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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다 보면 희망이 생겨요”
공인의 아내로 좋은 일이든 기쁜 일이든 대중에게 공개되는 삶을 살았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죽을 만큼 힘든 상황도, 미치게 좋은 순간도 다 지나간다는 거예요. 영원한 건 없어요. 결국 버티다 보면 희망이 생기고 또 그렇게 살아가게 되더라고요. 언젠가 저희 가족에게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남편이 산에 들어가 2년 정도 혼자 지냈어요. 가정에도 위기가 찾아왔지요. 결국 남편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그때의 고통은 영원할 것 같았어요. 헌데 이렇게 10여 년이 흘렀어요. 과거의 남편은 어쩌면 결혼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오늘날의 남편은 이보다 훌륭한 파트너가 없지요. 부부관계는 나무를 심는 것과 같아요. 서로 신뢰를 주는 시간이 필요해요. 결혼은 나를 대접해줄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내 품으로 들어올 사람을 찾는 것 같아요. 삶을 대하는 자세와 관점이 중요해요. 기가 막힌 경험을 했다 해도 더 기막힌 예상치 못한 상황을 겪게 돼요. 나이가 들어도 인생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죠. 살아가는 건 그 훈련을 받는 과정이에요. 아무리 인생을 오래 살아도 절대 도착하지 못하는 경지가 있다는 걸, 그래서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끼는 나날입니다. 작가 겸 방송인 강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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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치열했던 순간을 떠올려요”
제게 ‘연기’는 ‘좋아하는 것’ 이상이에요. 열정이고, 애정이고, 애증이고, 삶의 전부죠. 계원여고에 합격하면서부터 제 인생은 빛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이죠. 단순히 ‘연극영화과’라는 이름이 좋아서 시작한 건데 그 시작이 제 운명을 바꿔놓았어요. 종종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고교 시절의 초심을 떠올리면서 힘을 얻곤 해요. 살면서 부딪히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게 ‘기억’인 것 같아요. 힘든 일이 있을 때 기억 속 가장 치열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는 거예요. 그 시절의 저는 조금은 바보 같고 어수룩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죠. 그때를 생각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되더라고요. 배우 신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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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평화를 얻었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살아온 세월과 비례해요. 어릴 때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죠. 그래서 나이가 드는 게 슬프지 않아요. 50대의 김완선은 한평생 꿈꿔왔던 자유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대중의 반응과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던 젊은 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연한 마음으로 무대에 서고, 사람들을 대해요. 그래서인지 삶이 즐거워요. 최근에는 유튜브 <김완선TV>를 통해 여행을 기록하고 있어요. 한창 활동하던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해외에 나갔지만,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거든요. 지금은 훌쩍 떠나 오롯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콘텐츠까지 만들어요. 크고 작은 제약으로 미뤄둔 일을 하나씩 해내는 지금의 제 삶을 ‘자유’라고 명명하고 싶어요. 제게도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시기가 있었고, 포기하고 싶은 날이 있었어요. 하지만 살다 보면 다 지나가더라고요.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었지만, 그 끝에 지금의 평화를 얻게 됐어요.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들어요. 하지만 분명 그 고달픔은 과거가 됩니다. 가수 김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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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이면 추억이 됩니다”
첫 사법시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어요. 25살이었는데 상실감에 휩싸여 인생을 비관했어요. 가능성이 무한한 나이인데 말이죠. 그때 사법시험 결과를 받자마자 독일로 혼자 여행을 떠났어요. 현지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세상을 만났죠. 읽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었던 시간이에요. 여행을 떠나 처음으로 스스로와 대화를 나눴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바라는 인생 등 나 자신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면서 내면을 채워나갔죠. 덕분에 다음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인생을 돌아봤을 때 작은 조각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인생에서 자양분 역할을 해요. “공들이면 추억이 된다”는 문장을 믿어요. 그래서 매 순간을 공들이려고 해요. 25살, 실패와 불안감으로 지쳤던 시기지만 그 시간을 건강하고 씩씩하게 이겨준 저에게 고마워요. 변호사 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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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20년 버틴 거 아시죠?”
TV조선 예능 <미스트롯>에 도전하던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소속사가 없었기 때문에 제가 출연할 수 있는 방송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전부였어요. 이미 꽤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했던지라 조금 지쳐 있었죠. 그래서 <미스트롯> 출연 제안을 거절했어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무대 콘셉트를 구상하는 자신을 보며 아직 열정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 오디션이라는 생각으로 출연을 결심했고, 6위라는 성과를 얻었죠. 언젠가 제 지난날을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참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는데 얇은 창호지 한 장을 못 뚫고 나온 느낌이었어요. 불안했던 시기였죠. 길어지는 무명 가수 생활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버텼다’는 표현이 딱 맞아요. 유도에서도 버티기를 잘하면 승점이 있죠? 오래 버티며 승점을 쌓았더니 요즘은 저를 알아보는 분들이 있네요. 버티기 잘했으니 이제 굳히기, 그리고 한판승을 해보려고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세요. 언젠가는 빛이 되어 돌아올 겁니다. 저 20년 버틴 거 아시죠? 무조건 됩니다! 트로트 가수 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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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 없이 예술을 사랑했던 시절”
어느 날 20대 초반에 모아둔 연극 티켓들을 발견했어요.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순수하게 무언가를 사랑했던 그 시절을 되돌아봤죠. 20살에 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문화생활에 푹 빠졌어요. 일주일의 절반 이상 대학로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서울 시내에 있는 독립영화관에서 영화를 봤어요. 당시에는 배우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어요. 아무 사심 없이 예술 작품들을 사랑했죠.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진득하게 주기만 하는 첫사랑 같은 존재였어요. 그런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배우가 됐어요. 누구나 살면서 때때로 높은 벽에 부딪히고, 부대낄 만한 일을 겪어요. 저는 그럴 때면 연극과 영화를 진득하게 사랑했던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해요. 그러면 마음이 괜찮아져요. 배우 옥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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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힘으로 사유하는 사람”
30대 후반에 방송 체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방송작가였던 친구의 추천으로 방송국 리포터로 활동했는데 카타르시스를 느꼈죠. 하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엔 늦었다는 생각 때문에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겨둔 채 살았어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가끔씩 공허함이 밀려들었죠. 그리고 기적처럼 시니어 모델이라는 기회를 얻게 됐어요. 70대에 새로운 직업이 생길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이로써 평생 이루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꿈을 이뤘어요. 오롯이 제 인생에 집중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찾아온 기회여서 더없이 귀해요. 한 남자의 아내, 한 집안의 며느리,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왔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이랄까요? 이젠 사람 윤영주로 살아갈 때라고 생각해요. 요즘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을 체감하고 있어요. 배움을 멈추는 순간 초라한 존재가 될 거 같아요. 단순히 재미있게 사는 것도 좋지만, 끝까지 내 힘으로 사유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시니어 모델 윤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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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큰 나무도 처음엔 씨앗이었듯이”
예전에 ‘사모님’이라 불리는 우아한 여성이 병원을 찾아왔어요. 성심성의껏 상담하고 있는데 갑자기 “실장님이 부러워요. 제가 한심하게 느껴져요” 하는 거예요. “네?” 하고 반문했더니 제가 제 일을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곰곰이 생각해봤죠. ‘세상 다 가진 사모님들이 왜 나를 부러워하지?’ 저도 몰랐는데 정말 제가 제 일을 사랑하고 있더라고요.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열정적으로 했을 때 그 일이 어떤 일이든 멋지게 보인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부터 제가 저를 더 인정해주기 시작했고,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도 생겼어요. 그럴수록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의학 공부도 이어갔어요. 심리와 관상 공부도 계속했고요. 그렇게 20년이 흘러 엄청난 고객 리스트를 가지게 됐어요. MZ세대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저는 한 가지 직업을 오래 가지라고 말해요. 적어도 10년은 해봐야 그 직업에 대해 조언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크나큰 나무로 처음엔 씨앗이었던 것처럼 오랜 시간 인내의 과정이 필요한 거죠. 성형외과 상담 부원장 김세진(더멘토성형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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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순간을 빨리 정리하는 태도”
제게 무수한 성장통을 겪게 했던, 그러면서도 딛고 일어서려고 했던 20대가 가장 찬란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다시 오지 않을 젊고 무모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요. 힘든 순간을 겪을 때마다 ‘할 수 있다’는 마인드를 가졌고, 지금은 그 기억을 벗 삼아 ‘과거에는 더 힘들었는데 이거 하나 못 할까’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먹어요. 헬스를 하면 근육통에 시달리듯이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 같아요. 행복한 순간은 오래, 깊게 느껴 힐링하고, 힘든 순간은 빨리 정리하는 삶의 태도를 갖게 됐어요. 지금 당장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언젠가는 올 그날을 고대하면서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메이크업 아티스트 우현증(우현증메르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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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를 맞아 누드 화보를 촬영했어요”
50대에 접어들고 누드 화보 촬영을 했어요. 어떻게 하면 당당히 50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누드 화보 촬영이 그중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었죠. 그 화보 촬영을 했던 날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남았어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는 최악의 시기였어요. 일이 잘 풀리지 않다 보니 인생을 비관하게 됐고, 언제 불행이 끝날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앞길이 캄캄했어요. 그런 시기를 겪어서인지 좋은 일이 생기면 작은 일이라도 감사하고 행복감을 느껴요. 힘든 순간이나 상황이 닥쳤을 때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도 않고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객관적으로 직면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 과정이 모이면 내면이 단단해질 거예요. 메이크업 아티스트 류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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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도우며 엉켜 사는 것”
디자이너들이 선망하는 유명 패션 회사에 입사했어요. 당시 패션 회사 디자인실에는 군기 잡는 분위기가 만연했어요. 그렇게 1년 반을 버텨내고 이직한 회사에서 니트 디자이너로 인정받으며 즐겁게 일했어요. 하지만 1998년, IMF 외환위기 여파로 회사가 부도를 맞아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돼 집에 누워 있는데, 거래처 공장 사장들과 대리점주들이 찾아와서 니트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때 아무 조건 없이 원단을 내주고 공장 한편을 내준 여러 지인의 도움으로 곧장 납품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제가 회사를 차렸다는 소문이 나자 전 직장 동료들이 발 벗고 나서서 일감을 몰아줬어요. 그때 삶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단 사실을 깨달았어요. 서로 도우며 사는 게 인생이고, 그게 인생의 참맛 아닐까요? 패션 디자이너 유명해(희원기획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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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던 순간”
29살에 저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어요. 독립을 가장한 가출이었죠.(웃음) 서른을 앞두고 감정이 요동쳤거든요. 20살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성인이 됐다면, 30살은 스스로 어른이 돼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친구들이 결혼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에게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죠. 독립하면서 제 인생에 책임감이 생겼어요. 독립 전에는 제 몫의 빨래와 청소를 대신 해주시는 부모님이 있었지만, 독립 후에는 양말 한 짝까지 제가 꼭 책임져야만 하는 일이었죠. 사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바가 컸어요. 이후 인생에서 제 힘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과 감당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찾아나갔어요. 무엇보다 감성에 젖고 싶을 땐 혼자 있는 집에서 마음껏 감정을 펼쳐놓았어요.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죠. 독립은 인생에서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었어요. 이전의 삶은 다소 수동적이었다면, 독립을 기점으로 주체적인 사람이 됐어요. 배우 이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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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내 인생을 살아주지 않아요, 그러니 웃으며 삽시다”
제 인생에서 하이라이트는 제가 태어난 날이 아닐까요? 김미려라는 사람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고, 덕분에 이렇게 즐겁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당시 5살, 3살이던 언니, 오빠는 진통하는 엄마를 보고 ‘할머니와 아빠가 엄마를 아프게 한다’고 생각했대요. 옛날에 쓰던 주황색 호스를 잘라 들고 와서는 엄마 아프게 하지 말라며 할머니를 때렸다고 해요. 그런 난리 통에 제가 태어난 거죠. 너무 웃긴 이야기인데 그래서 제가 남을 웃기는 직업을 가진 것 같기도 해요. 인생 살다가 힘들면 욕 한 번 시원하게 하고 털어버리세요. 한 번뿐인 인생, 재미있게 살아야죠.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아요. 기쁨도 슬픔도 모두 각자의 몫이죠. 소소하지만 웃는 일 많이 만들어갑시다. 개그우먼 김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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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의 엄마이기에 기쁨도 세 배입니다”
한창 육아를 하던 때가 떠오르네요. 갓난아이였던 쌍둥이 딸을 밤새 돌본 뒤 쪽잠을 청하려고 하면 첫째 아들의 등원 시간이 다가왔어요. 동시에 세 아이를 돌보는 일은 만만치 않았죠. 진한 커피를 사발에 부어 한약처럼 마시면서 쏟아지는 잠을 이겨냈어요.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에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소통하다 보니 감정이 맑아지고, 잊고 살았던 순수함을 되찾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게 됐죠. 아이들과 오랜 시간 행복하기 위해선 엄마인 제가 건강해야 하니까요. 제 몸을 신경 쓰다 보니 삶에 활력이 생겼어요. 어느덧 그 시간도 추억이 됐어요. 아이가 셋이라, 세 배 힘든 만큼 세 배의 기쁨이 있습니다.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유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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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고 싶을 때, 더 부딪히세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던 시절이 있었어요. 제가 배우로서 한창 입지를 다지던 1970~1980년대가 그랬죠. 당시 일면식도 없는 상대와 스캔들에 휩싸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20대의 나이로 감당하기엔 가혹한 일이었죠. 괜한 말로 오해를 살까 봐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상황이 악화되면 연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배우로서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시기였는데 겁이 나서 숨어버렸죠. 그 시간을 겪으며 성숙해졌어요. 제 삶을 책임질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피하고 싶을 땐 이를 악물고 더 부딪히세요.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제 경험에서 깨달았습니다. 이 나이가 되니 문득 강단 하나로 버텨낸 저 자신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는 게 그 보증수표겠죠? 배우 김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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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가 되고 버킷 리스트를 구체화했어요”
1996년 12월 28일, 첫째 딸 서령이를 낳으려고 진통할 때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던 20대 초반이었죠. 진통이 오다 말다 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간절했어요. ‘우리 엄마도 이렇게 날 낳았겠구나….’ 사실 그때 엄마와 사이가 안 좋은 상태라 친정 엄마 없이 출산했거든요.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엄마니까’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출산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그 모든 게 엄청난 희생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어느덧 엄마도 70대 중반의 나이가 되셨어요. 엄마의 가늘어진 다리와 구부정한 어깨를 볼 때마다 그때 생각이 많이 나요. 문득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시간이 아쉬워요. 못한 게 너무 많아요. 최근에 버킷 리스트를 구체화하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는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내의 호텔에 가보는 거예요. 제가 염려증이 있어 해외여행을 거의 못 가봤거든요. 하루 정도 그곳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최고급 식사를 하고 싶어요. 딸과 함께 왕비처럼 하루를 지내보고 싶네요. 소소하지만 찬란한 나의 버킷 리스트를 이뤄가는 중년이고 싶습니다. 배우 김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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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인생에는 단맛, 쓴맛, 짠맛, 신맛까지 다양한 맛이 존재해요. 행복한 순간이 있는가 하면 고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죠. 어린 시절의 저는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로 여겼어요. 그리고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제가 만들어놓은 완벽함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고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매 순간 예쁜 사람이었는데 그때는 몰랐어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겪었기에 지금의 김규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평소 고민이 많은 타입이에요. 고민이 생기면 건강을 해칠 정도로 끊임없이 파고들죠. 요즘은 의식적으로 머리와 마음을 비우려고 해요. 고민할 시간에 스스로를 더 예뻐해주기로 했죠. 또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되 지나간 시간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해요.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배우 김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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