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숙제는 ‘삶의 불가해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시작은 지난해 연말에 우연히 집어 든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다. 정신의학자 프랭클은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고 그 자신도 수용소를 전전하다 살아남았다. 처절한 고통 속에 그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삶의 의미가 뭘까?’라는 질문을 중단하고,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에 집중해야 하며 행동과 책임으로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 난해한 이 이론의 현실적 예시처럼 다가온 영화 3편이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각본을 맡은 일본 영화 <스파이의 아내>와 연출을 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시대와 소재는 다르지만 일맥상통하는 대목이 있다. <스파이의 아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가 배경이다, 부유층 사모님 ‘사토코’는 남편이 731부대의 참상을 폭로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맨티스트 사토코는 남편의 미국행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지만 남편의 반응은 애매하다. 결국 그들의 미국행은 실패한다. 남편은 사라지고 사토코는 옥에 갇힌다. 밀고자가 누군지, 혹시 남편인지, 왜 그랬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누구보다 답을 알고 싶은 건 사토코 자신일 것이다. 사토코의 마지막 모습은 실성인지, 체념인지, 냉소인지, 득도인지 모호하다. 내게는 그가 질문하기를 멈춤으로써 답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가후쿠’는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다. 그 후 작품이 전개되면서 그들 부부에겐 사실 복잡한 사연이 있었고, 가후쿠가 그녀의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해 아내에게 드라마틱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덧씌워왔다는 게 밝혀진다. 그런 가후쿠가 자신 못지않은 불행을 견뎌온 사람들과 마주친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포함해 이미 벌어진 일들에 ‘왜?’라고 묻기보다 인생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노르웨이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전도유망한 의대생 ‘줄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줄리는 의대를 때려치우고 심리학과로 옮기더니 그마저 관두고 사진가가 되기로 한다. 뭘 해도 성에 안 차고 진짜 인생은 시작도 안 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생의 의미를 찾아 뜬구름 잡으며 살던 줄리는 늘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런 줄리에게 불치병에 걸린 친구가 말한다. “나는 내가 남긴 작품으로 평생 기억되고 싶지 않아. 나는 살아서 내 아파트에서 행복하고 싶어.”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생의 의미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 해석들은 너무 자의적인지 모르지만, 이 영화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들은 예술의 본분을 다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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