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이사를 준비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에어컨 구입이었다. 풀 옵션 원룸에서 살다가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등 옵션이 거의 없는 집으로 이사하기에 가전제품을 구매해야 했다.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겨울나기를 위한 전기장판은 없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무더운 여름밤은 견디기 어렵다. 에어컨을 작동시켜 습한 방 안 공기를 시원하고 쾌적하게 만든 후에도 더워서 한번 뒤척이고 나면 잠이 쉽게 들지 않는다. 그럴 때면 에어컨 온도를 20℃로 낮추고 터보 기능으로 에어컨 바람을 세게 튼 뒤 구스 이불을 덮는 호사를 누리곤 한다. 이렇게 하면 시원하면서도 구스 이불 때문에 덥지 않고 포근한 느낌이 들어 금세 잠이 든다(구스는 더울 땐 시원하고, 추울 땐 보온 기능이 뛰어나 사계절 이용해도 좋은 이불 충전재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눈이 말똥말똥한 채로 잠들 기미가 전혀 없으면 비장의 무기, ASMR 영상을 켠다.
뒷북이어도 한참 뒷북이지만 ASMR을 본격적으로 시청하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원체 남들보다 한발 늦게 유행에 빠져드는 타입이라 드라마, 영화, 가요는 물론이고 전시나 핫 플레이스도 사람들이 열광할 때는 조용히 있다가 유행이 다 끝날 무렵에 본격적으로 찾아본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아마 남들이 다 좋다고 추켜세우는 것에 대한 의심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은 다 똑같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건 진짜 좋은 것이고, 싫어하는 것은 나도 똑같이 싫어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몇 년 전, 한참 ASMR이 유행하며 온 매체를 뒤덮고 있던 때도 솔직히 ‘아니, 저게 대체 뭐가 좋다는 거지?’라며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초등학생 유튜버 띠예의 바다포도 ASMR 먹방 영상 정도만 봤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어김없이 자기 전에 누워 유튜브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한참 예능 영상 클립이나 브이로그 등을 보고 있었는데 알고리즘에 의해 뜬금없이 ASMR 영상이 저절로 재생됐다. 그 영상은 ASMR 중에서도 ‘찐’이었다. 피부 관리 숍 콘셉트인데 영상을 보면 내가 실제로 피부 관리를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ASMR 소리가 입체적이고 다양해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ASMR과는 확실히 달랐다. 토너가 병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화장솜으로 피부를 닦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포장지 소리 등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소리가 새삼 아름다운 자장가처럼 들렸다. 어느새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고, 눈을 뜨니 아침이었을 정도로 깊이 자고 일어났다. 그 이후로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유튜브에서 ASMR을 검색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수십 번 시도해본 결과 효과가 상당했다.
수시로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그쳤다 하는 걸 보니 올여름도 쉽게 넘어가진 않을 것 같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밤이 두렵기도 하지만 에어컨, ASMR 영상과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봤던 걸 또 봐도 지겹지 않고, 무엇보다 유튜브에는 다양한 ASMR 영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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