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으로 데뷔한 이정재는 연기자로서의 경험을 살려 <헌트> 촬영 현장을 디테일하게 진두지휘했다.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그는 촬영, 조명, 미술, 무술 등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파트에 대해 끝없이 고민했다는 후문이다. “배우들과 사전 리허설을 하면서 불편한 부분을 수정했고, 어떤 부분은 이겨내주기를 설득했다”는 그는 현장에서 배우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영화의 작품성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은 지켜내는 과정을 통해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예고했다.
이정재는 주연배우로서도 맹활약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조직 내에 침입한 스파이로 인해 주요한 작전이 실패하자 그 실체를 맹렬하게 쫓는 안기부 요원 ‘박평호’다.
이정재는 1993년 드라마 <공룡선생>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한 후 드라마 <모래시계>(1995)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단번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영화 <태양은 없다>까지 성공하며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장악한 그는 이후 30년간 톱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근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전 세계를 매료시키고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키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후회도 미련도 없이 다 쏟아부었다”
감독으로 대중을 만난다. 어떤가?
긴장된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과 역량을 다 쏟아부어 아쉬움은 없다. 더 이상 내 머릿속에서 나올 게 없다. 관객들이 어떻게 봐줄지 궁금하다.
시사회 때 반응이 좋았다.
앞서 지난 5월 19일 칸영화제에 초청돼 최초로 공개된 바 있다. 당시엔 로컬 색이 짙다는 반응이 꽤 있었다. 198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 분위기를 모르는 해외 관객들이니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각색을 시작하며 이해도를 높이는 작업을 했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나쁘지 않다.
K-콘텐츠가 해외에서 세일즈가 잘되는 시기다. 다양한 나라에서 찾고 있다. 기존에 선보인 K-콘텐츠들이 해외에서 각광받는 상황이라 <헌트>도 덕을 본 것 같다.
영화를 찍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애초 <남산>이라는 가제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러나 상업 영화 형식으로 시나리오를 각색할 감독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내가 시나리오를 고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주제가 바뀌고 인물 관계도가 바뀌었다. 연인 관계가 있었는데 없앴고, 인물들의 목표 등등을 수정했다. 원톱 주연에서 ‘박평호’(이정재 분)와 ‘김정도’(정우성 분)의 투톱 이야기로 각색했고, 결국 <헌트>라는 제목으로 바뀌게 됐다. 투톱이라 동등하게 이야기를 각색하는 것도 힘든 작업이었다.(웃음)
처음에 영화 <비트> <태양은 없다>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에게 연출을 부탁했다고 들었다.
김성수 감독이 찍어줬으면 제일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내가 이 고생을 안 했어도 됐다.(웃음) 어제도 만나자마자 “형이 좀 찍어줬으면 내가 이 고생을 안 했잖아!”라고 하소연했다. 말한 것처럼 김성수 감독이 <태양은 없다>를 연출한 분 아닌가. <태양은 없다> 이후 정우성 씨와 내가 처음으로 함께하는 작품이다 보니 김 감독이 연출하면 의미가 크지 않나 싶었다. 당연히 제안했고, 김 감독은 시간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안 해주셨다.(웃음) 기사화되지는 않았으나 김성수 감독뿐만 아니라 수많은 감독에게 부탁했다. 대한민국 톱 20위 안에 들어가는 감독에게 모두 SOS를 보냈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웃음)
결국 연출도 연기도 다 해냈다.
뿌듯함보다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구나 싶었다.(웃음)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다. 모든 걸 다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는 성격이다 보니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잠을 못 자는 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 연기와 연출을 다 하다 보니 체력이 많이 부족했다.
연기자와 감독, 느끼는 희열이 다를 것 같다.
사실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영화는 공동 작업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재미는 있더라. 연기만 해온 터라 후반 작업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사운드 믹싱, 음악 작업, 색 보정까지 하다 보니 새롭고 흥미로웠다.
오랜 친구 정우성 씨가 주연을 맡았다.
정우성 씨는 워낙 잘생기고 멋진 사람이다. 그 얼굴이 어디 가겠나. 누가 찍어도 멋있게 나온다. 그럼에도 그 캐릭터가 가진 생각이나 행동이 멋있어야 더 멋있게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캐릭터의 신념, 목적들이 건강해 보여야 한다. 어떻게 하면 정우성 씨의 생각과 마음이 멋있게 보일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배경을 1980년대로 잡은 이유도 궁금하다. 짐작컨대 배우 출신 감독 중에서는 가장 스케일이 큰 영화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 미술 작가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분이 “결국 작품을 하는 데 있어 소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소재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말인데 그 말이 기억에 남았다. 물론 1980년대라는 배경에 부담을 느꼈다. 현대로 바꿀까 하는 생각도 했다. 결국 주제를 잡아가는 데 오래 걸렸다. ‘우리가 왜 이렇게 반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갈등할까?’ 그와 관련된 뉴스를 접하다 보면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념 전쟁이 치열했던 때가 1980년대 아닌가. 그래서 과감하게 1980년대로 배경을 잡았다. 그 때문에 제작 비용이 많이 들었다. 고맙게도 신인 감독임에도 많은 제작비를 허락해주셨다.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오징어 게임> 이후에 개봉하는 영화다. 하필 연출작이다. 부담은 없었나?
<오징어 게임> 때문에 부담이 됐다기보다는, 내가 그래도 한 30년 연기 생활을 잘하고 있지 않았나. 굳이 이 작품을 해서 내 커리어를 망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는 여러분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웃음) 시나리오를 쓰면 쓸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고생을 했다. 이렇게 공정 과정이 복잡하고 많은지 몰랐다. 그것을 스케줄 안에서 잘해내야 한다는 연출자로서의 압박감이 이 정도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만나는 감독님들에게 “시키는 대로 다 잘하겠다”고 말하고 있다.(웃음)
연출 스타일 등에서 영향을 받은 감독은 누군가?
배창호·김성수·이재용·장재현·황동혁 감독 등등 너무 많다.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미국 일정은 어떻게 되나?
미팅도 하고 시사회도 하고 간담회도 해야 한다. 그런데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다. 시차가 있어서 주로 새벽에 진행된다. 피곤해 죽을 지경이다.(웃음) 어제 뒤풀이인데도 술 한잔 안 마시고 얘기만 하다가 왔다. 미국은 콘텐츠 비즈니스의 규모가 크다 보니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한다.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기쁘다.
VIP 시사회 때 유재석 씨가 참석했다. 영화 시사회에서 유재석 씨를 본 적이 드물다.
유재석 씨를 한 번도 내 영화 시사회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 친하면 친할수록 부탁하는 게 부담스럽다. 언젠가 시상식에서 만났을 때 근황을 물을 기회가 있었는데 <헌트> 얘기를 듣더니 시사회가 언제냐고 먼저 묻더라. 유재석 씨가 진짜 왔다.
어쨌든 각색부터 후반 작업까지 길고 긴 여정을 끝냈다.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나?
많은 분이 정우성과 이정재가 나오는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 같다. 실제로 그런 리뷰가 많았고, 그래서 더 좋았다. 얼마 전에 정우성 씨와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우리가 허투루 살진 않았구나”라는 얘기를 지나가듯 했다. 그동안 배우로서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작품을 선택하는 데 고민을 많이 해왔다. 좋은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어서다. 결국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달된 것 같아 기쁘다.
감독으로서 다음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건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없다고 말한다. 자꾸 말하게 되는데 <헌트>를 찍으며 너무 힘들었다.(웃음) 행여 이 영화가 대박이 난다 해도 현재는 힘들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하지만 또 어떤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면, 그래서 그 시나리오가 완성도 있게 나온다면 연출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