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만큼이나 동물을 많이 소비하는 곳은 패션계가 아닐까? 해마다 겨울이면 풍성한 볼륨과 화려한 컬러를 앞세운 반지르르한 모피의 향연이 펼쳐지고, 악어나 타조 등 희소성과 특별함을 앞세운 희귀 동물 가죽을 활용한 패션 아이템은 전시되기가 무섭게 팔려나간다. 거위나 오리의 털을 빼곡히 채워 몸집을 부풀린 패딩 점퍼는 혹한을 위한 든든한 방패처럼 여겨진다. 모두 ‘리얼’임을 강조할수록 가치는 급상승한다.
이런 패션계에도 몇 년 전부터 비건 열풍이 거세게 몰아쳤다. 모피로 사용되는 동물들의 열약한 사육 환경과, 인간에게 필요한 가죽이나 털을 얻기 위해 잔인하게 도살하는 장면들이 매스컴을 타면서 동물 보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기 때문.
여기에 요즘 최대의 화두가 된 코로나19도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패션계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동물 친화적인 소비를 지향하자는 움직임이 트렌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잣집 사모님’을 상징하던 호사로움의 대명사 모피 코트는 단숨에 퇴출 1순위로 전락했다. 2016년 비건 패션의 대표 주자 스텔라 맥카트니를 시작으로 구찌, 버버리, 베르사체, 조르지오 아르마니, 캘빈클라인, 코치 , 톰포드 등의 내로라하는 럭셔리 패션 하우스에서 모피 사용 중단을 선언했고, 마이클 코어스는 동물 털을 사용한 제품 생산 중단을 발표했다.
또 샤넬, 폴스미스 등의 패션 브랜드는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 동물 가죽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멀버리는 도축 후 부산물로 남겨진 가죽을 재활용한 가방을 선보였다.
이처럼 생명 윤리 지침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브랜드가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2019 S/S 컬렉션부터 런던 패션 위크에서 동물성 모피를 퇴출시켰던 영국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등 유럽을 중심으로 모피 생산을 법으로 규제하기 시작했고 샌프란시스코, LA에 이어 뉴욕 등 미국 지역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모피 금지법 제정이 확산되며 점차적으로 모피 제품의 판매 금지도 확산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의 멋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이 커지면서 비건 패션도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비건 소재를 사용하는 다양한 브랜드가 참여하는 비건 패션 위크는 지난 2019년 시작돼 올해로 3년 차를 맞았다.
비건 패션위크는 동물성 소재의 대체재를 활용한 옷과 액세서리로 런웨이를 선보인다. 런웨이에 오른 모델들의 메이크업 역시 동물실험을 반대하는 뷰티 브랜드의 제품으로 한정해 비거니즘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비건 패션을 전문으로 하는 비건 패션 브랜드 또한 전 세계 곳곳에서 주목받고 있다.
스텔라 맥카트니, 쉬림프 등의 해외 브랜드를 비롯해 국내에서도 낫아워스, 마르헨제이, 비건타이거, 에끌라토, 오르바이스텔라, 오픈플랜 등이 패션을 통해 비건 라이프를 실천중이다.
이들 비건 패션 브랜드는 모피뿐만 아니라 가죽, 캐시미어, 앙고라 등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첨단 가공 기술을 더해 가죽이나 모피의 부드러운 촉감과 고급스러운 느낌을 그대로 구현한 대체 소재와 스타일리시한 디자인이 조화된 아이템을 선보이며 비건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다.
더 나아가 페트병과 같은 플라스틱 소재를 재활용하거나 버려진 소재를 활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업사이클링을 실천하며 친환경적인 소비의 선택지로 자리 잡았다.
이제 비건은 더 이상 식생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식습관부터 비건을 실천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비건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태도를 드러내기 마련.
동물 착취에 반대하며 시작된 비건 라이프스타일은 윤리적인 소비 개념이 증가하고 환경문제와 기후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구매 의식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여기에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얻은 패션 산업계에 윤리적인 경영 철학이 확산되면서 친환경 경영을 모토로 내세운 기업이 늘어나는 추세. 이제 비건이라는 키워드는 패션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트렌드이자 소비 코드임이 분명하다.
먹지 말고 패션에 양보하세요!
동물성 소재를 대체하는 다양한 소재는 비건 패션 성장을 위한 든든한 자양분. 동물 가죽 못지않게 견고하고 튼튼한 사용감을 자랑하고 환경보호에도 일조하는 대표적인 비건 소재인 요즘 대세, 비건 레더를 소개한다.
마일로·실바니아(버섯 가죽)
버섯 뿌리에서 발견되는 섬유질인 균사체를 이용해 만든 가죽. 섬유 기술 개발 스타트업 기업인 볼트 스레드의 마일로, 마이코웍스의 실바니아 등 제조사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외양과 감촉은 스웨이드처럼 부드럽고, 세월을 머금은 듯한 빈티지한 컬러와 질감이 특징. 에르메스의 ‘빅토리아 백’, 아디다스의 ‘스탠스미스 마일로’, 룰루레몬의 ‘마일로 컬렉션’, 스텔라 맥카트니의 뷔스티에와 팬츠 등 패션 하우스에서 다양한 아이템으로 선보이며 요즘 패션계의 가장 ‘핫’한 소재로 각광받는다.
피나텍스(파인애플 가죽)
파인애플 수확 후 버려진 잎과 줄기를 활용해 만든 가죽. 영국의 에코 패션 브랜드 아나나스 아남의 설립자인 카르멘 히요사가 오랜 연구 끝에 완성한 식물성 소재다. 동물 가죽보다 가볍고 부드러운 데다 통기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동물 보호 단체 PETA의 비건 패션 라벨 인증을 받은 소재로 나이키, 폴스미스, 휴고보스, H&M, 캠퍼 등 다수의 글로벌 패션 브랜드에서 즐겨 사용한다.
데세르토(선인장 섬유)
수확한 선인장을 햇볕에 잘 말린 후 세척해 가루로 분쇄한 다음 섬유화에 필요한 재료를 섞어 압축해 만든 가죽. 멕시코 출신의 두 사업가가 선인장의 섬유질이 풍부하면서도 질긴 특성에 착안해 개발했다. 부드럽고 내구성이 좋아 패션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식물성 가죽이다.
비제아(포도 가죽)
와인을 만들고 버려지는 포도 껍질과 줄기, 포도씨로 만든 가죽. 동물 가죽과 비슷한 질감에 숙성된 와인을 연상시키는 짙은 보랏빛이 매력적이다. 이탈리아의 와인 생산 기업인 비제아가 개발한 소재로 2019년 앤아더스토리즈가 글로벌 체인지 어워드 시상식에서 스트랩 샌들과 클러치를 선보였고, 지난해 H&M이 비제아와 손잡고 의류 라인을 출시했다.
하운지(한지 가죽)
닥나무 껍질로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종이인 한지에 면, 레이온 등 천연섬유를 합성한 가죽. 국내 원단 회사인 한원물산에서 개발했다.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데다 생활 방수 기능을 갖췄고, 면과 종이가 주재료이기 때문에 버려도 땅속에서 쉽게 분해되는 친환경 소재다. 지난해 국내 패션 브랜드 스튜디오 톰보이가 하운지로 만든 스커트와 팬츠, 블라우스를 출시해 화제를 모았다.
애플 스킨(사과 가죽)
사과 농장에서 폐기된 사과 껍질을 재활용해 만든 가죽. 가볍고 튼튼하며 견고한 사용감이 특징이다. 패션 브랜드 타미힐피거와 헤지스에서는 사과 가죽을 활용한 스니커즈를 출시했고, 마르헨제이와 에끌라토 등은 사과 가죽을 사용한 친환경 가방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