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서울은 빠르다. 오늘과 다른 내일이 기다린다. 그리고 그것을 ‘트렌드’라고 표현한다. 트렌드로 명명된 것들이 주는 피로함이 목 끝까지 찼다. 걷고 싶었고, 걷다가 맘 편히 쉬고 싶었다. 그때 내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넋을 잃고도 싶었다. 지금 내게 천국이 있다면, 그곳이 아니겠는가.
발이 땅에 닿지 않았던 그 시절, 나는 홀연히 체코로 떠났다. 여유롭게 사는 자들과 뒤섞이고 싶었다. 오래된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체코인들의 미적 감각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맛있다는 체코 맥주 한 잔 놓고 세월아 네월아 음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괴테와 베토벤, 카프카가 사랑했던 곳 아닌가!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도착했다. 짐을 풀기도 전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카를교를 배경으로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지상에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와 프라하성을 연결하는 카를교는 저녁노을이 질 무렵에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다. 이 아름다운 다리가 과거엔 ‘돌다리’로 불렸다니 시간의 힘은 이렇게나 대단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형형색색 건축물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골목 구석구석 들어선 카페에선 낭만과 여유가 느껴진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곳은, 바로 체코다.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900년에 걸쳐 완성된 프라하성의 웅장함과 섬세함, 아름다움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스친다. 내려오는 길 끝에 보이는 아름다운 성당이 발길을 잡는다. 미사를 드리는 무리에 섞여 기도를 해본다. 여행자들의 기도는 순간에 충실하다. ‘삶은 여행이고 싶어라.’ 낯선 곳에서 나를 찾는 시간, 누구나 꿈꾸는 여행 아닌가.
체코의 외곽 도시, 마리안스케라즈네도 잊을 수 없다. 쇼팽과 바그너, 브람스, 카프카, 괴테, 처칠이 사랑한 이 마을. 걷다 보면 위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괴테는 이곳에서 마지막 사랑을 불태웠다. 노년의 괴테는 휴양차 이곳에 왔다가 자신보다 55살이나 어린 17살 소녀 울리케를 사랑하게 돼 이후 3년간 이 도시를 찾으며 열렬히 구애한다. 주변의 반대에도 괴테는 “제발 이 성냥 한 개비가 타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하지만 결국 그 사랑은 이뤄지지 못했다(전해지는 얘기로는 소녀도 괴테를 마음에 품고 있었으나, 소녀의 어머니가 괴테를 짝사랑했다는…). 실연의 아픔으로 괴테는 한 줄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 문학사에 길이 빛날 명작 <마리엔바트의 비가>다.
체코 여행을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호텔 샤토 므첼리를 경험하고 싶어서다.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 휴양지 1001>의 저자 리사 폴렌은 이런 말을 남겼다. “샤토에서는 17세기 신고전주의적 로맨틱함이 배어 나오며, 위풍당당한 하얀 파사드 뒤로 정교하게 장식한 실내, 그러니까 반짝이는 샹들리에, 호화로운 패브릭, 길고 구부러진 층계를 자랑한다.” 샤토의 자태가 상상되는지…. 하지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샤토 옥상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 호텔’에서 보는 하늘이다. 혼란의 그 시절, 체코는 내게 혼란 속의 낭만을 주었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던 밤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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