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 후 △직원들과의 스킨십 강화 △해외시장 공략 및 투자 확대 △2030 부산세계박람회 특사 등 신출귀몰하다시피 경영 최전선을 뛰고 있다. 오는 11월에는 부회장 직함을 떼고 10년 만에 회장으로 승진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본격적인 ‘이재용의 삼성 시대’를 선언하려 한다는 전망도 나온다.
사면 복권이 뭐길래, 광폭 행보 시작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해외 출국 등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면서 연일 계열사 사업장을 찾고, 직원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사면 복권 후 삼성전자 기흥·화성캠퍼스, 수원사업장, 삼성엔지니어링, 삼성SDS 잠실캠퍼스 등을 잇달아 방문하며 직원들과의 스킨십을 늘려왔다. 사내 식당을 찾아 직원들과 사진을 찍거나 직원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는 등 친화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지난 8월 30일에는 삼성SDS 잠실캠퍼스를 방문해 경영진과 중장기 사업 전략을 논의한 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 직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는 해외로 바삐 움직였다. 통상적으로 이재용 부회장은 명절 연휴마다 해외 사업장을 방문하거나 현지에서 글로벌 네트워크를 다지곤 했다. 이번에는 멕시코였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인 9월 6일 멕시코로 날아가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을 만났다. 이후 삼성의 현지 사업장들을 챙겼다. 9월 9일과 10일에는 삼성전자 케레타로 가전 공장과 삼성엔지니어링 도스보카스 정유 공장 건설 현장을 각각 방문해 사업 진행 현황을 점검하고 임직원들을 격려했다.
삼성 계열사들도 이재용 부회장의 행보에 발맞춰 ‘상생 경영’에 나섰다.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기, 삼성SDI, 삼성SDS, 삼성물산 등 11개 계열사는 추석을 앞두고 협력사에 물품 대금 2조 1,000억원을 최대 열흘 앞당겨 결제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8,000억원보다 1조 3,000억원 늘어난 규모다.
복권의 보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재용 부회장은 폭넓은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지원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그동안 가석방 상태로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삼성 임원들에게 끊임없이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독려했던 이 부회장은 최근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대통령 특사에 임명됐다. 본격적인 유치 홍보전에 이 부회장이 뛰어든 것은 당연하다. 이 부회장은 9월 8일(현지 시간)에는 멕시코 대통령을 만나 2030년 세계박람회가 부산에서 열릴 수 있도록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고, 9월 13일(현지 시간)에는 파나마시티에 위치한 대통령 궁에서 라우렌티노 코르티소 파나마 대통령을 만나 부산 유치를 호소했다. 이 부회장은 아버지 고 이건희 회장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서 성과를 냈던 것처럼 2030 부산세계박람회를 유치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후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다른 대기업 모두 여러 국가를 상대로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에 나서고 있지만 삼성이 가장 적극적으로, 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이재용 부회장이 그동안에는 대외적으로 나서지 못한 상태로 부산세계박람회 홍보를 했다면, 복권된 후에는 공식적인 자리를 최대한 활용해 부산세계박람회 홍보를 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재용 부회장이 가진 해외 네트워크는 다른 재계 총수들과는 격이 다르다”며 “이 부회장이 다양한 해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직접 뛴다면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회장 승진’ 코앞, ‘뉴비전’ 제안할까?
조금씩 ‘이재용의 삼성 시대’가 오고 있다는 풀이가 나온다. 이 부회장은 고 이건희 회장의 건강이 악화된 2014년 이후 사실상 총수 역할을 하며 기업을 이끌어왔지만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리더십을 보여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 등에서는 국내 1위 기업, 삼성그룹의 리더십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익명의 경제 단체 관계자는 “삼성그룹이 몇 차례 검찰 수사를 받은 뒤 재계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생겼고, 그 후 삼성이 아닌 재계 오너들이 돌아가며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대표성이 약한 부분이 있다”며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그룹 내에서뿐만 아니라 재계를 대표하는 제대로 된 직함과 함께 경영 활동에도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10년째 부회장 타이틀로 경영 행보를 보여온 이재용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관측이 기정사실화된 분위기다. 다만 시기를 조율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1968년생으로 올해 54살인 이 부회장은 2012년 12월 44살에 부회장으로 승진한 뒤, 계속 같은 보직에서 그룹을 이끌어오고 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87년 12월 45살에 회장에 오른 점이나 최근 복권돼 경영 일선에 이름을 올릴 부담이 줄어든 점 등도 관측에 힘을 보탠다.
앞선 경제 단체 관계자는 “최근 이 부회장이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태어난 세대)와의 스킨십을 강화하고 해외 계열사 일선을 둘러보는 것은 ‘이재용의 삼성 시대’를 제안하기 위한 사전 작업 아니겠냐”고 풀이했다.
실제로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미래전략실을 대체할 그룹 컨트롤타워 부활’ 가능성이 거론된다. 삼성그룹은 과거 미래전략실이라는 컨트롤타워를 통해 그룹사 전반에 대한 총괄적인 조정을 해왔지만 2017년 3월, 국정농단 사건에 미래전략실이 수사 대상이 되면서 이를 해체한 바 있다.
이후 삼성전자 등 제조업, 삼성생명 등 금융업 분야별로 전담 조직(TF)을 운영했지만 거대한 삼성그룹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컨트롤타워의 부활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된 바 있다. 이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리더십’을 보여줄 컨트롤타워를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대목이다.
아버지 이건희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이재용의 삼성에 걸맞은 새로운 경영 철학 메시지를 낼 가능성이 점쳐진다. 올해는 고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을 선언한 지 30년째다. 고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7일 임원과 해외 주재원 등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급히 부른 자리에서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며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지시했다. 신경영 선포는 기업인들에게 늘 유의미한 메시지라고 하지만, 이재용의 삼성 시대를 보여주기 위한 ‘뉴삼성 메시지’가 필요한 이유다.
실제로 이재용 부회장은 2020년 12월,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결심공판 최후진술에서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뜻의 ‘승어부(勝於父)’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국격에 맞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어 아버님께 효도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부회장은 복권 전부터 인공지능(AI), 5G, 바이오 등 미래 산업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를 지시했으며, 동시에 준법 감시 및 통제 기능 강화를 위해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했다. 또 삼성의 오랜 기치였던 무노조 경영을 과감히 폐지하고 창사 53년 만에 노조와 첫 임금협약 체결식을 갖기도 했다.
아버지 이건희 회장을 뛰어넘는 이재용의 ‘뉴삼성’을 대표하는 경영 철학에 기업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앞선 재계 관계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조차도 삼성이 어떤 결정을 하면 ‘왜 했을까?’ 하면서 벤치마킹을 시도하려 한다”며 “그런 삼성이 혼신의 고민을 담아 내놓을 이재용 삼성 시대의 철학이 궁금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