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이는 건강한 편이다. 편식도 하지 않고 체력도 좋다. 그런데 하루는 주안이가 학교에 다녀와서는 표정이 좀 안 좋더니 약상자에서 어린이 종합 감기약을 꺼내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주안이가 스스로 약상자에서 약을 꺼내 먹은 게 기특하면서도 걱정이 됐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등교 준비를 시키려고 주안이를 깨웠는데 열이 좀 나는가 싶더니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주안이와 함께 병원에 갔다. 순서가 돼 진료를 받는데 의사 선생님이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며 바로 검사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독감이었다. 세상에, 어젯밤에 혼자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독감약 부작용으로 구토가 날 수 있다고 했는데 주안이가 딱 그랬다. 집에 와서 죽을 조금 먹고 약을 먹었는데, 가만히 누워 있다가 느닷없이 먹었던 약과 죽을 바닥에 다 쏟아냈다. 그 와중에 주안이는 “미안해”라고 말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이 이렇게나 컸구나.’ 걱정하지 말라며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내가 그동안 주안이에게 엄했던 걸까? 주안이가 배려심이 많은 걸까?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잠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중간중간 체온을 재어봤는데 다행히 높이 오르지는 않았다. 주안이는 성격상 엄살이 심하지도 않다. 이럴 때는 엄살도 부리고, 하고 싶었던 게임도 실컷 하면서 더 애처럼 굴어도 될 텐데 그러지 않는 아들을 보니 대견하기보다는 미안함이 더 컸다. 주안이는 빠르게 회복돼 이틀 만에 일상을 되찾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 몸이 심상치 않았다. 독감은 어른에게도 옮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통증이 감기 통증이라기보다는 복부가 아팠다. 미열이 나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지만 하루 이틀 참다가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갔다. 진단 결과는 충수염이었다.
밤늦게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서 입원실로 왔는데 주안이가 자고 있었다. 독감에 걸렸다가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안이는 병원에 와서 하루 종일 아빠를 기다리다가 방금 전에 잠이 들었다고 했다. 마취에서 깬 뒤 수술받은 부위가 욱신거려 정신없었지만 아들의 그 마음이 어찌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어찌 보면 주안이를 향한 내 사랑보다 아빠를 향한 주안이의 사랑이 더 크고 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 상대방을 얼마나 감동시키고 감사하게 하는지 알게 해준 시간이었다. 마음과는 다르게 가장이라는 자리가 조금 무뚝뚝하게 변하게 하기도 한다. 어느덧 그게 익숙해지고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는 마음도 생긴다. 하지만 앞으론 좀 더 마음을 표현하는 아빠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쓴이 손준호
1983년생으로 연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뮤지컬 배우다. <팬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페라의 유령> 등 다수의 뮤지컬에 출연했다. 2011년 8살 연상의 뮤지컬 배우 김소현과 결혼해 2012년 아들 손주안 군을 얻었다. 뭘 해도 귀여운 아들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