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필자는 합성섬유로 된 옷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갑자기 옷장을 헤집은 데는 이유가 있다. 최근 환경 다큐멘터리를 보니 합성섬유를 세탁할 때도 미세 플라스틱이 발생, 식수원과 바다로 흘러가서 인간과 동물을 해친다는 게 아닌가. 더 이상 안 사고 안 버리면 된다 생각했지 기왕에 입는 옷들도 꾸준히 환경을 해칠 수 있다는 건 인지 못 했다.
이 작업의 마지막 문제는 운동복이었다. 요가 같은 운동을 할 때면 근육을 잡아주면서 신축성 좋은 레깅스만 한 것이 없다. 그런데 대체로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스판덱스 소재였다. 순면 레깅스로 교체하려니 새로운 소비가 발생한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넷플릭스 단편영화 <로레나 : 샌들의 마라토너>(2019)를 발견했다.
20대 멕시코인 로레나는 자기 부족 전통 복장인 드레스를 입고, 고무 밑창 달린 샌들을 신고 울트라마라톤(일반 마라톤보다 긴 코스를 달리는 경기)을 한다. 2017년 자국에서 열린 50km 울트라트레일(울트라마라톤과 산악 달리기를 합한 경기) 우승을 차지했고, 유럽과 미국 등지의 울트라마라톤에 참가해 높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로레나는 타라우마라 부족으로, 이들은 50km 이상 달려도 혈압과 심장박동 수가 일정할 만큼 장거리 달리기에 특화된 신체 조건을 가진 걸로 알려졌다. 이런 특성은 타라우마라 부족이 사는 환경과도 무관치 않다. 그들은 심심산골에서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그들에게 달리기는 교통수단이다. 로레나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5시간, 식료품점은 3시간이 걸린다.
집안 여자들 모두 자신이 입는 옷을 직접 만든다. 로레나가 대회에서 입는 치마도 그런 것이다. 극 중 운동화를 선물 받은 로레나는 말한다. “이거 안 쓸 것 같아요. 이런 거 신은 사람들 다 내 뒤에서 뛰던데요.” 영화에 안 나오지만 2019년 미국에서 열린 하프마라톤에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고 참가했을 때 소감 역시 “샌들이 가벼워서 더 편하다. 운동화 신고 뛰니까 미끄러질 것 같더라”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레나 : 샌들의 마라토너>는 최고의 패션 영화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풍경과 음악, 멋진 캐릭터와 더불어 수공예로 만든 멕시코 전통 의상이 줄지어 나온다. 서양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이 걸핏하면 훔쳐다가 ‘보헤미안 스타일’이라고 팔아먹는 자수 드레스의 원전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즉각 온라인쇼핑몰에 들어가 비슷한 스타일을 찾아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남들에게 좋은 것이 내게도 좋지는 않다는 영화의 메시지가 마음에 남는 덕이다.
자기 삶의 경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밖의 것들에 무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살다 보면 호기심이 생기고, 호기심이 생기면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그러다 보면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늘고, 그중 어떤 욕망은 좌절되기 마련이고, 그러면 결핍감이 생긴다. 불필요한 것들에 단호하게 선을 그음으로써 이 불행의 사슬에서 벗어난 인물을 지켜보는 일은 적잖이 위안이 된다.
내 경우는 운동하는 데 꼭 운동복이 필요한가라는 자문이 덤으로 따라왔다. 나는 장바구니에 담아둔 면 쇼츠들을 보류하고 이미 가진 옷 중 편한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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