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방송인, 인플루언서…. 억척스러운 생활인이자 열정 부자, 재미도 있고 기도 센 멋진 언니. 윤영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많고도 많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여기저기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영미투어’, ‘영미상회’ 등등 신나고 재미난 일을 마음껏 벌이며 살아가는 그녀가 책을 냈다. 인생 다 아는 척, 잰 척하지 않고 지나치도록 솔직하게 써 내려간 윤영미의 <놀 수 있을 때 놀고 볼 수 있을 때 보고 갈 수 있을 때 가고>를 읽다 보면, 마치 친한 언니랑 술 한잔하며 두런두런 인생 얘기를 나누는 기분이다. 여전히 좌충우돌, 나와 다를 바 없는 솔직하고 평범한 그녀의 일상에 위로를 받고, 삶과 나이 듦에 대한 그녀만의 멋진 철학에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면 인생을 좀 더 신나게, 재미나게 살아보고 싶은 의지가 불끈 솟는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지금이 중하지!
이 나이가 되도록 나의
중심을 못 잡고 제자리에서 맴맴 돌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지만,
생각해 보면 세상 물욕 없고 호기심 없는 늙은 여인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상 욕망에
시달리며 향상심으로 스스로를 채근하는 철없는 여인,
나를 사랑해 줘야 할 사람은 오직 나. 나뿐이다.
-<놀 수 있을 때 놀고 볼 수 있을 때 보고 갈 수 있을 때 가고> 중
나, 윤영미를 정의한다면?
철없는 사람, 무모한 사람 그리고 호기심과 열정이 많은 사람.
방송과 SNS 등에서 보이는 모습이 늘 열정 가득하고 대범하다.
난 대범한 사람이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스케일도 작다. 그저 보통 사람들과 욕망의 결이 다를 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욕망이란 돈이나 명예인데, 나의 욕망은 감각적인 삶의 즐거움에 대한 거랄까.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활인이긴 하지만, 나에게 돈은 필요하기 때문에 벌어야 하는 것일 뿐 목적은 아니다.
살면서 보니,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더라. 돈과 부로 자신을 규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보다 감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 예를 들어 나는 고급 호텔이 재미없다. 요즘 유행한다는 비싼 가구들로 채워진 부잣집보다는 다 제각각에 비싸지 않은 것들이라도 누군가의 취향이 가득 묻어나는 공간이 감동적이다. 그런 것들이 가슴을 뛰게 한다. 제주의 ‘무모한 집’이 그렇다.
무모한 집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멋진 공간이더라.
그저 제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7년 연세로 집을 빌렸고, 연세보다 더 많은 돈을 집수리에 썼다. 말 그대로 진짜 ‘무모’하게 마련한 집인 거지. 집을 꾸미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 황학동과 이태원의 빈티지 숍을 뒤지고 당근마켓에서 취향에 맞는 것들을 찾아내며,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하나씩 해외 직구 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오롯이 내 취향으로 채운 공간이 주는 여유와 해방감, 행복은 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다. 경제관념과는 거리가 먼 이런 무모함 때문일까. 내 주변엔 나처럼 돈 없는 예술가만 많다.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적었다.
그건, 직업 카테고리에 적당한 게 없길래.(웃음) 예술가가 나와 가장 근접한 것 같더라.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적인 사람인 것 같다. 아트가 없는 사람들은 재미없다. 나를 흥분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아티스틱한 사람들과 만나면 주로 무엇을 하나?
돈 버는 얘기, 자식 교육 얘기 같은 건 안 한다. 그냥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평범한 대한민국 아줌마는 아닌 것 같다. 60대지만 30살쯤에 멈춰 있는 것 같다. 남의 눈치 안 보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안 쓰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 친구들과 신나고 재미있을 일들을 작당 모의하고 바로 행동한다. 날이 좋아 동해 바다가 예쁠 것 같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여행을 떠나는 거고, 기분이 좋으면 사람 많은 거리에서도 춤을 춘다. 내가 써보고 감동적이었던 제품은 남들에게도 널리 알리고 싶어 이윤이 별로 남지 않더라도 ‘영미상회’에서 판다. 이리 재고 저리 재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열심히’ 행동한다. 천성대로 살고 있는 거다.
그럴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가 부럽다.
내가 부럽다는 사람이 많더라. 나를 따라 하고 싶다고 하고. 그럼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얘기를 나눠보면 다들 ‘안 되는 이유’를 계속 찾더라. 아이가 고 3이어서, 남편이 허락 안 해서, 이번 달은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핑계를 만들고 스스로를 구속한다. 무모한 집을 보고 부럽다면서도 먼저 제주 땅값이 어쩌고저쩌고 고민하고 1년에 제주를 몇 번이나 가는지를 계산한다. 안 되는 이유는 계속 존재할 거고 핑계가 없을 날은 영영 없다. 너무 고민하지 말고 일단 행동해야 뭐라도 변화할 수 있다.
물론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으로 에너지를 얻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데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뭐든 할 수 있는 시대이긴 하지만 바깥세상을 모르면 나의 세계는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행이 뭔지도 알아야 하고, 지금 어떤 공간이 생기고 있고 사람들이 무엇에 몰리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혼자 보내는 시간도 더 의미가 생긴다.
놀 수 있을 때 안 놀고, 볼 수 있을 때 안 보고, 갈 수 있을 때 안 가는 삶도 물론 있을 수 있지만, 움직이고 행동해야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생기는 거니까.
천성대로 살아야 가장 행복한 건데, 불행히도 나이가 한참 들어도 자신의 천성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내 천성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지. 이것저것 다양하게. 뭔가를 했을 때 찌르르 오는 게 분명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음식 만들기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전거 타기나 뜨개질일 수도 있다. 해봐야 아는 거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들은 일, 가족, 돈 등을 걱정하느라 막상 자신이 어떨 때 행복한지 잘 모른다. 나 자신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뭐든 해보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
이게 내가 <여, 행하라>라는 책을 썼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책은 여행이나 공간에 대한 에세이기도 하고 또 뭐든 ‘행’해야 행복해진다는 내 생각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벌써 네 번째 책을 냈다. <놀 수 있을 때 놀고 볼 수 있을 때 보고 갈 수 있을 때 가고>를 읽으면 언니와 술 한잔하며 수다 떠는 기분이 든다. “인생 별거 없어. 나이 드는 걸 무서워하지 마. 지금을 누리면서 살아”라고 위로해준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나?
SNS에 올린 일상의 단상들을 책으로 엮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공감도 되고, 위로도 받는다고. 사실 싸이월드 때부터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냥 평소 SNS에 올리던 대로 솔직하게 썼다. 20여 년간 써오던 매일의 소회를 책으로 엮다 보니 오히려 내가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
새로 알게 된 윤영미는 어떤 사람인가?
알고 있긴 했지만, 나는 꽤 센티멘털한 사람이었다. 매일 하루를 간신히 버텨내고 나면 올림픽대로를 울면서 운전하고, 차에 홀로 한참을 앉아 빗소리를 듣는. 내 밑바탕에는 그리움과 아픔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반전이 있는 사람이더라. 지치고 외로워도 희망으로 하루의 매듭을 짓는 사람. 뭐든 마무리가 가장 중요한 거 아니겠나.
“사십 대 들어서며 난 주눅 든 생활인으로서 곧 다가올 오십 대를 미리 겁내하며 직장의 눈치를 보는 그저 나이 든 ‘여자 사람’일 뿐이었다. (중략) 나는 내 나이를 살아본 적이 없었다. 항상 미리 나이를 먹었다. (중략) 나이를 먹는 게 슬프고 두렵지만 남은 날 중 가장 젊다는 지금을 한껏 누리려 한다”라는 구절이 왈칵 마음에 와닿는다. 지금을 한껏 누리며 멋지게, 현명하게 나이 드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름답게 나이 들 수는 없다. 그런 방법은 없다. 약해지고 늙어가고 위축되는…. 나이 듦이란 솔직히 아름다움과 멀어지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외적으로는 운동 열심히 하고, 피부 관리도 해야 한다. 젊을 때보다 옷도 더 신경 써서 입어야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경직된 사고에 갇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자기 경험에만 매몰돼 있을 때 꼰대가 되는 거다. 새로운 것을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할수록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내외적으로 모두 감각적인 면이 뒤처지지 않도록 엄청나게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초라하지 않게 나이 들 수 있다.
책에서 “내가 나랑 잘 놀고, 나를 예뻐해야 남도 나랑 놀고 싶어 하고, 나를 예뻐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를 예뻐하기가 참 쉽지 않다.
스스로를 많이 가꿔야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있는 그대로 나를 계속 사랑할 수 있나. 평소 안 입던 스타일의 옷도 입어보고, 색다른 공간도 가보고, 평소 안 하던 것도 시도해봐야 새로운 나를 볼 수 있다. 그래야 내가 멋져 보이기도 하는 거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이 생긴다는 의미다.
이렇게 자신만의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가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궁금한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윤영미의 콘텐츠는 무엇인가?
윤영미의 콘텐츠는 바로 감각. 고정관념을 탈피한 새로운 것들을 덜컥 시도하는 것. 예를 들어 와인을 꼭 와인 잔에 마시라는 법이 있나. 막걸리 잔에 와인을 마셔도 멋스러울 수 있고, 돈 없어도 부자 못지않게 즐겁고 화려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흥미로워하는 것 같다.
결국 중요한 건 안목일 것 같다. 돈이 많지 않아도 스타일리시할 수 있는 센스, 당근마켓에서 보물을 건져낼 수 있는 눈썰미…. 어떻게 하면 이런 안목을 키울 수 있을까?
그런 건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애들은 어렸을 적 나와 함께 학원 대신 광장시장부터 가로수길, 청담동 엘피바까지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래서인지 또래보다 감각적이고 센스가 있다.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더라.
또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향상심을 늘 품어야 한다. 현재에 고요히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잡지도 보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많이 쇼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보는 눈이 생길 거다.
그런 안목이 윤영미를 나이보다 훨씬 젊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젊게 사는 윤영미만의 스타일링 팁, 피부 관리 노하우 등도 궁금하다.
패션에 있어서는 과감한 편이다. 위트가 더해진 옷이 좋다. 베이식하지만 톡톡 튀는 컬러감이 더해지거나 독특한 디테일이 가미된. 옷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한다. 그렇게 계속 시도하다 보면 나만의 스타일을 저절로 찾게 될 거다.
피부 관리는 되도록 공을 많이 들이려고 한다. 일단 헤어가 첫인상을 좌우하므로 머리숱이 적어지지 않도록 헤어 영양제를 꾸준히 먹고 있고, 시간 여유만 있으면 스킨케어에 1시간이 걸릴 정도로 신경 쓴다. 제품을 얇은 겹으로 바르고 또 발라 피부에 충분히 흡수되게 하고, 괄사 같은 것도 열심히 쓴다. 결국 노력하는 만큼 젊고 예뻐진다. 그게 진리다.
매일매일 미룰 수 없는 일상의 노동. 꼬박꼬박 해내야 유지되는 생활의 숙제.
일상은 줄 타는 어릿광대같이 성가시고 위태롭지만
공짜로 받는 햇살과 산소, 바람에 대한 대가로 여기면 글쎄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수월해질까.
-<놀 수 있을 때 놀고 볼 수 있을 때 보고 갈 수 있을 때 가고> 중
윤영미 주변에는 항상 신나는 작당 모의가 넘쳐 날 것만 같다. 계획하고 있는 재미난 일 있나?
멀리 계획하기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으면 바로 움직인다. 헤치고 나가야 한다.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되는 일은 없으니까. 이렇게 재미를 좇다 보면 그것이 내 삶을 풍성하게 하고 콘텐츠가 된다. 글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영미상회’에서 팔고 싶은 보물 같은 제품을 발견하기도 한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 내 인생을 바꿔놓기도 하고. ‘재미있겠다’로 시작해 얻는 것이 너무 많다.
죽기 전에 꼭 해봐야겠다 싶은 일이 있다면?
꼭 죽기 전에 해봐야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제주 무모한 집 외에도 또 다른 공간을 마련해보고 싶다. 내년에 애들이 대학을 졸업해서 좀 더 여유로워지면, 외국에서 몇 달씩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 일본 어디든 좋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면서 나이 들고 싶다.
제주의 무모한 집, 해외살이처럼 새로운 공간 마련에 노력하는 이유는 뭔가?
나이 들수록 오히려 사람에게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한 것 같다. 몇십 년 묵은 살림이 아니라 오롯이 나로 채워놓은 전혀 새로운 공간. 제주에 집을 마련해놓으니 숨통이 트이더라. 그렇게 일상을 벗어난 공간이 필요하다.
윤영미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다. 내가 놀 수 있을 때 놀고 볼 수 있을 때 보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좋아하는 걸 하는 것, 그게 행복 아닌가?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치킨 먹는 순간처럼. 멀리 있지 않은 것, 알고 보면 아주 가까이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