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나를 설명해야만 하는 순간을 자주 마주한다. 그럴 때 유용한 것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켜켜이 쌓아온 인생을 종이 한 장으로 설명하는 게 서글프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타인에게 내가 얼마나 성실히 살아왔는지,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이해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다. 배우에게는 필모그래피가 그렇다. 데뷔 후부터 출연한 작품 수와 장르의 다양성 등을 보여주는 필모그래피는 곧 배우를 설명하는 지표가 된다.
1995년 극단 목화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장영남은 26년의 세월 동안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때로는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엄마였고, 때로는 누군가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인생 선배였다. 최근 영화 <F20>에서 아들의 병을 숨기고 싶은 엄마 ‘애란’ 역을 맡아 조현병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고민이 많았어요. 아픔을 겪는 분들이 있으니까 쉽게 다루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작가님이 써놓은 기획 의도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어요.”
기획 의도는 이렇다. “세상의 누구나 미쳐 있다. 휴대폰에 미쳐 있기도 하고 주식에 미쳐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편견에 갇혀 누군가를 의심하고 차별하고 있다. 언젠가 그것들이 칼날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편견과 차별로 소외되고 아픔을 겪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출연을 결정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이와 동시에 장영남은 실종됐던 국정원 최고의 현장 요원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내부 배신자를 찾기 위해 조직으로 복귀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MBC 드라마 <검은태양>에서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국정원 최초의 여성 차장 ‘도진숙’ 역으로 열연 중이다. 그녀는 휘몰아치는 전개 속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표정과 범접할 수 없는 오라로 극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검은태양>은 촬영 막바지에 접어들었어요. 촬영 스케줄이 타이트해 모두가 피곤할 법도 한데 현장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요. 저는 캐릭터상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이 많은데 주인공인 남궁민 배우는 액션 신이 많아 미안할 때도 있어요. 우스갯소리로 ‘나는 너무 편하게 촬영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한 적도 있다니까요.(웃음)”
예전에 연기를 잠시 쉰 적이 있어요. 1년 동안 다른 일을 하다 다 무대로 돌아왔는데 너무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했어요. 그 때부터 흔들리지 않고 치열하게 연기했어요. 그러면서 배우로서 자신감을 얻게 됐어요.
장영남은 언젠가는 액션을 소화하는 배역을 맡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10대 때부터 연기를 시작해 약 30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연기가 재미있고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다. 연기가 좋아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던 10대 소녀 장영남이 가졌던 그 마음 그대로다. 물론 워낙 긴 세월이기에 잠시 연기가 아닌 다른 곳에 한눈판 적도 있다. 서울예전을 졸업하고 극단에서 활동했던 때다. 꿈과 현실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20대의 장영남은 극단을 나와 다른 직업을 찾았다.
“어느 날, 저 자신이 어른답지 못하게 사는 것 같았어요. 아침에 나가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데 수입은 변변치 않은 현실이 힘들었죠. 극단에서 나와 옷 가게에 취직했는데 수입이 꽤 좋았어요. 제가 장사 수완이 있더라고요.(웃음) 그런데 되돌아보면 연기가 그리웠던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는데 그때마다 공연을 보러 갔거든요. 하루는 우연히 공연장에서 은사님을 만났는데 제게 ‘너 뭐 하는 거니? 어서 극단으로 돌아와’라고 하시더라고요. 바로 극단으로 돌아갔죠. 너무 행복했어요.”
제일 좋아하는 곳으로 돌아온 장영남은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1인 6역을 맡아 동분서주하는 상황에서도 행복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당시 우연히 만났던 은사님의 말 한마디 덕분에 다시 연기를 할 수 있었다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후로 주변의 것들이 저를 힘들게 해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연기하는 순간이 좋았고, 내가 좋아서 선택한 연기를 외부 요인으로 포기하는 게 아깝더라고요. 그때부터 치열하게 연기했어요.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용기 있게 도전하고 최선을 다했죠. 그러면서 배우로서 자신감을 얻었어요.”
목표가 명확해지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단순명료했다. 주어진 것들을 성실하게 수행하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흘렀고 자연스레 맡는 역할의 크기도 커졌다. 그러데 오히려 40대에 접어들고 생각이 복잡해졌다.
“연기만 생각하고 단순하게 살았던 제 인생에 ‘자녀’라는 새로운 존재가 생겼어요. 그 후 변화된 제 삶이 낯설더라고요.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졌죠. 그런데 생각을 많이 해서 좋을 게 없더라고요. 요즘엔 최대한 나를 단순화하려고 해요. 구슬을 이용한 DIY를 하면서 무념의 시간을 갖기도 하죠. 작은 구슬을 핀셋으로 집어 종이 위에 붙이면서 모형을 만드는 작업인데, 하면 할수록 머리가 맑아져요.”
장영남은 때론 속상한 날도 있고 좋은 날도 있다며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다양한 감정이 하나하나 쌓이고 내가 다듬어지면서 어른이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우리의 인생이란 의미다.
“대중에게 늘 건강하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에 늘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해요. 시간이 흐른 뒤 사람들이 저를 ‘진심으로 연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배우는 누군가한테 위안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누군가 제 연기를 보고 위안을 받았다고 하면 배우로서 행복해요. 그들을 보면서 저 또한 위로를 받기도 하고요.”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아요. 생각이 많아져 심적으로 힘들었던 때도 있죠. 근데 어쩌겠어요. 내 일이고 내 가정이고 내 아이인걸요. 내 인생에 생긴 변화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져요.
생각을 단순화하는 이유
장영남은 또다시 태어난다면 배우로 살겠냐는 질문에 “아니요”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떤 미물로도 또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 이번 생에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장영남은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한다. 연기뿐만 아니라 가정과 육아에서도 그렇다. 그녀는 지난 2011년 7살 연하의 연극연출가와 백년가약을 맺은 뒤, 2014년 첫아들을 품에 안았다. 쉬지 않고 작품에 출연하며 지방 촬영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지만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육아를 한다.
“일할 땐 친정어머니가 도와주시지만 대부분 제가 아이를 돌보려고 노력해요. 늘 일과 육아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과정에서 숨이 차고 허덕거리지만, 천천히 적응하고 있어요.”
장영남에게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방법을 물었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워킹맘이 하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생각과 감정을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수록 생각에 함몰될 뿐이란다. 그녀 역시 마음의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친 경험이 있다.
“생각이 많아지니 점점 더 우울해졌어요. 심적으로 힘드니까 바로 연기에 지장이 생기더라고요. 연기에 확신이 없어 ‘내가 연기를 제대로 하고 있나?’라며 주변 눈치를 보곤 했어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죠.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자고요. 여전히 일과 가정을 동시에 챙기는 것이 어렵지만 어쩌겠어요. 나의 일이고 나의 가정이고 나의 아이인걸요. 나의 변화를 받아들이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와요.”
장영남은 요즘도 촬영을 끝내고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아들의 책가방을 열어 알림장을 확인해 준비물을 잘 챙겼는지 체크한다. 육아는 힘들지만 아들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다는 그녀다.
“모든 엄마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아들이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해요. 혼낼 땐 무섭게 혼내지만 어떤 것보다 자식이 먼저인 평범한 엄마죠. 아들은 시크하면서도 정이 많은 편이에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아는 것 같아요. 제가 새벽에 촬영 스케줄이 있으면 ‘엄마가 잠을 조금밖에 못 자서 힘들겠네’라고 말하고, 샤인머스캣을 반으로 잘라 이쑤시개까지 꽂아 도시락을 싸줘요. 제가 농담으로 ‘엄마한테 남자는 너밖에 없다’고 해요.(웃음) 그러면 남편은 ‘엄마와 아들이 천생연분’이라며 웃어요.”
최근 장영남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의 교육에 관심이 생겼다. 무엇이든 간에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이 우선이라 “일등이 아니어도 된다. 중간만 하자”라고 말했던 그녀지만 주위를 살펴보니 생각보다 초등학생들의 수준이 높아 놀랐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저는 아들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좋겠어요. 그런데 막상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니까 공부에 손을 놓고 있긴 어렵더라고요. 뛰어나지 않아도 되지만 실력이 뒤처져 친구들 사이에서 위축될까 봐 걱정됐어요. 그래서 아들에게 온라인으로 하는 영어 과외를하라고 권유했는데, 처음엔 하기 싫다더니 요즘엔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아요.”
배우 엄마와 연극연출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당연히 예술의 피를 물려받았을 터다. 장영남에게 아들이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냐고 물었다. 고민할 틈도 없이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들에게 자질이 있다면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거든요. 꼭 연기가 아니어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도전하고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열심히’가 기본이라는 조언도 해주고 싶고요. 보이는 게 중요한 세상이라 결과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거든요. 꼭 결과가 좋지 않아도 괜찮아요. 시간이 오래 걸려도 열심히 한다면 엄마로서 믿어주고 싶어요.”
장영남은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라고 했다. 받아들이지 않고 대척하면 부러지더라는 현실적 조언도 전했다. 유연하게 사는 것,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