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하고 사진 찍는 인생 후반기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대중과 소통하며 사진이라는 평생의 취미를 즐기며 살아가는 기업인’.
은퇴한 박용만(68세) 전 두산그룹 회장의 최근 근황을 보여주는 한 문장이다. 두산그룹 회장과 재계를 대표하는 자리 중 하나인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 회장을 내려놓은 뒤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재벌답지 않은 이미지’를 가진 그다. 하지만 박 전 회장은 정치가 아닌 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더 찾고 있다. 15년을 ‘회장님’으로 살아온 그는 지난해 “67살에야 처음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박 전 회장은 지난해 초, 자신과 자녀들이 보유하던 두산 지분 전량을 매각하고 두산과 완전히 결별했다. 지난해 1월, 컨설팅 업체 벨스트리트파트너스라는 경영 자문 및 컨설팅 회사도 설립했다. 박 전 회장의 차남 박재원 전 두산중공업 상무도 참여했다. 박 전 회장은 경영 컨설팅 외에도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강연 등에서 후배와 청년들에게 조언을 건네고 있다.
이처럼 한발 물러나 ‘경험’을 나누는 삶을 선택한 박용만 전 회장. 그는 2021년 초 발간한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의 표지에 독일 명품 카메라 라이카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담겼을 정도로 사진을 즐긴다. 작가 소개란에 “소통하는 대기업 CEO로 잘 알려져 있지만 쉬는 날엔 혼자 골목골목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적었을 정도다.
고교 시절부터 사진에 관심을 보인 박 전 회장은 아버지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반대로 사진기자의 꿈을 포기했지만, 두산그룹 회장직을 사임한 뒤에는 틈틈이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오랫동안 운영한 인스타그램은 온라인 전시회라고 봐도 무방하다).
며느리와도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하는 소통왕
평소 SNS로 소통을 즐겨 다른 재벌가 오너들과 비교됐던 박용만 두산그룹 전 회장. 다른 기업들과 달리 형제들 간 계열 분리 대신 형제가 돌아가면서 경영하는 두산그룹의 9대 회장에 올랐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회장을 역임한 뒤 물러난 그는 그 후에도 계속 주목받는 재벌가 인사다.
최근에는 며느리인 조수애 전 JTBC 아나운서와의 인스타그램 소통이 화제가 됐다. 조 전 아나운서는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사진 여러 장을 올렸는데 박용만 전 회장이 “예쁘다 우리 애기”라고 댓글을 달았기 때문. 조 전 아나운서는 “우와 감사합니다. 아버님”이라는 댓글로 화답했다.
저서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에서는 신입 사원들을 배려하며 소통하는 박 전 회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입 사원 행사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직원과 휴대전화 연락처를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 저녁, 갑작스레 “야”라고 톡이 왔다. 박 전 회장은 조금 고민하다가 “나?”라고 다시 물었더니 10분 정도 흐른 뒤 그 직원이 “친구가 장난인 줄 알고(보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전해왔다. 화낼 법도 한 상황. 하지만 박 전 회장은 “죄송해야지 ㅋㅋㅋ 벽에다 머리를 3회 강하게 박는다! 주말 잘 쉬렴”이라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것부터 무례한 메시지에 배려 섞인 답을 한 것까지, 박 전 회장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꾸준히 하는 봉사의 삶
“이제부터는 그늘에 있는 사람들 더 돌보고 사회에 좋은 일 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박용만 전 회장이 두산그룹 회장직을 떠나면서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이다. 에세이에 따르면 2004년 친구를 따라 보육원에 갔다가 자신에게 달려와 안기던 아이들을 만난 충격이 박 전 회장을 그늘에 있는 이들을 섬기는 길로 이끌었다.
박 전 회장은 9년간 일했던 대한상의 회장을 그만둔 뒤부터 매주 서울 동대문구 쪽방촌 주방으로 출근, 도시락 나눔을 6년째 하고 있다. 대한상의 회장 퇴임을 앞둔 2020년 11월 그가 건물을 사들여 세운 일터다. 이곳에선 직접 반찬을 만들어 어르신들에게 배달한다. 그는 4년 전 북유럽 순방 출국 날 뇌졸중이 왔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병원에서 처음 전화한 상대가 주방 건물 구입을 맡긴 친구였다. ‘이런 일 하라고 살려주셨구나’ 싶었다. 그렇게 ‘쪽방촌 주방’이 탄생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박 전 회장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생각도 깊다. 북한에 대한상의 회장 자격으로 다녀온 경험, 또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마음으로 평화의 십자가 전시회를 연 것 등이 이를 방증한다. 휴전선 철조망을 이용해 십자가를 만든 것인데, 68년의 세월을 상징하는 136개의 십자가를 로마 산티냐시오 성당에 전시했다.
효율의 극대화를 좇는 기업 CEO 경험뿐만 아니라 소통하는 이미지에 사회적 나눔과 평화에 대한 관심까지. 당연히 정치권에서는 박 전 회장의 영입이 거론된다.
지난해 6월 치른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후보로 서울시장 출마 가능성이 거론됐다. 그보다 수개월 앞서 치른 대선에서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당선된 직후에는 국무총리 후보로도 거론됐다.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두 당에서 모두 박 전 회장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그만큼 박 전 회장이 가진 ‘다양한 이미지’ 덕분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박용만 전 회장은 이를 일축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중 일부가 “박용만 영입 가능성”을 거론하자 직접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공식적인 제안이) 아예 없었다”며 “정치라는 영역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의사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에세이에서 “저는 평생을 기업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기업인으로서의 사고가 머릿속에 아주 깊이 박혀 있는 사람”이라며 “정치의 영역은 생산성과 효율의 영역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공적인 이해를 위해 일할 자격에서 모자란 사람이었다는 반성이 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정치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음을 분명히 한 셈이다.
재계 대표적인 ‘사진 마니아’
박 전 회장은 재계에서 유명한 사진 마니아다. 서가에 사진집이 가득 차 있고, 즐겨 보는 책도 사진집일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평소에도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거리 풍경, 주변 사람 등 일상을 사진으로 남긴다. 사진작가 박용만의 실력도 상당하다. 그가 찍은 사진은 유명 가수의 앨범에 실리기도 했다.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1998) 재킷 사진은 박 전 회장의 작품이다. 앨범 발매 전 허락을 받고 사용했다고 한다.
지난해 3월에는 배우 류준열, 포토저널리스트 신웅재, 20세기 초현실주의 사진 거장 랄프 깁슨, 미국계 한국인 ‘앰부쉬’ 패션 디자이너 윤안, 버추얼 아티스트 웨이드와 함께 <오! 라이카(O! Leica) 2022>에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인스타그램 계정에 들어가보면 사진작가 박용만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최근에도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을 여러 장 올리며 ‘출사’를 다녀온 것을 뽐내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두산그룹은 다른 기업들과 달리 형제 승계가 잘 이뤄지는 몇 안 되는 기업이지 않냐”며 “박 전 회장은 집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낸 뒤 정말 하고 싶었던 취미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