 질문을 많이 했다. 꼭 답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질문만으로도 뭔가 소화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만족하나?
글로벌한 작품이라 국내외 관객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 장르적으로 로맨스라 더더욱 그랬다. 우습지 않아야 하고 진지하게 들리면서 감정선이 깨지지 않아야 했다. 과하게 연기하는 것도, 또 너무 차분해서도 안 됐다. 그러면서도 해외 관객이 봤을 때는 여운이 남게 해야 했다. 사실 그런 언어적인 부분에 대해 처음 고민했던 게, 영화 <중경삼림> 속의 양조위를 보면서다. 광둥어가 잘못하면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는데 당시 양조위의 대사는 마치 시처럼 들렸다. 왜 다른지 고민을 많이 했다.
해외에서 오래 살며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했다. 배우로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궁금하다.
긍정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트라우마와 결핍 역시 나에게는 자산이 됐다. 신기하다. 사실 나는 과거의 힘들었던 일들을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고생한 게 무슨 자랑이겠나. 그런데 작품에 대한 인터뷰를 하다 보면 사생활도 언급하게 되더라. 나는 스스로 당당하고 자신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존감이 낮아 배우가 되고 싶었다. 결핍이 있어 인정을 받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아내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유태오라는 사람에게 아내는 어떤 존재인가?
아내는 모든 것을 함께 고민해주는 사람이다. 나보다 한발 더 앞서 있고, 세상에 들어가 있다. 반대로 나는 붕 떠 있는 사람인데, 아내가 그걸 잘 정리해준다. 자기 전 몇 시간 동안 아내와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재미있고 소중하다.
앞으로 활동 계획도 궁금하다.
앞으로 5년 동안 국내외에서 활동을 이어갈 생각이다. 비중은 반반 두고 싶다. 그렇게 인지도를 높이고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작가를 찾아 작품을 만들고 싶다. 마동석 선배나 톰 크루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