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로맨틱과 거리가 멀다. 꽃 선물을 받아도 크게 기뻐하는 편이 아니며, 스스로 기분 전환을 위해 꽃을 산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봄이라고 꽃놀이를 간 적도 없다. 집에 가는 길목이나 출근길에 보는 꽃이면 충분했다. 또 내겐 슬픈 기억이 있다. 예전에 여의도로 회사를 다닐 때, 3월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지하철역 개찰구 앞에서 다투는 커플을 봤다. 그들이 무슨 연유로 그러는지 모르지만 뒷모습만 봐도 심각하게 싸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엔 ‘커플은 어딘가 놀러 가면 무조건 싸운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게 꽃놀이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한 순간이 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떠난 일본 여행에서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 술을 마셨던 친구들과 “이렇게 월급을 탕진할 거라면 여행이라도 가자”고 해서 급히 떠난 여행이었다. 즉흥적으로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나서도 매일 술을 마시느라 여행 계획을 세우지 못했던 우리는 특별히 갈 곳이 없어 고민하다 “봄에 일본에 왔으니 벚꽃을 보러 가자”며 일본인 친구에게 ‘벚꽃 성지’를 물었다. 현지인에게 추천받은 곳은 우에노 공원과 아사쿠사. 할 일이 없던 우리는 두 곳을 모두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숙소에서 가까웠던 우에노 공원으로 향했다. 아무 생각 없이 도착한 우에노 공원은 인파로 가득했다. 산책로 양옆에는 파란 돗자리가 줄지어 깔려 있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유카타를 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고, 코스프레 의상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모두 한국에선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이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 앉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국과 다른 벚꽃놀이 문화에 잠시 압도됐던 우리는 일본까지 와서 질 수 없다며 맥주를 사서 ‘길맥’했다. 산책로 한편에 서서 한 입이면 없어질 꼬치를 사 먹고 오코노미야끼를 먹으며 즐거워했다. 돗자리에 앉아 본격적으로 술판을 벌이지 못한 건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다음 코스는 아사쿠사였다. 바쁜 현대사회의 표본인 도쿄 중심가와 달리 한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사쿠사는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상점을 보는 재미가 있어 도쿄를 찾으면 하루쯤 시간을 내어 방문하는 곳이다. 이전엔 아사쿠사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는 운세 뽑기를 하는 재미가 가장 컸는데, 봄에 가니 느낌이 색달랐다. 날씨가 따뜻해 유카타를 입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 이국적인 느낌이 들고 일본 전통 신사와 벚꽃, 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벚꽃나무 아래에서 사진도 한 장씩 남겼다.
지금도 꽃놀이를 생각하면 그때의 일본이 떠오른다. 파란 돗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유카타를 입고 춤을 추는 어머니들, 절로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꼬치 굽는 냄새. 화룡점정은 역시나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마신 맥주다. 따뜻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공원에서 만개한 꽃을 보며 마셨던 맥주의 시원함을 다시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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