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서울284
먼 곳으로 가야만 여행인 건 아니다. 늘 걷고 달리던 장소도 새로운 시선으로 마주하는 순간 여행지로 바뀐다. 어딘가로 떠나기 위한 ‘수단’이기만 했던 서울역. 오늘은 수단이 아닌 여행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선다. 흑백사진으로만 만나는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같은 자리를 지켜온 서울역은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알아차리지 못해서, 몰라서 지나쳤던 그때의 흔적을 찾아 역 주변 공간을 탐색한다.
기차와 우리의 과거, 문화역서울284
기차를 타러 역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뒤로한다. 광장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몇 걸음 걷자 그림 속에 있을 법한 건물이 보인다. 푸른 돔과 붉은 벽돌이 눈길을 끌어 주변 빌딩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 우리의 첫 번째 여행지, 문화 공간이자 구 서울역인 문화역서울284다.
문화역서울284의 시작을 알려면 약 100년 전으로 가야 한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이 개통한 다음 해인 1900년, 서울역의 시초인 남대문정거장이 탄생한다. 소달구지가 덜커덩거리며 길을 지나던 시절 연기를 뿜으며 빠르게 달리던 기차는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과 신선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소달구지와 비교할 수 없이 날쌘 기차는 생활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경부선과 경의선이 차례로 놓이고 기차 이용객이 늘어나자 1925년에 경성역, 현재의 구 서울역 건물이 세워진다.
나라를 빼앗긴 시기였으므로 경성역 건축은 일본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일본 무사의 투구를 닮은 지붕 모양, 조선 총독이 글씨를 남긴 정초석 등이 그 흔적으로 남았다. 구 서울역이 아픈 역사의 일부임은 분명하지만, 마냥 슬프지는 않다. 선조들이 저항한 시간도 함께 담겼기 때문이다. 문화역서울284 앞, 남대문정거장에서 신임 조선 총독을 처단하려 한 강우규 의사 동상과 정초석의 조선 총독 이름이 긁힌 자국은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이 있었음을 알린다.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도 서울역은 민주화 운동 거점지나 집결지로 굳건했다. 그렇게 긴 시대를 지나 2004년, 구 서울역은 지금의 역사에 그 역할을 물려주고 퇴장한다.
은퇴 후에도 옛 서울역에 대한 관심은 꺼지지 않았다. 100년 전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문화재로 지정, 사적 번호 제284번을 부여받을 정도로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문화역서울284는 원형 복원 공사를 거친 후의 모습이다. 역 건물 특성을 설명하거나 역사를 되새기는 전시 등 100년 전 공간에서는 여전히 문화와 예술이 샘솟는다. 1925년 경성역부터 현재의 문화역서울284까지 건물 정면의 거대한 시계는 6·25전쟁 시기의 3개월 정도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시계를 바라보는 이 순간도 훗날 누군가는 먼 과거로 기억할까? 역사 속에, 또는 누군가의 기억 안에서 지금이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다.
TRAVEL TIP
문화역서울284 외부 투어에 참여해 문화역서울284, 서울로 7017, 서울역 옥상정원을 해설과 함께 둘러본다. 단, 외부 투어는 전시 준비 기간에만 운영한다. 문의 02-3407-3500
서울로 7017
`도시를 걷다, 서울로 7017
시간이 흘러 현대에 닿는다. 휑했던 옛 서울역 앞은 이제 빌딩숲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땀방울로 일군 서울을 도로 위에서 조망한다. 서울로 7017 곳곳에 설치된 화분이 고개를 내민 새싹으로 옅은 초록빛이 돈다. 본래 이곳은 사람도 식물도 자리할 수 없는 고가도로였다. 1970년대에 건설되어 서울의 동`과 서를 약 30분 만에 잇는 도로였으나, 노후화로 안전 문제가 불거져 폐쇄되고 만다. 쓰임을 잃은 도로가 새 이름을 부여받은 건 2017년이다. ‘1970년대 세워진 고가도로를 2017년에 사람이 다니는 길로 만들다’라는 의미를 담아 서울로 7017이라 이름 짓고 공중 보행로로 닦았다. 햇살 좋은 오후, 산책하는 사람들로 서울로 7017은 복작인다. 구 서울역과 현재 서울역은 물론, 저 멀리 숭례문과 1955년에 지은 남대문교회까지 보인다. 어딜 봐도 구경할 것이 가득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는다. 더 높은 곳에서 도심을 조망하고 싶다면 딱 맞는 공간이 있다. 주차장 겸 정원으로 쓰이는 서울역 옥상정원에 올라 역 근처 풍경과 서울로 7017 등 근방을 내려다본다. 구 서울역 돔과 가까워 건축물을 자세히 관찰하기도 좋다. 무엇보다 기찻길이 훤히 드러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옥상정원에서 오고 가는 기차를 바라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다. 저 기차 안 사람들은 어떤 기분으로 어떤 목적지를 향할까? 어디를 목적지 삼는대도 그 여정에 설렘이 함께하면 좋겠다고, 멀리 사라지는 기차를 눈으로 좇으며 마음으로 빈다.
TRAVEL TIP
서울역 옥상정원에는 비건과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알맹상점 리스테이션’이 위치한다. 플라스틱이나 유리 용기를 들고 가서 샴푸, 보디 클렌저 등 알맹이만 구매해 환경을 지킨다. 문의 070-7777-1925
도킹 서울
모두의 우주, 도킹 서울
서울로 7017과 서울역 옥상정원이 만나는 곳에 특이한 조형물이 들어섰다. 가까이 다가가자 ‘도킹 서울’이라고 적힌 파란 표지판이 입구를 안내한다. 주차 램프처럼 생긴 길을 따라 내려간다. 아래로 들어갈수록 점점 어두워진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찰나 ‘끼익’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드니 천장에 붙은 나무판자들이 시소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오른쪽 벽에는 우주정거장이 연상되는 조형물을 설치했다. 왼쪽은 벽을 창문인 양 뚫어 빛이 쏟아진다. 그곳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소용돌이 조형물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듯 눈앞을 채운다. 단숨에 시야가 파랗게 물든다.
신비로운 조형물을 한참 감상하다가 입구 근처로 돌아와 안내문을 읽는다. 도킹 서울, 이곳은 20년간 쓰이지 않던 주차 램프를 미술관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나선형으로 된 미술관에는 일곱 작품이 놓였다. 천장에서 움직이던 나무판자, 파란 소용돌이 조형물이 모두 미술 작품이다. 작품은 우주와 과학 이야기를 담았다. 시민이 참여한 작품 ‘나의 우주색’에 다다르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웅웅’ 소리와 보랏빛 조명이 우주 공간에 있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꼭 미래에 온 것 같다. 서울역 옆 지하에 이토록 작은 우주를 마련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QR코드를 인식해 메타버스 세계에서 관람하는 작품으로 전시의 일부가 된 기분도 느낀다.
서울과 미술,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그린 공간에서 유영하다 밖으로 나온다. 서울역 근처를 걸었을 뿐인데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모두 만난 시간 여행자가 되었다. 걸음은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간다. 여행자의 눈에 비친 서울은 처음과 다른 모습일 것임이 분명하다.
TRAVEL TIP
도킹 서울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과학자 등이 협업해 생겨난 공공 미술관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문의 02-2133-2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