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키에 여리여리한 체구, 다부진 표정의 배우 옥자연은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면서도 촬영이 시작되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웃는가 하면, 고혹스러운 표정으로 연기하듯 포즈를 이어나갔다. 그리고는 질문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며 고심 끝에 답변을 들려주었다. 여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요즘, 대체 불가능한 배우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옥자연의 이야기.
오늘 촬영은 어땠어요?
이런 콘셉트로 찍어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제안받고부터 새로웠어요. 스튜디오에 와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하고 옷까지 입어보니 정말 새로웠고, 즐겁게 촬영했어요.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분위기도 좋아서 오늘 즐거운 추억을 남긴 것 같아요.
<우먼센스>와는 두 번째 만남이에요. 2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배우로서, 개인으로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맞아요. 2년 동안 정말 바빴어요. 이미 방영된 드라마 <빅마우스>, <슈룹>,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메이커>와 올 하반기에 방영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경성크리처>, 상영 중인 영화 <사랑의 고고학>, 예능 <언니들이 뛴다-마녀체력 농구부>까지 촬영했으니까요. 정말 바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고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영화 첫 주연작 <사랑의 고고학>이 개봉했어요. ‘옥자연의 재발견’이라는 평이 가장 눈에 띄더라고요.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와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나요?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이런 글을 써주다니 고맙다’라고 생각했어요. 또 저에게 ‘영실’ 역을 제안해줘 감사했어요. <사랑의 고고학>은 아주 독특한 시나리오였어요.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면서 섬세한 신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마음에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꺼내어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시나리오는 마치 흙에서 유물을 파내어 하나하나 닦고 면밀히 탐구하는 것 같았어요. 기억에 남는 대사는 너무 많지만 “사과하는구나”가 가장 강렬하고, 그다음으로 제 마음에 사무치는 건 “쉬고 싶어요”예요.
“쉬고 싶어요”라는 대사가 왜 사무쳤을까요?
영실이라는 캐릭터가 8년 동안 힘든 연애를 했고, 소위 말하는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많이 지쳐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표현은 못 하고 혼잣말을 하는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쉬고 싶어요’라고. 그런 표현이 와닿았던 것 같아요. 새로운 사랑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은 영실이 ‘쉬고 싶다’라는 말에 그 감정을 담았다는 것이요.
최근에 방영된 <퀸메이커>도 빼놓을 수 없죠. 많은 작품에서 배우 옥자연의 존재감은 꼭 주연이 아니더라도 또렷하게 각인되는 것 같아요. <퀸메이커>에서 맡은 ‘국지연’은 어떤 인물인가요?
국지연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어요. 그러다 전부를 걸었던 ‘백재민’(류수영 분)에게 배신당한 후에 진실을 폭로하죠. 저에게는 그 폭로 신이 아주 중요했는데, 복합적인 상황이어서 좋았어요. 국지연의 생존 본능과 ‘황도희’(김희애 분)의 진실에 대한 사명감이 만난 순간이거든요. 국지연이 황도희의 손을 잡는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예요. 그렇다고 국지연이 전혀 변한 게 없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사실 국지연은 백재민만 나쁜 놈으로 만들고 빠져나갈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백재민의 만행뿐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과오도 숨기지 않고 밝혔잖아요. 자신의 과거를 털고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은 거예요. 진심으로 반성하고 후회했다고 생각해요.
<마인> <슈룹> <퀸메이커> 등 기라성 같은 선배 배우들, 특히 여배우들과 연기를 많이 했어요. 그 여배우들과 연기하는 건 어땠나요?
한 분 한 분 마음에 새기지 않은 선배가 없어요. 저는 정말 운이 좋아요. 선배님들이 연기할 때 집중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요. 짜릿하고 감동받은 적이 정말 많아요. 모든 선배가 다 기억에 남지만 가장 최근에 촬영한 작품이 <슈룹>이에요. 김혜수 선배님은 정말로 열정적이에요. 촬영 기간 내내 오로지 연기를 위해서만 사는 것 같아요. 모든 에너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 다 쏟아내죠.
한 유튜브 채널에서 배우 김혜수씨는 촬영 기간 동안에는 사람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대본만 보고 지낸다 밝힌 적이 있어요. 본인은 어떤 타입이에요?
저도 일에만 집중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일과 일상의 병행이 잘 안 돼요. 일을 안 할 때는 밥도 잘 해 먹고, 집 안 정리도 잘하는데 일을 시작하면 밥도 잘 못 해 먹고 일상적인 걸 못 하게 되더라고요. 친구 만나는 것도 다 미루고, 일상이 좀 엉망이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비슷한 편이네요?
맞아요. 그런데 제가 김혜수 선배님을 보며 놀란 것은 그렇게 일상이 멈출 정도로 집중하면서도 주변을 놓치지 않으세요. 혼자 있을 때는 대본과 연기만 생각한다고 했는데, 현장에서는 모든 사람을 다 챙기세요. 그런 모습을 보면 뭔가 차원이 다른 인간이 아닌가 싶어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어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은데 어땠나요?
지난해와 올해는 전주국제영화제와 인연이 있었어요. 지난해는 <사랑의 고고학>으로 배우상을 받았고, 올해는 국제경쟁 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어요. 배우상을 받았을 땐 생각지도 않았던 수상에 정말 큰 용기를 얻었어요. 심사위원 경험도 정말 큰 배움이었어요. 처음엔 그 자리가 부담스러워 제안을 고사하려고 했지만, 영화제를 열심히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요. 그때처럼 열심히 영화를 보고 싶어서, 또 배우고 싶어서 수락했어요. 그리고 그 기대 이상으로 자극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새로운 것은 고유하고 정직한 것에서 나온다는 걸 다시금 느꼈죠. 좋은 작품을 만드는 분들에게 정말 고마웠어요. 시상할 때는 뭉클해서 제가 눈물이 다 났어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영화와 사랑을 나눈 일주일이었어요.
‘연기의 시작’이었던 연극은 어때요? 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촬영이 많아지면서 연극을 자주 하기 어려워지고 있어요. 연극은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하고 공연이 잡히면 시간을 옮길 수도 바꿀 수도 없으니까요. 제가 좋아하고 교류하는 연출가들이나 작가들이 다루는 내용 자체가 좋은 것이 많아 연극은 좀 더 애정이 가요. 일단 준비하는 과정부터 재밌거든요. 배우들과 연출진이 오랜 시간 함께 연습하는데, 저는 연습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참 좋아요. 연극에선 모든 배우가 자기가 나오든 안 나오든 모든 신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준비해요. 관객을 만날 때의 긴장과 설렘도 좋죠. 한 공간에서 같이 집중하는 느낌이 좋아요. 사람들과 같이 다른 시공간으로 잠시 이동하는 느낌이 들어요.
편집되지 않은 생생한 연기와 편집의 예술인 드라마와 영화. 어떤 점들이 자신을 매료시키나요?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는 컷마다 호흡이 끊어지기 때문에 계속 그 감정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면 무대에서의 연기는 호흡이 쭉 이어져요. 그래서 저 스스로가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가 많고 그렇게 다 쏟아내고 나면 후련해지기도 해요. 반면에 드라마와 영화는 내가 보지 못하고 참여하지 않은 신들이 내가 연기한 장면과 붙었을 때 종합적으로 ‘어떻게 나올까’를 상상하면서 연기하는 점이 재미있고, 최종본을 볼 때는 감탄하기도 해요. 각각의 매력이 저를 즐겁게 하고, 또 열심히 하게 만들어요.
끝난 작품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 시간도 없이 새로운 작품을 쉼 없이 촬영했을 것 같아요. 하나의 작품이 끝나면 그 작품을 떠나보내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겠죠?
작품이 끝나면 너무 공허해 오히려 빨리 잊으려고 해요. 다행히 지금까지는 바빠서 빨리 흘려보낼 수 있었어요. 저는 지나간 작품을 다시 곱씹으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겠다’, ‘이렇게 할걸’ 하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올라 너무 괴로워요.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면 거리를 둔 상태에서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다음에는 잘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거죠.
<마인> 때도, <사랑의 고고학> 때도 맡은 배역 연구에 책의 도움을 꼭 받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 읽는 책이 있나요?
요즘은 <이중톈 중국사>를 아주 천천히 읽고 있어요. 김서형 선배님을 보려고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보다가 극 중에서 한석규 선배님이 이 책을 언급하더라고요. 궁금해서 읽는데 재밌어요. 책에 대한 흥미는 다방면으로 많아요. 과학도 궁금하고, 역사는 항상 재밌고요. 하지만 다독가는 아니에요.(웃음)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정말 궁금해요.
옥자연만의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싶어요. 대체될 수 없는 나만의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고정적이지 않고 마구 변신할 수 있는 배우요.
시간이 생겼을 때 무엇을 하는지도요.
올 초에 좀 한가했어요. <사랑의 고고학>이 스웨덴 예테보리국제영화제 잉마르 베리만 경쟁 부문에 올랐는데 마침 시간이 돼서 다녀올 수 있었어요. 영화제 관계자들과 만나고, 관객과 만나고, 여행도 하고 정말 잊지 못할 시간이었어요. 시간이 되면 또 여행을 가고 싶어요. 사실 일상에서 즐기는 취미는 별로 없어요. 식물을 기르고 돌보는 것을 좋아하고, 영화를 보거나 좀 걷거나 하죠. 운동을 싫어해 운동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 사흘이면 실제로 하는 날은 하루 정도예요.(웃음)
요즘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조카들요.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항상 보고 싶어요. 가족 채팅방에 올라오는 사진을 볼 때마다 웃게 돼요. 그리고 좋은 사람들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크고 작은 스케줄이 많다 보니 약속 잡고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거든요. 그렇지만 가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럴 때 정말 좋아요.
하반기에는 <경성크리처>에서 옥자연 배우를 만날 수 있죠. 또 무슨 계획이 있나요?
굉장히 재밌는 작품들에서 인상 깊은 배역을 맡게 될 것 같은데요, 아직 공개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기대해주시고, 좋은 작품들을 많이 사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