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OTT 오리지널 시리즈 출연
매 작품 자신을 몰아세우며 치열하게 연기하는 그에게 물었다. “이제는 조금 즐겨도 되지 않아요?” 그의 대답은 매번 같다. “사람이 어디 변하나요?” 연기는 그에게 즐겁기보다 고통이다. 부족한 자신을 수도 없이 마주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데뷔 36년 차인 그는 그래서 또 연기 앞에서 겸허해진다.
김혜수는 ‘여배우’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다. 그런 그가 영화 <내가 죽던 날>(2020)과 드라마 <하이에나>(2020) 이후 2년 만에 돌아왔다. 그가 선택한 작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심판>이다. 김혜수로서는 첫 온라인동영상 서비스(OTT) 오리지널 출연작으로, 김혜수는 “소년범죄나 소년범에 대해 유의미한 고민을 함께하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고 출연 계기를 밝혔다.
<소년심판>은 신예 김민석 작가와 <디어 마이 프렌즈> <라이프> 등으로 사회 이면을 다양하게 조명해왔던 홍종찬 감독이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소년심판>은 소년범을 혐오하는 판사 ‘심은석’(김혜수 분)이 지방법원 소년부에 부임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소년범죄와 그들을 담당하는 판사들의 이야기다. 극 중 김혜수는 연화지방법원 소년형사합의부 우배석 판사로 새로 부임한 인물로,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캐릭터다. 김혜수 외에도 김무열, 이성민, 이정은 등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해 각기 다른 성향의 판사를 연기한다.
김혜수가 연기한 심은석 판사는 소년범을 혐오한다. 죄를 지었으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무열이 소년범에게 벌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기회를 줄 수 있는 건 판사뿐이라고 믿는 인간적인 판사 ‘차태주’ 역을, 이성민이 사회적 시스템 변화를 주장하는 부장판사 ‘강원중’ 역을 맡았다. 이정은은 빠른 사건 처리를 중시하는 이성적이고 완고한 판사 ‘나근희’ 역을 맡아 열연했다.
김혜수는 극 중 배역 심은석의 신념을 진심으로 전하기 위해 치열하게 몰입했다고 한다. 실제 소년 법정을 참관하며 작품에 진정성 있게 다가갔다는 후문이다. 함께 출연한 배우 이성민은 김혜수에 대해 “작업하는 방식을 지켜보면서 대단하고 관록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 앞에서의 태도가 많은 자극이 됐다”고 전하며 김혜수의 열연을 예고했다.
”보여줘야죠, 법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소년심판> 출연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대본을 읽고 굉장히 반가웠다. 이런 이야기가 쓰일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보는 사람들이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 작품이 내게 온 게 기뻤다. 작품의 메시지들이 진심으로 잘 전달돼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함께 생각을 나누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느낌은 어땠나?
소년범죄와 소년범이라는 예민하고 다소 무거운 소재를 이런 방식으로 힘 있게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놀라웠다. 재미나 완성도는 물론 영상 매체가 할 수 있는 순기능을 내포한 작품이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작업했다. 진심으로 시청자의 가슴에 메시지가 닿아서 소년범에 대해 유의미한 고민을 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다.
맡은 역할은 어떤 캐릭터인가?
‘심은석’ 판사의 약칭이 ‘심판’이다. 소년범을 혐오하는 판사다. 사건에 냉정하고 날카롭게 몰두하면서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비 없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다. 심은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책임’이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건을 야기한 소년범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회, 국가, 함께 살아가는 어른들에게까지 책임을 묻는다.
판사라는 직업을 연기해보니 어땠나?
사실 나도 그동안 소년범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의 판결을 보고 화가 날 때가 있었다. 판사가 이러니까 우리 사회가 안 변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을 통해 법적인 허용치, 판사들의 막중한 책임과 고뇌를 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최전선에서 일하는 법관들이 얼마나 큰 사명감을 갖고 있는지 다시 한번 느꼈다.
극 중 낮은 목소리 톤이 인상 깊었다.
따로 설정하진 않았다. 그 장면의 상황, 마주한 상대, 앞뒤 컨디션을 고려해 연기했을 뿐이다. 눈을 부릅뜨는 장면이 많다고들 하는데, 그것 역시 일부러 의식한 건 아니다. 최대한 집중하고 몰입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작품과 연기에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결과물을 본 소감도 궁금하다.
대본이 일찍 나와 준비할 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쉽지 않았던 작품이다. 솔직히 말하면 현장에 서 있을 기운이 없을 정도로 준비를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였다. 어느 때보다 책임감이 컸다.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했던 고민들, 캐릭터를 통해 보여줘야 했던 메시지·대사,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 등등 고민할 것이 많았다. 공개된 시리즈물을 보면서 촬영할 때 느꼈던 마음들, 소년범죄를 바라보는 구조적인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하게 됐다.
함께 연기한 김무열 배우에 대해 극찬했다. 어떤 배우였나?
그동안 좋은 배우들과 작업을 많이 했지만 김무열 씨는 정말 대단하다. 평소에도 연기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호흡을 맞춰보니 정말 좋더라. 연기를 잘하지만 호흡에서 무너지는 배우들이 있는데 무열 씨는 작품 전체의 흐름을 잘 보기도 했다. 우리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판사가 ‘강성’인데 무열 씨가 연기하는 ‘차태주’는 진지하고 부드럽고 조용하다.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자신도 에너지를 올리게 되는데 무열 씨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내면에 에너지를 채우더라. 섬세하게 감정을 다를 줄 알더라. 예전에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촬영하면서 조우진 배우가 참 인상 깊었는데, 결이 다르지만 김무열 씨도 그렇다. 스마트한 접근과 집중력이 있는 배우다.
이정은 배우와 다시 호흡을 맞췄다.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이인 것으로 안다.
정은 씨는 진짜 좋은 배우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어른스럽다. 정은 씨만 보면 참 따뜻하다. 좋은 배우, 좋은 사람과 긴 시간 함께한다는 건, 그 시기에 내 인생의 축복이다. 전작과 이번 작품은 결이 정말 달랐지만 잘 해내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이다. 좋아하는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홍종찬 감독과의 호흡도 궁금하다.
홍종찬 감독은 본질에 닿기 위해 작위적이고 가공된 것들, 그리고 기교들은 과감하게 배제했다. 끝까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소년심판>이라는 작품이 완결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데는 연출자의 몫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작품에 가장 걸맞은 연출자였고 그 몫을 다해줬다. 더불어 홍종찬 감독이 지니고 있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면이 작품에 깊게 반영됐다고 생각한다.
매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소년범도 중요한 배역이다.
사건을 풀어가고 처분하는 판사들도 있지만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사건을 이끌어가는 소년범들이다. 어떤 배우들이 캐스팅될지 많이 궁금했고 기대됐다. 사건마다 달라지는 소년범들을 보면서 정말 많이 놀랐다. 전형성에서 벗어난 연기를 보여줬고 충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놀랍고 신선했다. 경험이 없는 배우가 많았음에도 내공이 있었다. 에피소드별로 생동감을 부여하는 건 소년범을 연기한 뉴페이스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소년범의 주변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과의 호흡도 궁금하다.
‘저런 배우를 어떻게 찾아냈지?’ 싶을 정도로 새롭고 놀라운 캐스팅이 많았다. 짧지만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다. 신선한 자극이 됐다. 연출자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배우를 만나고 고심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변에 있는 인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면 그 주변 인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강렬하게 느껴질 만큼 연기를 잘했다. 보는 이들도 이 작품이 단지 판사와 소년범, 피해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구나라는 걸 느낄 것이다. 이야기를 확장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역할을 해준 것 같아 감사하다.
”캐릭터와는 달리 어른답지 못할 때가 많다”
형사미성년자로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상 처벌하지 않는 ‘촉법소년’(만 10세 이상 14세 미만 소년)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소년범죄를 단순한 논리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맞게 소년법이 개정돼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법 개정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국에 소년부 판사가 20여 명이라고 한다. 지금 시스템이 합당한가라는 생각을 했고, 법 개정 전에 왜 소년범죄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고민과 인력, 예산 등 시스템 정비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결돼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을 끝내고 김혜수 씨에게 변화가 있었나?
당연하다. 이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얻은 게 있다. 또 촬영 후 시리즈 전편을 보면서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 것들이 있다. 우리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상을 살면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사회적 시스템과 어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소년심판>은 어른과 사회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다. 김혜수 씨는 스스로 어떤 어른이라고 생각하나?
배우로서 대중 앞에 서는 시간이 굉장히 길었다.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을 한 캐릭터를 꽤 많이 맡아서 실제 김혜수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실제 나는 어른 같지 않을 때가 많다. 일관되지 않을 때도 많다. 감히 어떤 어른이 돼야겠다는 생각도 못 하겠다. 다만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내 앞에 당면한 상황, 대상들에 대해 집중하면서 최대한 내가 성숙해지길 바랄 뿐이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정의로운 캐릭터가 많다.
의도하진 않았다. 이번 작품도 그렇다. 그냥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하고 연기한다. 알고 보면 아주 심플하게 접근하는 스타일이다.
전 세계 시청자에게 한마디 해달라.
한국의 소년 법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 속에 있는 모든 10대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를 담고 있다. 현실에 와닿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각 나라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작품을 본 이들이라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이뤄지는 범죄, 법에 대해 현실적인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진심을 담아 열심히 만들었다. 기대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1년 5개월 전 김혜수를 만나 물었던 적이 있다. “김혜수를 즐겁게 하는 건 뭔가요?” 그는 사랑, 음악, 시, 글, 아이들, 하늘, 초록…. 사소하고 일상적인 게 즐겁다고 했다. 우리가 아는 김혜수는 오랜 기간 동안 톱스타였고, 여배우였고, 롤모델이었고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삶에는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이어지는 대답도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저를 ‘용기 있는 여성’으로 봐주는데, 사실 저는 여러분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어요. 아등바등 늘 제게 주어진 옷을 버거워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고, 별거 아닌 것에 실없이 웃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