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총선 비례대표 투표 결과, 첫 여성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김예지(43세) 의원이었다. 그는 지난 2020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의 비례 전문 정당 미래한국당의 영입 인재 1호로,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는 한 정치인의 장애인 비하 발언에 “선천적 장애인이 결코 의지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일갈하며 정계에 데뷔했다.
김예지 의원은 국회에 들어서면서부터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의 안내견 조이와 함께 한 것이 이유. 결과적으로 조이는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 본회의장에 입성한 개가 됐다. 첫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인 정화원 전 한나라당 의원 또한 안내견과 함께 본 회의장에 들어서려고 시도했으나 국회가 안내견의 출입을 막아 불발된 바 있다. 최근 김예지 의원은 또 한 번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지난 3월 28일 장애인 이동권을 주장하는 활동가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벌인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승강장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 화제를 모았다. 그동안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아 장애인과 비장애인 시민 모두가 불편해진 상황에 대한 사과였다.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적 관심을 통한 인식의 변화예요. 장애인이라서 특혜를 누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최대 다수가 아니라서 배제됐던 이들의 기본권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의가 필요한 때입니다.
장애인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의원
전장연 시위 현장을 찾아 무릎을 꿇었던 당시의 상황, 감정이 궁금합니다.
정확히 짚고 갈 것은 전장연이라는 한 단체에 한 사과 혹은 누구를 대신해 한 사과가 아닙니다. 그동안 장애인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외면한 정치권의 한 사람으로서 장애인들과, 시위로 열차 지연 등 불편을 겪은 비장애인 시민까지 모두에게 하는 사과였어요. 정치인으로서 온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어쩌면 제가 받고 싶었던 사과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장애인의 이동권이 시위의 주제였습니다.
이동권은 장애인들이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에요. 장애인들은 늘 비장애인이라면 걱정하지 않는 권리를 누리기 위해 고민하고 있어요. 밖에 나갈 때마다 어디로 가서 몇 번 버스를 어떻게 탈지, 지하철을 탈지 혹은 택시를 탈지 고민해요. 저처럼 시각장애인인 경우엔 내가 그 버스에 오를 수 있을지도 고민거리 중 하나죠. 실제로 저는 지하철역에서 승강장과 열차 간 간격이 넓어 신발을 잃어버린 적도 있어요. 지인 중엔 철로 위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돼 중복 장애를 갖게 된 분도 있죠. 이동권은 이동의 문제를 넘어 안전과 직결되고 모두가 평등하게 누려야 할 기본 권리 중 하나예요.
해외에서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어떻게 보장하나요?
미국은 이미 1990년에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서 모든 버스가 저상형 버스로 바뀌었어요. 영국은 평등법을 기준으로 2020년 기준 99%가 저상버스로 바뀌었고요. 독일엔 2013년에 관련 법안이 마련됐죠. 해외에서는 이미 정착한 상황이에요.
도로교통법 속 장애인 법률 용어 정비 법안을 발의하는 등 장애인을 대변한 법안을 주로 발의해요. 어떤 것을 가장 바꾸고 싶나요?
모든 것이요. 국가의 정책 방향이 중요하고 그에 따른 예산 집행도 이뤄져야 해요. 그런데 사실 정책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에요.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적 관심을 통한 인식의 변화예요. 장애인이라서 특혜를 누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최대 다수가 아니여서 배제됐던 이들의 기본권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 지에 대한 협의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요.
구체적인 사례가 궁금해요.
예를 들어 이동권은 물리적인 것과 정보적인 것으로 나뉘어요. 저상버스가 물리적 이동권이라면 몇번 버스인지가 정보적 이동권이죠. 단순히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도입된다고 해서 이동권이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또 모든 장애의 유형이 달라요. 시각장애, 청각장애, 발달장애 등 장애의 범주를 디테일하게 나눠 해결 방안을 모색했을 때 비로소 모든 장애인에게 이동권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죠. 우리나라 등록 장애인 수가 263만 명 정도 되는데, 일각에선 외국에 비해 장애인 수가 적다고 해요. 비장애인 눈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으니까 더욱 그렇게 느끼죠. 그런데 음지에 있는 장애인을 더하면 알려진 수보다 더 많은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 있어요. 그만큼 장애인이 지역사회에 통합돼 살지 못하는 거죠.
궁극적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함께 사는 사회가 돼야 하는군요.
흔히 장애인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매번 도와줄 수 있겠어요. 바쁠 수도 있고,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요. 그렇다면 같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죠. 정치권에도 이를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돼야해요. 법안 개정도 중요한데 많은 이들이 공감하지 않으면 개정 안이 통과되기 어렵고, 통과돼도 집행 과정에서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아요. 장애인의 일상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 선행돼야 변화가 생길 수 있어요.
국회에 입성한 ‘국민 개’ 조이
보통 안내견은 2살 때 시각장애인을 만나 6년 정도 안내견으로서 활동한 뒤 은퇴한다. 그 이후엔 보통의 반려견처럼 여생을 보낸다. 김예지 의원은 2000년 삼성화재안내견학교를 통해 안내견 ‘창조’를 만난 뒤 20년간 안내견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두 번째 안내견 ‘찬미’와는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 유학을 함께 떠났고, 2018년 지금의 안내견 조이를 만나 국회를 오가고 있다.
의원님 덕분에 안내견에 대한 인식이 더 높아졌습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안내견 홍보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국회에 들어서면서 널리 알려졌죠.
조이는 의원님에게 세 번째 안내견이에요. 조이는 어떤 안내견인 가요?
사람을 좋아하고 관심받는 걸 좋아해요. 얼마 전 여의도벚꽃축제에 방문했는데 많은 분이 조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니까 냉큼 가서 자리를 잡더라고요.
별명은 비례대표 0번이죠.
보통 안내견을 떠올리면 무조건 복종을 생각하는데, 조이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건 절대 하지 않아요. 그리고 차고 딱딱한 바닥에 앉는 걸 좋아하지 않아 방석을 깔아줘야 해요.(웃음) 그래서 저는 장난으로 ‘상견’이라고 불러요.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의 오찬 자리가 있었는데, 윤 당선인이 조이의 스타일을 알고 푹신한 패드를 준비해주셨어요. 그런데 윤 당선인이 조이에게 알려주기도 전에 조이가 먼저 가서 방석에 앉아 모두가 웃었던 기억이 나요. 가끔 누리꾼들이 조이에게 ‘조이 보좌관’이라고 하는데, 저는 “보조관이 저렇게 상전이면 일하기 힘들 거예요”라고 말해요.(웃음)
안내견에 대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안내견은 대부분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이 부르거나 먹이를 주면 기분이 좋아 돌발 행동을 할 수 있어요. 허락받지 않고 사진을 찍는 것도 비슷해요. 사람을 무는 등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돌발 행동을 하면 시각장애인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해요.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의 눈과 같은 존재니까 마음과 눈으로만 예뻐해주길 부탁드려요.
조이는 저의 세 번째 안내견이에요. 사람을 좋아하고 관심받는 걸 즐기는 사랑스러운 존재죠. 국회를 함께 다니며 저의 눈이 되어주고 있어요. 앞으로도 조이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메신저로 지내고 싶어요.
시각장애 피아니트스 출신 정치인
김예지 의원은 숙명여자대학교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피바디 음악원 피아노 석사, 위스콘신메디슨 대학교 피아노교수법 음악 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음악교사가 될 생각으로 교육대학원에 다니다 학업이 더 집중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귀국한 뒤엔 연주회와 방송, 강의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본래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습니다. 어떻게 정계에 입문했나요?
처음 한선교 전 미래한국당(현 국민의힘) 대표에게 영입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이 컸어요. 청년 정치인으로 시작해 정치 경력을 쌓아왔다거나 정치에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겠다고 했어요.
결심이 선 이유는 뭔가요?
대학생 때부터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과 장애인 권익 활동에 참여했어요. 그런데 의견을 제시해도 변화가 없어 정치인들에게 요청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제가 직접 법안을 만들고 고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애인에 대한 것은 제 친구와 동료, 선후배의 이야기이자 저와 관련된 것이니까요.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소리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죠.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걱정하는 시선도 많았을 텐데요.
모두 하지 말라고 했죠. 장애계에서는 보수 성향의 정당 입당에 대한 우려를 표했어요. 그런데 저는 당의 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만약 당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바뀌는 게 당연하고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정계 입문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제가 발의한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고 시행되는 걸 봤을 때요. 점자형 선거공보의 면수 제한을 없애고, 선거공약을 저장 매체에 음성 파일로 저장해 공보물과 함께 발송하도록 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어요. 점자는 폰트 규격이 정해져 있어 책자로 만들면 면수가 많은데 면수 제한이 있으면 공약을 전부 담을 수 없거든요. 또 후천적으로 시각장애를 얻은 경우 손의 예민도가 떨어지는 등의 이유로 점자를 읽지 못하는 분들도 있어서 USB 등 저장 매체를 통해 선거공보를 제공해야 된다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지난 3월에 치른 재보궐선거부터 법안이 시행됐어요. 또 최근 화장품 용기에 점자를 표기하는 내용의 화장품 관련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 의도에 공감한 여러 기업에서 벌써 동참하고 있어요. 공감을 통해 솔선수범하는 사회의 모습을 본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임기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
지금까지 한 것과 같은 일이요. 아무리 외쳐도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목소리를 끌어내고 전달될 수 있도록 메신저 역할을 할 거예요. 그러다 보면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