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여자지만 치마를 잘 입지 않고 보이시하거나 매니시한 옷을 즐겨 입는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렇다. 당장 눈길을 끄는 장식보다는 소재나 패턴 등 기본에 충실한 남성복 특유의 느낌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치마를 차려입으면 어쩐지 중년 여성은 어때야 한다는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는 기분이 들어 갑갑함을 느낀다. 물론 개인적인 기분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 왜 바지만 입고 다니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내키는 대로 입을 ‘자유’가 있고, 여자가 바지를 입는 건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100여 년 전에 태어났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1920년대에 여자들이 처음으로 바지를 입기 시작했을 때 수많은 소란이 야기됐다. 바지를 즐겨 입는 여성은 사회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치부됐다. 인간이 얼마나 관습에 굴복하는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젠더리스(Genderless)’, ‘젠더뉴트럴(Gender-neutral)’, ‘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젠더인클루시브(Gender-inclusive)’, ‘젠더프리(Gender-free)’…. 모두 전통적인 남녀의 경계를 허무는 트렌드를 뜻하는 용어다. 최근에는 ‘King’과 ‘Queen’을 합친 ‘Kueeng’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용어가 다양한 만큼 문화·예술 전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고 성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는 것은 현대인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교양 같은 느낌이다. 예를 들면 스웨덴은 이미 2012년부터 ‘그(He)’와 ‘그녀(She)’ 대신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신규 대명사 ‘Hen’을 사용했고, 영국은 2017년부터 대중교통 안내 방송에 ‘신사 숙녀(Ladies and Gentleman)’ 대신 ‘여러분(Everyone)’을 사용했다. 이런 경향은 사회 곳곳과 문화 각 분야에 스며들고 진화해 이제는 남자들도 원한다면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치마를 입을 수 있다는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왜 굳이 남자가 치마를 입어야 하나? “편하기 때문에 원피스를 입어요. 꽃무늬 원피스보다 편안한 옷은 세상에 없어요.” 스타일 아이콘이자 그룹 <너바나>의 리드 싱어였던 커트 코베인은 1991년부터 뮤직비디오와 무대에 종종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데, 자신이 ‘여성용이라고 규정된’ 옷을 입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쿨하게 설명했다. 2021년 봄, 뮤지션이자 배우인 키드 커디는 선구자 커트 코베인을 오마주하며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등장했다.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 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현재 남성용 치마는 어떤 이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존재지만 어떤 이에게는 이미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 됐다.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과 경계를 가장 빠르게 허문 이들은 역시 젠지(GenZ) 세대다. 1995년 이후 출생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라난 이들은 지금까지 등장한 그 어떤 세대보다 다양성과 남과 다른 개성을 중요시한다. 가수 겸 배우 해리 스타일스가 좋은 예다. 해리 스타일스는 영국 신예 디자이너 해리스 리드의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2020년 12월 미국 <보그>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미국 <보그> 역사상 최초의 남자 표지 모델이었다.
이미 1980년대에 치마를 입고 남녀 성별의 경계를 허문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가 세상을 전복하고 싶은 ‘악동’이었다면, 젠지 세대인 키드 커디나 해리 스타일스를 비롯해 현재의 패션 아이콘인 포스트 말론, 영블러드, 릴 나스 엑스 등이 치마를 입는 것은 조금 더 개인 취향에 가까워 보인다. 키가 2m 안팎인 NBA 농구 선수들 사이에서도 치마가 유행한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평소에도 옷 잘 입기로 유명한 유타 재즈의 가드 조던 클락슨은 체크 스커트에 나이키 덩크 슈즈를 믹스매치하고, 워싱턴 위저즈의 가드인 러셀 웨스트브룩은 톰 브라운의 카디건과 화이트 롱스커트를 입은 ‘퇴근 룩’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LA 클리퍼스의 포워드 세르지 이바카는 2019년에 치마를 입고 톰 브라운 쇼에 참석하기도!
치마를 입어보고 싶은 남성의 선택지는 꽤 넓어졌다. 우선 명칭부터 새롭게 생겼다. 남성용 스커트는 ‘머트(Mirt, Man+Skirt)’라고 부르고, 길이가 아주 짧은 것은 ‘스코트(Skort, Shorts+Skirt)’라고 한다. 2021 F/W 시즌 트렌드는 무릎 길이의 미디부터 좀 더 긴 맥시 길이의 플리츠 스타일이다. 머트를 쇼핑하고 싶다면 지속적으로 남성용 스커트를 선보여온 톰 브라운이 1순위다. 키드 커디가 <SNL>에서 입은 꽃무늬 원피스는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의 오프화이트 제품이었고, 버질 아블로가 아티스틱 디렉터로 몸담고 있는 루이 비통 남성 컬렉션에서도 랩스커트나 타탄체크 킬트 스커트 등 다양한 머트를 선보이고 있다. 루이 비통 코리아에서도 바잉해 국내 매장에서도 구입 가능하다.
이 밖에도 버버리, 셀린느, 로에베에서 머트 쇼핑이 가능하며, 조금 더 스트리트로 내려오면 뉴욕의 대표적 젠더프리 브랜드인 더 플루이드 프로젝트, 아베크롬비앤피치, 마크 제이콥스의 폴리섹슈얼 캡슐 컬렉션인 헤븐 등에서 다양한 머트와 스코트를 만나볼 수 있다. 남성용 스커트 트렌드는 2022 S/S 시즌으로 계속 이어진다. 프라다 맨즈 2022 S/S 컬렉션에는 여자라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짧은 마이크로 미니 스코트가 대거 등장했다. 사실은 핫팬츠 위에 같은 색 천을 덧댄 것이지만 남성들이 숨겨온 각선미를 맘껏 뽐낼 수 있는 아이템이다.
‘남성답다’, ‘남성답지 못하다’, ‘여성스럽다’, ‘여성스럽지 않다’ 등 수많은 고정관념은 누가 규정한 것인가?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에 위배되는 세상의 모든 고정관념이 드라마틱하게 변화하고 있다. 남성이 치마를 입는 것은 더 이상 성 소수자의 특이한 행동이 아니며, 성별에 맞는 드레스 코드나 규칙을 규정하는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다시 질문을 해본다. 플라워 프린트, 시폰 소재, 레이스, 러플로 장식된 옷과 스커트는 남성의 옷장에 있어야 할까, 여성의 옷장에 있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