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 많아서 자유롭진 못하다. 어떻게 보면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가는 게 매일의 도전이 아닐까 싶다.
타인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지 않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늘 생각한다.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대세 배우 유태오가 영화 <로그 인 벨지움>의 감독으로 대중 앞에 섰다. 자신의 세계관과 취향을 오롯이 녹이며 글이 아닌 영상으로 자신의 에세이를 완성한 것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도 호평 일색이다.
영화 연출은 이렇게 시작됐다. 유태오는 2020년 초봄 벨기에 앤트워프의 한 호텔에 15일간 고립됐다. 해외 드라마 <더 윈도>에 캐스팅돼 촬영하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선포로 기약 없이 발이 묶인 것이다. 유럽 현지 스태프는 뿔뿔이 흩어져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유태오는 어디도 갈 수 없었다.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취소됐고, 국경도 막혔다. ‘이 바이러스는 도대체 뭐지?’ ‘말도 안 통하는 이곳에서 혼자 죽는 건 아닐까?’ 강박에 사로잡힌 그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물이 지난 2021년 12월 1일에 개봉한 영화 <로그 인 벨지움>이다.
유태오는 각본, 연출, 음악, 연기 등등 영화 전반에 걸친 모든 과정을 혼자 해냈다. 극 중 1인 2역을 맡아 ‘인간 유태오’를 스스로 인터뷰하기도 했다. 영화 개봉 전, 연출가 유태오를 만났다.
자신이 연출한 첫 영화가 개봉을 앞둔 소감은 어떤가?
극장에서 상영하려고 만든 영화는 아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정신 줄을 잡기 위해 일상을 기록했다. 귀국 후 편집본을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그 끝에 배급사의 도움으로 한국 촬영 분량을 늘려 여기까지 오게 됐다. 영화도 쑥스럽고 감독이라는 호칭도 많이 쑥스럽다. 에세이 같은 영화라고 생각해달라. 현실을 바탕으로 상상을 넣어 스마트폰을 통해 속마음을 표현한 영화다.
영상을 찍기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목적을 가지고 찍은 건 아니다. 겪었던 일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낯선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팬데믹 상황에 처했을 때, 향기마저 낯선 벨기에에 혼자 고립돼 있었다. 호텔 로비가 잠겼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도 취소된 상황이었다. 그렇게 멍때리다가 미치지 않으려고 내 일상을 찍게 됐다. 당시에 미국에서 오디션 제안이 들어와 주어진 대본을 읽어야 했다. 대사를 받아줄 상대가 없어 스스로 상대역을 연기해 태블릿PC로 녹화한 후 거기 맞춰 연기해보기로 했다. 막상 해보니 재미있더라. 나만의 오디션을 만들어볼까? 나를 인터뷰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살을 붙이게 되면서 전체적인 영화의 구도가 잡힌 것이다.
연기자에서 감독 타이틀까지 얻었다.
도전의 이유는 영화 속에도 있듯이 ‘생존’ 때문이었다. 오롯이 그 이유였다. 고립 상황이 일주일쯤 지나니 혹시 이 낯선 나라에서 코로나19에 걸린다면…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더라. 하필 그 당시 요절한 할리우드 배우 히스 레저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히스 레저는 유명 배우고 그가 스스로 찍은 아카이브를 사후에 다른 감독이 편집해 다큐를 만든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죽으면 누가 나를 기억하겠나 싶었다. 나에 대해 뭔가를 해야겠다 싶어서 찍기 시작했다.
“미치지 않으려고 찍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 촬영하면서 코로나19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가 줄어들었다. 다른 곳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록이 최선이었다.
영화적 기획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나?
구성은 하루 만에 다 잡았다. 아트 영화고 작가주의적이고 개인적인 영화인 데다 한 사람의 자화상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라 어렵지 않았다. 운도 따랐다. 자전적인 이야기의 마무리가 청룡영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상황까지 이어져 짠하고 아련한 스토리가 저절로 완성됐다. 이 모든 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배우로서 연기에 접근하는 상상력을 좀 더 키워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완성된 작품을 본 소감은 어떤가? ‘일기 같은 영상’, ‘에세이 같은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나의 ‘기록’이 영화가 돼서 신기하고 고맙다. 그 과정에서 어떤 문법이라도 진심은 통한다는 확신도 생겼다.
영화를 보면 편집과 연출이 과감하다. 예술에 대한 관심도 알 수 있다. 제작에 앞서 참고했던 레퍼런스 작품이 있나?
만두를 빚어 먹은 뒤 체하는 장면은 홍콩 영화 <중경삼림>(1995)을 오마주했다. <중경삼림>엔 유통기한이 지난 파인애플을 먹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 외로울 때 그 사람은 진짜가 된다”라는 말은 대만의 차이밍량 감독의 말을 인용했다. 그 외에도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7), 오손 웰즈의 <거짓의 F>(1975)도 영감을 준 영화다. 백남준과 행위예술가 크리스 버든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배우 이제훈·천우희, 음악인 김수철, 학자 이택광 등과 교류하는 장면도 담겨 있는데, 내 영화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영화 속에 넣었다. 이 장면은 뉴욕의 독립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영화평론가가 내 영화를 비평하기 전에 스스로 비평해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는 나를 지탱해준 매체였다. 외롭고 힘든 순간 늘 영화와 함께했다.
영화를 보면 해소와 탈피가 되더라. 결국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어땠나?
스마트폰의 장점은 간편하다는 것이다. 전문 카메라는 무겁고 이동도 복잡하고, 촬영 장소에 대한 사전 허가도 받아야 한다. 스마트폰은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서 편했다. 오래전부터 해외에 갈 때면 삼각대와 조명을 들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 영상 오디션 제의가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쉬웠던 건, 자본과 시간이 없어서 생각했던 것을 다 하지 못한 것이다. 레퍼런스가 됐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나온 장면처럼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컷을 찍고 싶었는데 한정된 장비와 환경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극 중에서 영어, 한국어, 독일어를 번갈아가면서 사용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3개 국어를 어떻게 구도적으로 넣을 수 있을지 상상하다가 시작했다. 독일어는 과거, 영어는 현재, 한국어는 미래라는 3막의 구조를 생각하며 찍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조금 짧게 느껴진다. 편집하는 과정에서 덜어낸 부분이 있나?
혼자 소주를 마시며 내가 나를 촬영하는 순간이 있었다. 취기가 있을 때 이틀간 촬영했다. 즉흥적으로 질문하고 솔직한 대답을 했는데, 막상 영상을 보니 그 느낌이 잘 살지 않았다. 영화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최종 편집 과정에서, 술을 마신다는 자극적인 요소 때문에 순수한 감수성이 표현되지 않을 것 같아 과감하게 통편집했다.
65분의 러닝타임이다. 얼마나 촬영했나?
정확하지는 않은데 80시간 정도 촬영했다. 첫 편집을 하니 1시간 35분 정도 나왔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밀도 있는 화면을 좋아한다. 결국 재미없거나 늘어지는 걸 다시 편집해 알짜배기 65분이 남았다.
솔직한 유태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두려움은 없었나?
두려움의 여지가 없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찍은 영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생존하려고 찍기 시작한 영화였다. 나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시니컬하고 까부는 모습도 내 모습 중의 하나, 진지한 모습도 내 모습 중의 하나다. 민낯을 드러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동료 배우 이제훈, 천우희가 영화 속에 등장한다. 배경이 궁금하다.
이제훈 씨와는 예전에 한 이벤트에서 만나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이후 친분을 쌓았다. 지금은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사이다. 천우희 씨와는 영화 <버티고>에서 함께 작업하면서 친해졌다. 이 친구들에게 “밥 한 끼 사줄게” 하고 꼬였다. 너무 흔쾌히 응해줬다. 셋 다 술을 안 마신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그대로 보드게임을 하고 밥 먹고 영화 얘기를 하며 논다. 연출하지 않고 실제 모습을 그대로 찍은 것이다.
이 영화엔 음식이 많이 나온다. 솔 푸드는 뭔가?
케밥이다. 독일에서 자랄 때 터키인 친구가 많았다. 그들에겐 한국과 비슷한 가족적인 정이 있다. 당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다음 날 해장으로 케밥을 먹었다. 진정한 솔 푸드다.
영화 속에서 자아와 대화하는 1인2역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방에 혼자 있었고,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라 가능했다. 연기자 입장에선 ‘잘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현장이었다면 연기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 혹은 대사는 무엇인가?
어떤 한 장면보다는 신과 신 사이를 연결하는 그림이나 사운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그 장면이 어설프면 영화 자체의 맥이 툭 끊어지지 않나. 그 연결 장면들 중에 자부심이 드는 몇 개의 컷이 있었다.
“아내는 카운슬러이자 영감 주는 존재”
영화를 촬영한 지 1년이 지났다. 지금 유태오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두려움이 많아서 자유롭진 못하다. 어떻게 보면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가는 게 매일의 도전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지 않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지 늘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것이다.
이 영화는 직설적이다. 이런 형태의 결과물은 대부분 어렵거나 상징적인 장면이 많은데 그냥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 영화였다. 편집하는 과정은 어땠나?
편집할 때 아내 니키리와 편집감독에게 도움을 받았다. 다수결로 많은 걸 정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타인의 의견을 잘 듣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내 몫이었다(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아내 니키리는 유태오보다 11살 연상이다. 두 사람의 영화 같은 러브 스토리는 많은 화제를 낳았다).
아내 니키리의 이름도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 있다. 부부가 함께 작업해보니 어떤가?
아내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카운슬러다. 나는 그녀의 취향을 믿는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다. 창작적으로도 의지하지만 사생활에서도 많이 의지한다. 이번 작품을 진행하면서 많은 의견을 많이 주고받았고, 그 안에서 상상의 자극을 받았다.
창작자로서 앞으로도 스토리텔링을 계속하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평소에 워낙 스토리텔링을 좋아한다. 배우라는 직업도 스토리텔링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배우 커리어에 집중하지만 때가 오면 여러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싶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빨간색에 대한 의견이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나. 예쁜 것에 대한 취향 차이도 있을 것이고, ‘왜 저게 빨간색이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눈으로 보는 필터에 대해 말하고 싶다. 스토리 위에 여러 포장을 하면서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첫 영화다.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길 바라나?
어렸을 때부터 영화는 나를 지탱해준 매체였다. 외롭고 힘든 순간 늘 영화와 함께했다. 영화를 보면 해소와 탈피가 되더라. 영화를 만들면서 힘든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의지와 성실함을 통해 극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