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오후 7시가 조금 넘는다.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습관처럼 TV를 틀어놓은 채 고단함을 달래다가 더 늘어지기 전 샤워를 하고, 배를 채우기 위해 다시 거실로 나오면 어느덧 오후 8시다. 먹을 것을 대충 차려놓고 앉아 어른스럽게 뉴스를 시청해볼까 생각하지만, 손은 자연스럽게 넷플릭스 버튼을 누른다. 모두가 아는 ‘두둥’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세상의 모든 다채로운 이야기. 짧은 하루 동안 쌓였던 긴장과 스트레스가 노곤하게 녹아드는 순간이다.
다양한 콘텐츠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스릴러라는 장르로 묶인 모든 것이다. 그중에서도 전쟁, 테러, 마약은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잔혹한 다큐멘터리에 특히 더 몰두한다. 그래서 친구들은 내 마음에 병이 있는 것은 아니냐며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자문한 적도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선혈이 낭자하는 이야기에 마음이 갈까? 혹시 나에게 잠재된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 것을 아닐까?
돌이켜보면 나는 굉장히 무던한 인생을 살아왔다. 초·중·고등학교 기간 그 어떤 사건에 휘말린 적 없이 급식과 친구들로만 채워진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에 가서도 별거 없었다. 유럽어문학과 학생이라면 다 가던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물론 어학연수도 다녀왔지만 동전 한 닢 잃어버리지 않았다. 여태 경미한 교통사고조차 겪어본 적이 없다. 그럼 내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은 무엇이었을까? 순간 인터넷 카페 ‘중고나라’에서 30만원을 사기당한 기억이 스쳤지만 어디 가서 내밀지도 못할 이야기다. 누군가는 나를 온실 속의 화초라고도 칭했다. 그게 이렇다 할 풍파를 겪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무서운 이야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곳곳의 위험, 오래 기억해야 하는 세상의 사건들에 대해서 말이다. 간접경험이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의외로 배운 것도 많고 반성한 것은 더 많다. 조금 단단해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무채색의 현실을 벗어나 멍해질 틈 없는 스릴러의 세계로 로그인하는 매일.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딘가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없이 크고 소중한 하루의 힐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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