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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깊은 배우, 김혜은의 찬란한 봄

성악을 공부하고, 기상 캐스터를 지나 배우로 자리 잡기까지, 배우 김혜은에게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에 감사하고 내일을 향해 내디딜 줄 아는 사람. 그녀의 단단하고 깊은 눈빛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On March 3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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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 딘트.

슈트 딘트.

새로운 캐스팅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는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그간 촬영한 작품들이 요즘 들어 기사화되고 있어요. 예전과 환경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사전 제작도 많아졌고, OTT 플랫폼도 다양해졌죠. 촬영이 끝나고 두어 달 후 잊을 만하면 방영하기 시작해요. 그제야 제가 그때 어떤 연기를 했나 모니터링할 수 있죠. 그게 참 설레요. 요즘 연기하는 재미 포인트랄까.

KBS2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편성이 5월로 잡혔어요. ‘1987년에 갇혀버린 두 남녀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간 여행기’라는 드라마 개요가 흥미롭습니다. 그 속에서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요?
스폐셜한 인물이에요. 재미가 반감될까 봐 자세하게 설명하긴 어렵네요.(웃음)

전작인 드라마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에선 냉철한 이성을 지닌 ‘오하란’으로,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하나>에선 참스승인 ‘양찬미’로, 드라마 <더 로드: 1의 비극>에선 성공이란 염증 같은 갈망에 허기진 아나운서 ‘차서영’으로 분했습니다. 작품마다 알록달록한 컬러를 부여하는 캐릭터란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배우가 그럴 거예요. 배역을 받으면 열심히 캐릭터를 분석해 특별하게 쏟아내려 하죠.

차서영 역을 준비할 때는 의상에 신경 썼다는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캐릭터를 존재감 있게 풀이하는 자신만의 방법인가요?
캐릭터를 분석하다 보면 점차 캐릭터가 입체화 되기 시작해요. 그럼 동대문 상가의 지하부터 꼭대기 층까지 살펴 떠오른 이미지와 맞는 옷으로 착장을 맞춰 스타일리스트와 상의해요. 헤어와 메이크업도 고민하고요. 지금은 그때처럼 고집부리지 못하지만 드라마 <오로라 공주>와 <밀회>에서 착용한 액세서리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디자인한 백을 제작해 들고 출연하기도 했죠. 저는 캐릭터를 이미지로 구축해 밀고 나가는 과정이 너무나 재밌어요. 그저 대사만 외우는 게 아니라 발로 뛰어 상상하는 것 자체가 캐릭터를 입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극에 배우 김혜은이 등장하면 공기의 흐름이 변하는 느낌이 들곤 했어요.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역시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나이트클럽 ‘여사장’으로 분한 모습이겠죠. 쌍욕과 담배 연기를 내뱉던 배우 김혜은은 낯설고도 충격적이었어요. 지금 그 장면을 다시 촬영한다면 또 다른 연기가 나올까요?
당연히 그럴 거예요. 그때는 어려서 ‘저걸 저렇게 밖에 해석하지 못했구나’ 싶어요. 지금 같은 연기를 한다면 아무래도 연륜이 더 있으니 여유롭고 경험이 묻은 톤이 나오겠죠. 하지만 그때 에너지가 좋았어요. 그럴 수밖에요. 젊었잖아요. 지금 봐도 다시는 못 하겠다 싶은 건 최민식 선배랑 재떨이로 싸우는 장면이에요.

임팩트가 큰 장면이죠. 살벌했어요.
그게 살벌하면서도 웃겨요. 최민식 선배가 맡은 ‘최익현’이란 캐릭터가 여자 머리채를 잡고 싸울 인물은 아니잖아요. 무식하게 욕하면서 머리끄덩이를 잡는 모습이 우습고 재밌는, 어떻게 보면 주책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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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 딘트, 액세서리 불가리.


때론 꿈을 좀 낮게 가지고 살아야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것 같아요.
너무 큰 꿈을 꾸면 쉽게 지쳐요.
즐기듯, 놀이하듯 연기하면 연기도 더 잘되거든요.
사소한 것에 더 감사하게 되고요.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 있나요?
순수한 영혼이 연기의 근간이라 믿어요. 우리의 심신이 항상 건강할 순 없잖아요. 누구에게나 업앤다운이 있죠. 다운돼 있는 순간 좋은 연기가 나오긴 어려워요. 결국 다 같은 말인데, 제 에너지를 항상 관리하려고 노력해요.

에너지를 관리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나요?
아침을 가볍게 시작해요. 책을 읽고, 잠시 명상 시간을 갖죠. 진짜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스스로 돌이켜보는 거예요. 5분에서 10분 정도 걸려요. 출근 전에 명상을 한번 해보세요. 확실히 달라져요. 분노를 느끼고 짜증 날 법한 일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돼요. 초연해지죠.

스스로를 다독여주는 시간이기도 하군요?
그렇죠. 나를 품어주는 시간이기도 해요. 그럼 확실히 여유가 생겨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죠. 좋은 에너지가 꽉 차 있으면 좋은 연기로 드러나요. 그게 태도에서도 느껴지잖아요. 촬영장에서 먼저 힘차게 인사하고 시작하면 현장의 분위기가 달라져요. 에너지가 좋은 사람끼리 모여 행복하게 일하는 것만큼 좋은 건 없어요.

자신의 행복은 스스로 만드는 거죠. 나이가 들수록 더 깊게 공감돼요. 수 많은 캐릭터를 연기 했어요.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를 고른다면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의 나이트 클럽 여사장 캐릭터는 어쨌든 김혜은이란 배우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린 은인 같아요. 그다음 <밀회>의 ‘서영우’는 제겐 너무나 가슴 아픈 존재예요. 그녀는 돈과 부유한 집안, 명예를 태어날 때부터 손에 움켜졌거든요. 근데 너무나 불행해요. 사랑받고 사랑을 주며 살지 못하죠. 역설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돌이켜보게 해요. 그래서 더 마음이 가요.

김혜은이란 사람의 인생 궤적을 짚다 보면, 참 다이내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프라노를 꿈꾸며 성악을 공부하고, 기상 캐스터가 되고, 배우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해요.
오랫동안 성악을 공부하다가 유학 갈 시점에 IMF로 집안이 기우니까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판단을 한 거예요. 방향을 바꿔 MBC 기상 캐스터가 돼 열심히 살았어요. 그러다 문득 10 년 뒤를 그려봤는데 그림이 정확히 안 그려지더라고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누군가 는 날 원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회의감이 들었어요. 나중에는 이명이 들릴 정도로 몸이 아팠고, 그즈음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그만두고 나선 아나운서 공채 시 험 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몰래몰래 연기 학원을 다녔는데, 그때 운명처럼 드라마 <아현동 마님>에서 배역이 들어왔어요. 캐릭터에 맞는, 성악을 전공한 배우를 검색하다가 제가 선택된 거예요. 운명인 거 죠. 어찌 보면 인생은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다음 스텝에서 무엇이 잭팟으로 터질지 아무도 모르는 거죠.(웃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던 시간이 5~6년 됐거든요. 참, 왜 그랬을까? 배우가 이렇게까지 힘든 줄 알았다면, 어떤 직업인지 알았다면 못 했을 거예요.(웃음) 오히려 꿈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버텼던 것 같아요. 대단한 꿈이 없어서, 단지 내가 재밌고 좋아서요. 그래서 힘들지 않았어요.

지금도 10년 뒤를 그리곤 해요?
그럼요. 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를 보여주시는 김영옥 선생님을 존경해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서, 대사 없이 풀 숏에서 바스트로 화면이 잡히며 뭔가를 다듬는 연기를 하시는데, 별안간 울컥 눈물이 난 순간이 잊히질 않아요. 그간 쌓아오신 내공이겠죠.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저도.

오늘 화보 촬영할 때 보여준 눈빛만으로도 스태프가 환호성을 질렀는걸요.
감사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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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재킷 에리아.

인생의 전환점을 마주할 때마다 그걸 받아 들이고, 앞으로 헤쳐나가는 게 쉽지 않죠. 자신에게서 그 동력을 찾아본다면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살려는 태도예요. 쉽지 않아요. 저 되게 게으르거든요. 어떤 날은 실패하고, 어떤 날은 성공해요. 연기를 많이 준비한 날은 자신감에 차서 신나거든요. 연습 안 한 날은 누구보다 자신 없을 수 밖에 없어요.

배우는 끊임없이 단련이 필요한 직업이군요.
그럼요. 관성에서 나오는 연기란 없어요. 매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쉬울 리가 없죠. 좀 쉽게 가려 하면 시청자들이 제일빨리 알아보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댓글 보세요. 얼마나 살벌한대요.

댓글을 찾아보는 편인가요?
다 찾아서 읽어요. 기상 캐스터로 방송 모니터하면서 생긴 습관이에요.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을 시청자가 먼저 알아요. 속일 수가 없죠. 또 노력도 정확하게 알아봐요. 댓글 보고 상처받지 않아요. 기상 캐스터 시절 기상센터에서 갖은 연락이 다 왔거든요. 욕에는 단련이 돼 있죠.(웃음)

열정적인 이에겐 번아웃도 오기 마련이죠. 지칠 때 나를 일으켜주는 주문이 있나요?
잠을 푹 자고, 영화를 보거나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죠. 지칠 때는 쉬어 갈 줄 알아야 해요.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면 고향인 부산에 찾아가요. 제가 나고 자란 익숙한 풍경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나의 근본은 여기구나’ 하는 느낌 있잖아요. 근처 재래시장에 아직도 3,000원짜리 국수가 있어요. 이모님이 할머님이 돼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제겐 너무나 큰 위로예요. 학창 시절 열심히 예쁜 꿈을 꾸던 그때가 떠올라 몸과 마음이 정화돼요.

초심을 상기시킬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좋네요. 오랫동안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의 홍보를 맡아왔어요. 사회적 기업 ‘행복한나눔’ 의 대표직과 ‘한국청소년쉼터협의회’ 홍보이사도 맡고 있고요. 최근 개발도상국과 탈북민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단체 ‘더 브릿지’의 홍보대사로 발탁됐죠. 소외된 이웃을 향한 관심은 어디서 시작된 건가요?
‘기아대책’과의 관계는 벌써 20여 년이 넘었어요. 남편을 소개받아 만날 때쯤 그가 후원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시작했거든요. 누군가를 도와줄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다가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됐죠. 지금 돕는 가정이 스물 몇 가족이 돼요. 성년이 되면 자립하는 아이들도 있어 정확한 수는 늘 헷갈려요.(웃음) ‘한국 청소년쉼터협의회’는 고립된 아이들을 돕는 단체예요. 높은 이혼율에 방치된 아이들이 생각보다 정말 많거든요. 대안 가정처럼 보호해주는, 반드시 필요한 곳이에요. 지원이 열악해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죠. 20년 전부터 친하게 지낸 탈북한 동생에게 동기부여를 받아 최근에는 ‘더 브릿지’까지 이어졌어요.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선까진 이웃을 도우며 살고 싶어요.

봉사를 위해 더 유명해져야겠다고 결심했다고요?
혼자서 몰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많은 이들에게 어려운 현실을 알리기 위해선 제가 더 유명한 사람이면 도움이 될 테니까요. 도움을 준다곤 하지만, 도리어 나를 돌보는 일이기도 해요. 오늘에 감사하고,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요. 좀 더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지 찾으면서 더 열심히 살아가게 되는 선순환이죠. 사회적 책임이기도 해요.

마음이 따스해지네요. 어느덧 산수유와 매화꽃이 피는 계절이에요. 이 찬란한 시간을 어떻게 만끽할 계획인가요?
딸이 올해 수험생이 됐어요. 함께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알차고 후회없이 따뜻한 추억을 쌓으려고요. 돌이켜보면 일하느라 바쁘고 엄한 엄마였어요. ‘더 따뜻하게 살 비비면서 키울걸’ 후회하자니 벌써 다 큰 거 있죠. 요즘 뒤늦게 딸을 짝사랑하는 중이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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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 딘트.


봉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고는 하지만, 도리어 나를 돌보는 일이기도 해요.
오늘에 감사하고,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요.
좀 더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지 찾으면서 열심히 살아가게 되는 선순환이죠.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선까진 도우며 살고 싶어요.

CREDIT INFO
에디터
박소현(프리랜서)
사진
이수진
스타일링
김보라
헤어
차차(정샘물 인스피레이션)
메이크업
파니(모아위)
2023년 04월호
2023년 04월호
에디터
박소현(프리랜서)
사진
이수진
스타일링
김보라
헤어
차차(정샘물 인스피레이션)
메이크업
파니(모아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