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함의 대명사 배우 최명길이 다시금 전성기를 맞았다. 바로 KBS2 일일드라마 <빨강 구두>를 통해서다.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위해 혈육의 정을 외면한 비정한 엄마와 그녀를 향한 복수심으로 살아가는 딸의 서사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전개와 배우들의 완성도 높은 연기로 마지막 회에서 최고 시청률(닐슨코리아 기준 100회 19.6%)을 달성하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배우 최명길은 극 중 모성애를 찾아볼 수 없는 엄마 ‘민희경’ 역을 맡았고, 그녀의 선과 악을 넘나드는 연기에 호평이 이어졌다. <빨강 구두> 마지막 회가 방영되는 날 최명길을 만났다. 해사한 미소로 첫 인사를 건넨 그녀는 명불허전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하는 배우였다.
“사람은 평생 가꿔야 해요”
<빨강 구두>가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어요.
큰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에요. 매 작품 에너지 소모가 큰데 이번엔 온 힘을 쏟아냈어요. 그동안 연기했던 엄마 역 중에 가장 강한 캐릭터였고, 격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신이 많았죠. 그래서일까요? 시청자 반응을 보면 욕하면서도 끝까지 방송을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민희경의 감정선을 유지하기 위해 촬영 기간 내내 배역에 빠져 살았어요. 드라마는 매회 대본을 받기 때문에 캐릭터의 전개를 알 수 없어서 감정선을 유지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최선을 다해서인지 후회나 아쉬움은 없어요.
극 중 민희경은 모성애를 찾아볼 수 없는 엄마였죠.
초반에는 행동, 대사에 이입이 안 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였어요. 그런데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이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이전에는 배역에 대한 이해 없이는 연기를 할 수 없다고 믿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생각이 달라졌어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기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죠.
한결같은 미모도 화제였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최선을 다해서 관리하고 있어요.(웃음) 시간이 날 때마다 1시간씩 산책을 하고 필라테스도 해요. 피부 관리를 위해 1일 1팩은 필수고, 가끔 마사지 숍에서 관리를 받기도 하죠. 대중을 만나는 배우라면 연기뿐만 아니라 외적인 부분도 가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관리의 핵심은 부지런함이에요. 살아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없더라고요.
세련된 스타일링은 본인의 의사가 반영된 건가요?
스타일리스트의 공이 커요. 저는 가끔 캐릭터의 상황과 감정선에 반영하면 좋을 거 같은 스타일링을 제안하는 정도예요. 각자의 전문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번 작품의 스타일이 사랑받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중년 여성에게 추천하는 패션 아이템이 있나요?
편한 옷. 입었을 때 몸과 마음이 편한 옷이 가장 좋은 패션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요. 일단 애티튜드나 풍기는 분위기가 바뀌는 거 같아요. 편한 옷을 입고 누군가를 만나면 제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말하더라고요. 또 상황에 맞춰 옷을 골라 입는 배려가 패션의 완성도를 높이는 거 같아요. 무조건 멋진 아이템을 고르기보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착장을 달리하는 거죠.
자기 관리에 철저한 편이군요.(웃음) 맞아요.
하지만 외적인 부분보다 내면을 가꾸는 일에 무게를 둬요. 세월이 흐를수록 얼굴에서 마음의 모습이 드러나거든요. 저 같은 경우에는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요. 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잘 살아야 한다고 다짐해요. 그래서 일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최선을 다하죠. 최근에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마음 깊은 곳에 박혔어요.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상황부터 차오르는 기쁨에 매몰되는 마음까지 모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평정심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감정대로 행동하기보다 매사에 감사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살아가는 게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니까요.
배우로서, 여자로서, 개인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에 있어요. 결혼 후 한동안 가족만 바라보고 사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했거든요. 이제야 여유가 생겼어요.
난 1981년 MBC 1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최명길은 우아함과 청순함을 두루 갖춘 외모로 주목받았다. 미모로만 빛을 본 건 아니다. 20대 때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1985)에서 ‘풍란’ 역으로 노년 연기를 펼쳐 실력까지 인정받았다. 지금까지 최명길의 필모그래피에 쌓인 작품 수는 50개가 넘는다. 공백기 없이 40년이 넘는 시간을 작품 속에서 살았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묻자 최명길은 “아직 만나지 못한 캐릭터가 많다”며 두 눈을 반짝였다. 배우라는 외길을 걸어온 그녀에게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역시나, 연기다.
올해 데뷔 41주년을 맞았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네요.(웃음) 매 순간 치열하고 알차게 살았어요. 그래서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 오늘에 집중하면서 살 수 있는 거 같아요. 지금이 어릴 때보다 배우로 활동하기에도 더 좋다고 생각해요. 편안한 마음으로 연기를 할 수 있게 됐거든요.
아쉬운 부분은 없나요?
중년 여배우라는 타이틀 안에서 맡을 수 있는 배역은 한정적이에요. 배우로서 입지가 점점 줄어드는 거죠.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아요. 국내외 연기 시장의 경계가 허물어진 시대가 왔으니까요. 과거에는 반드시 영어를 할 줄 알고 외국 영화사에 진출해야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콘텐츠를 잘 만들면 어디에서든 찾아주는 시대가 됐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색다른 연기를 선보일 수 있을 거 같아요.
도전해보고 싶은 연기 장르가 있나요?
많죠. 여성의 서사가 중심이 되는 작품, 휴머니즘이 드러나는 작품, 시트콤까지 다양한 장르를 만나고 싶어요. 다시 멜로 연기에 도전하고 싶고요. 우리나라에 실력 있는 여성 배우가 많아요. 중년 여배우의 경우에는 엄마 역할 외에도 할 수 있는 연기가 무궁무진해요.
배우이자 아내, 엄마로 산다는 것
최명길은 1995년 정치인 김한길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 28년 차. 한 품에 안길 정도로 작았던 두 아들은 어엿한 성인이 됐고, 남편과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됐다. 누군가는 평범하고 단란한 네 식구의 삶이라고 하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2017년 10월 남편 김한길이 폐암 4기를 선고받으면서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숨 가쁜 시간을 보냈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가정의 행복을 되찾게 된 데는 최명길의 내조가 컸다. 그로 그럴 것이 그녀가 의식불명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는 김한길의 곁을 한결같이 지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눈을 뜬 김한길에게 25년 전 결혼할 때 맞췄던 은반지를 내미는 로맨티스트다운 면모까지. 배우, 한 여자의 아내, 두 아들의 엄마로 살아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연기, 가정, 자녀 교육까지 삼박자를 맞추면서 오늘까지 왔어요.(웃음)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두 아이를 키우고 정치하는 남편을 도우면서 살았잖아요. 남편이 아프기도 했고요. 이제야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어요. 지금은 저를 찾아가는 중이에요. 배우로서, 여자로서, 개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요. 제 또래 여성들은 공감할 거예요. 결혼 후 한동안 가족만 바라보고 사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럼에도 지난 시간을 통해 얻은 것이 많아요. 살아가면서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낼 줄 알게 됐죠. 또 정신없는 시간 속에서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SNS를 보니까 가족들과 있을 때 가장 편안해 보이더라고요.
가족이 삶의 원동력이에요.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기에 어떤 일이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어요. 최명길의 중심을 지켜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죠.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가족이 있어 큰 힘이 돼요. 남편과 아이들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어요. 채널A <어바웃 해피&길길이 다시 산다>(2019)에서 가족 전체 섭외 제안이 왔을 때 아이들에게 출연 의사를 먼저 물어봤거든요. “아빠가 건강을 되찾은 기념으로 다 함께 출연하면 좋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순간 엄마와 아빠를 위한다는 게 느껴졌죠.
모자간에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는데 각별해 보여요.
어릴 때부터 대화하는 습관을 들였어요. 소통 관계를 제때 형성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대화가 단절될 거라 생각했죠. 덕분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자연스러워졌어요. 아이들 생각은 다를 수 있어요.(웃음) 예전에는 제가 무언가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갔다면 이제는 두 아들의 생각을 물어봐요. 가정에서 결정해야 할 사항이 생기면 아이들의 의견도 반영하고요.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야죠.
남편이자 정치인인 김한길을 위한 특급 내조로도 유명하죠.
전혀 특별하지 않아요. 부부관계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살아요. 억지로 더 잘해주거나 못 하려고 하지 않죠. 다만 타이밍이 잘 맞았던 거 같아요. 남편이 선거에 출마하거나 아플 때 제가 쉴 수 있는 여건이 됐거든요.
반대로 남편의 외조는 어떤가요?
저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해줘요. 특히 작품을 선택하거나 일을 시작할 때는 열렬히 응원해주죠. 나의 커리어를 인정해주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일을 할 때는 남편이 쉬는 경우가 많았어요. 같이 살면 살수록 밸런스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두 사람 모두 대중을 만나는 인물인데 조언을 주고받나요?
서로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아요. 엄연히 따지고 보면 활동 영역이 다르니까요. 다만 살아가면서 터득한 대처법을 공유해요. 혼자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답하는 방식으로요.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을 꼽으면요?
보통 부부는 사소한 일로 의견 충돌을 빚는 경우가 많아요. 자녀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다투고, 일상에서 약간의 의견 차이가 싸움으로 번지죠. 남편과 30년을 살면서 항상 좋기만 했다면 거짓말이에요. 그럼에도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해왔어요. 서로의 생각, 선택을 믿어주는 방식으로요. 인정하고 사는 게 편해요. 나와 다른 부분을 바꾸려고 하다가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경우가 빈번하죠. 신뢰도 중요해요. 상대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또 살다가 신뢰가 무너지면 관계를 이어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요.
나를 보여주는 직업이지만 보여지기 위해 살지는 않아요.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최대한 나답게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어요.
보통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하나요?
평범한 주부의 일상을 보냅니다.(웃음) 주로 아이들, 남편과 시간을 보내고 틈틈이 운동을 해요. 제 나이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건강이니까요. 건강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요. 긴 시간 쉴 수 있다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물론 코로나19로 제약이 있는 상황이지만 여건이 나아지면 가족들과 어디든 다녀오고 싶네요.
평소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는지 궁금합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풀어요. 1남 5녀 중 넷째라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언니들이 있어요. 남편과도 대화를 많이 나누고요. 특별할 게 없죠?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 문장이 있나요?
때에 따라 달라요. 오늘은 드라마 <빨강 구두> 마지막 회에서 딸 ‘김젬마’(소이현 분)에게 “오래 버텨줘서 고마웠다”고 한 대사가 생각나네요. 어느 때보다 버티는 게 어려운 세상이에요. 하지만 힘들다고 포기하면 좌절감이 찾아오고, 견뎌내면 성공하게 되죠. 오늘 하루도 잘 버텨준 모두에게 “잘 살았다”, “고맙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최명길의 최종 꿈은?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위적으로 살다 보면 언젠가 탄로 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최대한 나답게 자연스럽게 삶을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월이 흘러가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욕심부렸던 부분을 하나씩 버리면서 나의 모습을 찾아갈 거예요.
2022년 임인년이 밝았습니다. 새해 목표는 뭔가요?
일단 휴식을 취하고 싶어요. 그동안 바쁘게 달려왔으니까요. 재정비한 뒤에 하고 싶은 일이나 취미를 찾아볼 계획이에요. 저의 시간으로 채워나가는 게 하나의 목표입니다.
대답을 이어가던 최명길이 기자에게 말했다. 어떤 일이든 놓지 않고 자신의 템포에 맞춰나가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신기했다. 머릿속을 헤집었던 고민의 끈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세월의 내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