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에 이영애가 등장해 팬들의 반가움을 자아냈다. 지난 10월 13일 오후 부산 KNN타워 KNN시어터에서 ‘액터스 하우스’ 마지막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 액터스 하우스는 한국 영화계 아이콘 배우들과 관객이 만나 그들의 연기관에 대해 직접 얘기를 나누는 스페셜 토크 프로그램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배우상 심사위원이기도 한 그녀는, 네이비 컬러 슈트를 입고 무대에 올라 솔직담백하게 자신의 연기 철학을 얘기해 관객의 공감과 박수를 얻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영애는 1990년 초콜릿 CF로 데뷔했다. 이후 영화 <봄날은 간다>(2001), <친절한 금자씨>(2005), <나를 찾아줘>(2019), 드라마 <대장금>(2003), <구경이>(2021) 등에서 다양한 연기를 선보였다. 이영애는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긴 공백기를 가지기도 했지만, 이후 더욱 소탈하고 내공 있는 연기 활동으로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를 맞기도 했다. 30여 년 톱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영애가 진행자, 관객의 질문에 답했다.
나를 채워주는 건, 산책과 독서, 여행
부산국제영화제와 인연이 있다. 2004년 개막식에서 사회를 맡기도 했고, 올해엔 ‘올해의 배우상’ 심사위원으로 선정됐다.
사실 이런 자리가 무척 오랜만이라 떨린다. 영화 개봉 때 홍보를 위해 대중에게 인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오로지 ‘배우 이영애’만을 위한 시간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행복한 시간이라 감회가 새롭다. 더불어 심사위원을 맡게 돼 영화를 10편 이상 보며 배우로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열정적인 배우들을 보면서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업로드한 SNS 사진도 화제가 됐다.
오랜만에 영화 <나를 찾아줘>에 출연하면서 개봉 시즌에 맞춰 소통하고 싶어 시작했다. 초반에는 서툴러 놀림을 받기도 했는데 대중과 소통하는 게 재미있더라. 오랜만에 부산에 기차를 타고 왔는데 심심해서 뭐 할까 고민하다 SNS를 하니까 금방 시간이 갔다. 소소한 재미가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주 못 하지만, 지금처럼 소소하게 소통을 이어갈 것이다.
오늘 이야기는 지난해 출연했던 드라마 <구경이>로 시작하려 한다. 출연 이후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예전에는 식당에 가면 “엄마, 아빠가 팬이에요”라며 <대장금>을 언급하면서 사인을 받아가는 분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젊은 친구들이 “<구경이> 잘 봤어요” 하고 아는 척을 해준다. 그럴 때 드라마 출연이 나름대로 성공했구나 싶다.(웃음) 시청률을 떠나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서 큰 반응을 얻었고,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는 데 큰 힘을 얻었다.
극 중에서 다양한 연령대와 호흡을 맞췄고, 트레이닝복에 운동화를 신고 떡진 머리를 한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중이 이미지가 뒤틀리는 캐릭터를 더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하다. 캐릭터가 실제 내 성격과 달라 더 매력을 느꼈다. 그게 배우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사실 <구경이>를 하면서 참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생각의 폭이 다양해지고, 소재의 다양성도 확연히 느꼈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대중이 잘 받아들일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연출이나 구성 방식이 독특해 영화로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대본집도 샀다.(웃음) 결혼하고 출산하면서 배우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됐고, 아직 나를 찾아준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크다.
1993년 드라마로 데뷔했으니 어느덧 데뷔 30주년에 가까워졌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웃음) 20대 때를 돌아보면 마냥 열심히 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언젠가 결혼을 하면 공백기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 다시 돌아와도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배우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결혼을 한 뒤에도 흔들림 없는, 뿌리가 깊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20대를 보냈던 것 같다.
공백기도 있었다. 일과 휴식의 리듬을 잘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뭔가?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를 깊게 내린 분들은 마찬가지일 거다. 나를 돌아보니 시간이 꼭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직업은 풍선 같다. 풍선은 바람이 불면 계속 올라가지만 아무것도 아닌 침 하나에 쉽게 터질 수 있는 존재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심지가 깊어야 한다. 그러기 위에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산책과 독서, 여행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친절한 금자씨>는 선물 같은 작품
이영애의 배우 인생에 ‘걸작’ <친절한 금자씨>(2005)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서른셋에는 드라마 <대장금>을 찍었고, 서른다섯에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만났다. 20대 때 많은 작품을 하면서 기반을 다졌다면, 30대 때 영화인에게 눈도장을 찍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20대 때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해 아픔이 남는 작품도 많았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럼에도 꿋꿋하게 매진해온 나에게 선물 같은 작품이었다. 하늘에서 뚝딱 떨어진 작품이 아니고, 그동안 열심히 해온 결과라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 모든 작품이 소중하지만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도 배우로서도 큰 전환이 됐다.
극 중에서 울고 있지만 웃는, 웃고 있지만 우는 표정이 압권이었다. 클로즈업된 상태로 3분이 흘러가는 장면도 있다.
(관객과 함께 이 해당 장면을 감상한 후) 이런 자리가 있을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웃음) 어려운 작품이라 오로지 작품에만 집중했다. 혼자 이끌어야 할 작품이니 나 자신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볼 여유가 없었고, 에피소드가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였다.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색깔이라 위험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책임감이 컸던 것 같다.
박찬욱 감독과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 이어 <친절한 금자씨>도 함께 했다. 어떤 영향을 받았나?
모든 배우가 그렇겠지만 나 역시 다시 작업해보고 싶은 감독이다. 박찬욱 감독은 내가 모르는 내 디테일한 감정과 모습을 많이 알아준다. 함께 작업을 하면서 놀라운 순간이 많았다. 또 작품에 들어가면 데모 OST를 주는데, <친절한 금자씨> 때는 클래식을 주면서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음악이나 그림, 책을 통해 캐릭터에 다가갈 수 있도록 시도하는 방식이 놀라웠고 재미있었다. 이후엔 다른 작품을 할 때도 그런 방식으로 다가가려고 한다.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영화 <봄날은 간다>로 넘어가보자. 오랜 시간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고, ‘은수’(이영애 분)의 뒷모습이 담긴 엔딩 장면도 화제가 됐다.
원래 은수가 앞모습, ‘상우’(유지태 분)가 뒷모습으로 나오는 앵글이었는데, 반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은수의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보다 뒷모습이 더 여운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제안했다. 걸어가면서 끝까지 은수의 감정에 몰입했던 기억이 있다. 허진호 감독 스타일이 현장 감각과 분위기를 더 중시한다. 그래서 디테일한 장면이 현장에서 많이 나왔다.
극 중에서 은수가 상우와 악수할 때 손을 묘하게 비스듬히 내는 건 이유가 있나?
상우와 헤어지기 싫은 은수의 마음이었다. 그때는 ‘상우가 은수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현장에서 생겨난 감정이었다.
무엇보다도 <봄날은 간다>는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좋은 작품이지만 서서히 잊히는 작품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예능에서 지금껏 인용되는 걸 보면서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든 남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작품 한 작품이 더 소중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영애 배우만의 특유의 목소리와 어투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나?
20대 때는 내 목소리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앞만 보고 달렸다. 이후에 내 목소리 톤을 알게 됐다. 배우로서는 좀 빠르고 높고,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고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대학 전공이 연기가 아니기 때문에 대학원에 가서 공부도 하면서 나름대로 변화의 시기를 거쳐 지금의 목소리가 됐다. 역할에 맞게 톤을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14년 만에 영화 <나를 찾아줘>(2019)에 출연했다.
애틋한 작품일 듯싶다. 그사이 결혼과 출산을 겪었다. 그 시간은 배우로서 폭을 넓힐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2006년에 심사위원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갔을 때 심사위원장이 샬롯 램플링이라는 유명한 배우였다. 당시 나이가 50~60대 전후였는데, 내 고민을 얘기했더니 자신도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고 하더라. 동서를 막론한 지점이구나 싶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그 배우를 내 롤 모델로 삼았다. 결혼과 육아를 겪으면서 긴 시간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결코 배우에겐 죽은 시간이 아닌, 자양분이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또한 다양한 결의 감정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만난 작품이 <나를 찾아줘>였다. 특히 <친절한 금자씨>를 같이 했던 미술·의상·분장 감독 모두가 나를 환영한다는 의미로 참여해준 작품이라 더 의미가 크다.
<친절한 금자씨> <구경이> 등 새로운 도전을 한 바 있는데, 앞으로 배우로서 또 개인으로서 어떤 도전을 할지 궁금하다.
하고 싶은 게 많다. <구경이>를 하면서 다양한 장르에 눈을 떴다. 액션도 살짝 해봤더니 재미있더라. 코미디 연기도 증폭해서 하고 싶다.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덧붙이자면 윤여정 선생님처럼 ‘오스카’를 탈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웃음) 앞일은 모르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엄마, 아내로서 균형감을 찾는 게 중요하더라. 그 부분을 늘 기도한다. 그게 목표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이영애만의 방법도 궁금하다.
<구경이>를 예로 들자면, 처음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괴리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독님과 제작자에게 날 선택한 이유를 들었고, 그런 다음에 의상, 헤어 등 외형적인 모습부터 접근하면서 계속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했다.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고, 구경이는 어떤 색깔일까 대입해봤다. 색깔로도 접근해봤고, 음악이나 미술로도 접근해봤다. 행동 디테일까지 상상하며 촉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새롭고 재미있었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어느 정도인가?
날이 갈수록 직업에 대한 감사함을 더 느낀다. 어떻게 보면 배우는 이기적인 직업이다. 결국 자기만족이다. 자기가 만족하고 자기가 좋아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 ‘관객이 뭘 좋아할까’, ‘광고는 이런 것만 찍어야 좋아할 거야’를 먼저 생각하는 순간, 직업적으로는 후퇴하게 되는 것 같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만족감은 배가된다.
이영애가 생각하는 연기란 무엇인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다가가는 작업.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나. 사람에 대해 알고 또 보듬어주고 다시 돌아보게끔 하는 게 연기인 것 같다. 사회를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보는, 나에게는 그런 작업이었으면 좋겠다.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닌 소통하는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전해달라.
오늘 이 자리가 솔직히 많이 떨렸다. 자리가 비어 있으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채워준 소중한 한 분 한 분과 눈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여러분에게 어떤 배우로 생각되는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여러분 곁에 오래 남을 수 있는 따뜻한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공백이 있더라도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말고 반가워해주면 좋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노력하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