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제외하고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필리핀이다. 가족들과 다 같이 처음으로 떠났던 해외여행지가 바로 필리핀 보라카이였으며, 다시 한번 더 가족끼리 여행하고 싶을 만큼 즐겁고 좋은 추억만 남아 의미가 깊다. 사실 나에게 필리핀이 특별한 진짜 이유는 학교 프로그램에 참가해 머물렀던 두 달간의 기억 때문이다. 이때 갔던 곳은 바기오 시티라는 곳인데, 수도인 마닐라와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 데다 세부, 보라카이 등 관광지로 유명한 곳과도 멀다. 어학연수를 목적으로 방문했기에 평일에는 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며 일상적인 생활을 했고, 주말이면 여자 대여섯 명이 뭉쳐 여행을 떠났다. 화려한 여행이라기보다는 마치 현지인이 된 것처럼 소박하게 구경을 다녔다. 덕분에 그 어떤 여행보다 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보라카이나 세부, 마닐라와 같이 한국인으로 북적이는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이 놀러 가는 스폿을 다니며 가이드북이나 블로그 등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힘으로 여행한다는 묘한 자부심을 느낀 것이다. 버스, 택시와 비슷한 필리핀의 대중교통수단인 지프니와 트라이시클까지 자유자재로 잡아타고 많이도 돌아다녔다.
힘든 기억은 오래 남기 때문인지 고생했던 여행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날은 친구들과 새벽같이 일어나 어학원 근처의 버스터미널로 가서 목적지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탔다. 현지인 승객도 별로 없이 거의 빈 채로 어느 벌판을 달리던 버스 속에서 마주한 일출은 우리나라에서 봤던 그 어떤 일출 장면보다 더 웅장하고 감동적이었다. 시작이 좋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버스에서 내려 다시 지프니로 갈아탔는데 운전사가 바가지를 씌우려고 한 것이다. 몇 번의 언쟁 끝에 결국 목적지까지 다 같이 하염없이 걸어갔다. 그렇게 힘겹게 도착한 우리의 목적지는 관광지라기보다는 현지인이 잠깐 바다를 보러 들르는 곳이었다. 한적했던 그곳에서 가까스로 하루 묵을 곳을 구했는데 벌레가 나와 난리가 났다. 숙소도 힘겹게 구했는데 식당이라고 제대로 있었겠는가. 근처 식당이 다 문을 닫은 탓에 재료를 사 와 참치 카나페를 만들어 먹었는데 그래도 모두 이상하게 맛있다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위험천만했던 순간도 있었다. 나름대로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는 날 밤, 지명을 헷갈려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다 같이 ‘멘붕’이 왔던 적도 있다. 다행히 연락이 닿은 어학원 선생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온전히 좋은 추억만 남은 곳도 있다. 현지인들이 101개의 섬이라고 불렀던 곳으로 기억하는데, 직접 통통배를 타고 섬 사이사이를 누비며 아름다운 풍경에 울컥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여행했던 열정과 패기는 어디 가고 지금은 이상하게 비행기를 타는 것조차 무서워졌다. 어릴 때는 여행하고 싶은 곳도 많았는데 어느새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문득 이 글을 마무리하며 이상하게 다시 마구잡이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피어난다. 더 세상이 무서워지기 전에 이제는 더 먼 곳으로 발길을 내디뎌봐야겠다.
- 정기구독
- 공지사항
- 편집팀 기사문의 | 광고 제휴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