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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미학, 안창림

유도선수 안창림은 일본의 전국 대회에서 첫 우승을 했던 부도칸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On August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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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운동선수는 평정심을 유지해야 해요. 로봇처럼 생각하고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운동선수가 되려고 해요.”

안창림 선수에겐 남다름이 있다. 일본으로 귀화를 거부하고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된 재일 교포 3세라는 것. 2013년 부도칸에서 열린 전일본학생유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태극기를 달고 한국 국가대표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던 청년은 그로부터 8년 후 태극마크를 달고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안창림은 2020 도쿄 올림픽 유도 남자 73kg급 동메달 결정전에서 루스탐 오루조프 (아제르바이잔)를 상대로 절반승을 거뒀다. 경기 종료 7초를 남기고 한팔 업어치기를 성공하며 극적으로 메달을 획득했다. 그의 메달 획득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라운드에서 2016 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파비오 바실(이탈리아)을 상대했고, 16강전에서는 키크마틸로크 투라에프(우즈베키스탄)의 거친 플레이로 코피를 흘리며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메달 결정전까지 4차례 연장전 승부를 펼쳤다. 준결승에선 연장 접전 끝에 반칙패를 당했으나 동메달 결정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시상대에 올랐을 때 ‘금메달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아쉬움이 있었죠. 목표했던 결과가 아니라 아쉽지만 후회는 없어요. 최선을 다할 것이란 목표는 달성했거든요. 저는 최선을 다했고 결과는 제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받아들였어요.”

담담한 말투였다. 물론 안창림이 처음부터 담담했던 것은 아니다. 2016년 첫 출전했던 리우 올림픽에서, 16강에서 탈락해 고배를 마셨을 땐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매일 울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코치를 만나서, 자신을 기다리는 팬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려서부터 시합에서 패할 때마다 인생이 끝났다는 듯이 울었어요.(웃음) 승부욕이 강해서 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리우 올림픽이 끝나고 점점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깨쳤어요. 신기하게도 그 이후로 운동에 대한 동기가 더 강해졌어요.”

안창림은 지난 3년간 독하게 운동만 했다. 모든 행위의 기준을 운동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에 두고 판단했다. 훈련과 수면 스케줄, 식단까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그래야 도쿄 올림픽에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리우 올림픽을 끝내고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되는 일들이 많았어요. 사실 리우 올림픽 전에는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독하게 훈련했거든요. 그런데도 패한 것을 보면 승패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인 과정을 완벽하게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면 패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때부터 운동부터 식단, 수면까지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관리했어요. 이 시기엔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먹어야 체력이 좋아지는지, 얼마나 자야 컨디션이 좋아지는 등을 결정했죠.”

감정을 절제하고 실력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사소한 행동을 할 때도 조심했다. 혹여나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산책할 땐 발을 다칠까 봐 운동화를 신고, 손을 씻을 땐 손목을 다칠까 봐 주의했다.

“제가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유일하게 소비하는 게 식비예요. 몸을 써야 하니까 먹는 것도 중요해요. 술은 몸 관리 차원에서 5년 전부터 거의 마시지 않고, 몸에 좋다는 게 있으면 해외 배송을 시켜서 먹어볼 만큼 여러 시도를 하면서 내 몸에 맞는 음식을 찾았어요. 흰밥과 연어, 소고기, 오트밀, 채소를 먹었을 때 컨디션이 가장 좋더라고요.”

안창림이 절제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불교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다. 지난 2019년 목 디스크로 수술을 하고 일본에서 재활 운동을 하면서 6개월 동안 동생과 함께 지냈는데, 매일 절에 가는 동생을 보고 호기심에 따라나선 것이 시작이었다.

“동생이 매일 새벽 5시에 집에서 나가길래 어디를 가냐고 물었더니 새벽 6시에 명상을 하는 절에 갔다 온대요. 얼마나 좋길래 매일 가나 싶어서 하루는 따라나섰어요. 명상을 하고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는데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그 후로 화를 내는 일이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줄었어요. 곡선을 그리던 감정선이 직선으로 바뀐 느낌이었죠.”

그 후 스트레스를 푸는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산책한 후 책을 읽고,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본다. 소설 <침묵 1966>이 원작인 영화 <사일런스>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영화 <대부2> <인턴>으로 유명한 배우 로버트 드 니로를 좋아한단다. 영화뿐만 아니라 책과도 친하게 지낸다.

“어려서 할아버지 댁에 가면 집 안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어요.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이 항상 책을 읽고 계셔서 어렸을 땐 어른이 되면 항상 책을 읽는 줄 알았어요. 그 영향 때문에 저도 책을 자주 읽어요. 주로 소설을 많이 읽는데 이사카 코타로를 좋아하고, 한국 작가의 책 중에선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정현주), <법정 마음의 온도>(김옥림), <말그릇>(김윤나)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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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셔츠 모두 아이다스 오리지널.

승부욕까지 부전자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안창림은 가라테 도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5살에 가라테를 시작했다.

“어렸을 땐 카라테와 유도를 같이 했었어요. 아버지에게 엄격하게 배워서 카라테 실력도 좋은 편이라 대회에 나가면 결승에 진출하곤 했죠. 결승에 올라가면 아버지가 주심이었어요. 카라테 심판위원장으로 활동하셨거든요.”

그에게 아버지는 누구보다 엄한 스승이다. 워낙 엄하게 가르치는 탓에 가라테에 흥미를 잃었다고. 축구로 전향했다가 단체 운동보다는 개인 운동이 잘 맞는다는 판단하에 유도로 종목을 바꿨다.

“재일 교포 사회에 엄격하고 승부욕이 강한 부모님이 많은데, 저희 아버지도 그런 편이었어요. 중학교 때 유도를 시작했는데 조금만 흐트러져도 아버지에게 많이 혼났어요. 가라테 도장에서 매트를 깔고 개인 코치하고 둘이 훈련했는데, 중학생이 어른에게 상대될 리 없잖아요. 힘들어서 화나고, 져서 화나고 했었죠.(웃음)”

평생을 무도인으로 살아온 아버지는 안창림에게 늘 최선을 강조했다. 중 2 때 출전한 시 대회 결승에서 상대에게 방심해 패한 날 아버지는 자신이 선물했던 안창림의 도복을 찢어 방에 걸어놓으며 아들을 일깨웠다고 한다.

엄격했던 아버지는 스스럼없이 안창림의 장난을 받아줄 정도로 친근해졌다. 하지만 최근 그의 동메달 획득 소식을 듣고 화가 났었단다.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버지의 승부욕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메달 결정전을 끝내고 집에 전화를 걸었어요. 울고 계시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대요. 이유를 물었더니 화가 나서 집에서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놀라서 ‘화났다고요?’라고 반문했더니 어머니가 ‘잘 말할게’라며 전화를 끊었어요. 그 후에 아버지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어머니가 시킨 것 같아요.(웃음)”

아버지의 승부욕에 대해 말하던 안창림은 자신 역시 아버지의 승부욕을 닮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언제나 스스로의 부족한 면이 보이고, 성장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 동메달리스트가 됐지만 여전히 성장을 꿈꾸는 그는 지금은 더 높은 도약을 위해 쉬어야 할 타이밍이라고 설명했다.

“저는 온·오프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휴식할 땐 확실히 쉬어야 더 열심히 운동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가는 거예요. 저를 향한 관심이 짧은 순간이라는 것을 알거든요. 저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열심히 운동해야죠. 파리 올림픽에선 더 잘할 것 같아요. 한 살씩 나이를 먹을수록 더 자신 있어요. 운동선수들이 기술력보다 체력 저하로 은퇴하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꾸준히 체력 단련을 해왔거든요. 지금보다 더 철저히 몸 관리를 해서 파리 올림픽에서 베테랑의 좋은 점만 보여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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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림은 재일교포 3세로 일본의 귀화 권유를 뿌리치고 한국의 국가대표가 됐다.


안창림은 동메달전을 마친 후 “제 모든 정신의 기본은 재일 교포 사회에서 나왔습니다. 재일 교포는 일본에선 한국인 취급을 받고, 한국에선 일본인 취급을 받아요. 나를 보고 재일 교포 운동선수들이나 어린아이들이 용기를 내서 큰일을 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교토에 있는 조선학교인 교토조선제1초급학교를 나온 그는 재일 교포와 조선학교에 대한 인식 제고에 관심이 높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기술 위주인 일본의 훈련과 달리 체력과 근력 위주인 한국의 훈련 스타일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또 선수들의 마인드도 달라서 적응이 쉽지 않았죠. 일본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지만 한국에선 위계질서가 우선이더라고요.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재일 교포 사회에서 배운 헝그리 정신과 강인한 정신력 때문이에요. 재일 교포 사회와 조선학교는 저의 정신적 기반이에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명을 걸고 지킨 국적을 잃을 순 없다며 대한민국 국적을 지킨 그는 오히려 한국에 와서 더 상처를 많이 받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재일 교포에 대한 이해의 부재 때문이었다고 말한 그는 재일 교포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설명했다.

“재일 교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에 상처받았던 적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것으로도 편견을 갖고 차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모두를 동등하게 바라보자는 마음이 있죠. 요즘엔 제가 좋은 성적을 거둬서 재일 교포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해요. 저를 통해 재일 교포에 대해 알게 됐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기면 한국에 온 재일 교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제 사명과 같은 것이죠.”

안창림에게 또 다른 꿈을 물었다. 그는 유럽 지역에서 지도자로 살거나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고 답했다. 두가지를 모두 하는 것은 없단다. 한가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다른 하나에 올인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카페를 열게 된다면 커피에 올인해서 어떤 디저트도 없이 오직 커피에만 집중하는 카페를 열고 싶어요. 만약 지도자가 된다면 북유럽 지역에서 활동하고 싶어요. 예전에 실력이 꽤 좋은 북유럽 선수가 올림픽을 앞두고 아내가 임신해서 은퇴한다는 말을 듣고 관심 갖기 시작했어요. 선수 생활을 하지 않아도 생활이 될 만큼 복지가 좋다고 해요. 한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환경이 궁금해요.”

안창림은 여러 경험보다 한 가지를 깊숙이 파서 얻는 경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하나에 집중하면 얻는 깨달음이 하나 이상이라는 것. 22년간 유도를 파온 그는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을까? 그의 다음이 기대되는 이유다.

CREDIT INFO
에디터
김지은
사진
이대원, olympic·combatsportsaddict·olympics 인스타그램
스타일링
최영주
헤어&메이크업
정일&송미(체체쌀롱)
2021년 09월호
2021년 09월호
에디터
김지은
사진
이대원, olympic·combatsportsaddict·olympics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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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주
헤어&메이크업
정일&송미(체체쌀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