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란은 전쟁터 같은 연예계에서 20년 넘게 살아남은 방송인 중 하나다. 2001년 제9기 Mnet VJ로 선발돼 연예계에 발을 들인 뒤 MBC <세바퀴>, KBS2 <스타골든벨><스펀지><비타민>, SBS <자기야><진실게임>, TV조선 <아내의 맛> 등 각 방송사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방송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고용 불안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선택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이 있다는 의미다. 특유의 밝음과 긍정적인 태도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며 진행 능력까지 갖춘 멀티플레이어가 바로 장영란이다. 그러나 메인 진행자가 아닌 패널이나 게스트로 활약했기에 역량이 제대로 드러난 적은 없다.
그랬던 그녀가 <네고왕 2>에서 방송인 장영란의 힘을 제대로 보여줬다. 장영란에게 <네고왕 2> 출연은 도전이었다. 데뷔 후 처음으로 메인 진행자로 나선 데다 황광희가 진행을 맡았던 시즌 1의 흥행도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네고왕> 제작진이 미팅하자고 했을 때 감사했지만 한편으로 ‘난 안 돼’라고 생각했어요. 광희가 시즌 1에서 워낙 잘했는데, 아이를 키우는 44살의 아줌마인 내가 그만큼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죠.”
하지만 소속사 식구를 비롯해 지인 모두가 그녀에게 도전해보라고 권했다.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단다. 특히 한의사인 남편 한창 씨는 적극적으로 출연을 권유했다.
“남편이 ‘예쁜이가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거예요. 대본이 없으니 오롯이 장영란만의 센스와 매력이 나올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죠. 저를 10년 넘게 봐온 남편은 방송에서 저의 인간적인 면모가 많이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던 것 같아요. 다시 생각해보니 그동안 스스로 제 자신을 ‘44살, 아이 둘의 엄마’라는 틀에 가두고 있었더라고요. 도전이나 발전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렇게 시작한 <네고왕 2>에서 장영란은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노닐었다. 길을 걷다가 만난 시민에게 즉흥적으로 인터뷰를 요청했고 혹여 거절을 당해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방송 초반엔 5명에게 인터뷰를 부탁하면 모두가 거절할 정도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적었지만 후반부엔 20~30대도 그녀를 알아보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촬영은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어요. 녹화 다음 날엔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녹초가 됐는데도 방송 분량은 20분이었던 적도 있는데 그래도 즐거웠어요. 육아, 집안일, 내조 같은 일들을 잊을 수 있었거든요. 엄마 장영란이 아닌 방송인 장영란으로 지낼 수 있었어요.”
장영란의 결심을 도왔던 남편은 방송 이후 든든한 지원군이자 냉정한 시청자가 됐다. 매일 아침 장영란에게 한약을 먹이며 “잔 다르크처럼 싸워서 이겨”라면서 네고에 성공하라고 응원했지만, 방송 내용이 재미없을 땐 솔직한 평가를 했다.
“남편은 방송이 업로드되면 꼭 챙겨봤는데 재미있는 방송은 깔깔 웃으면서 10번씩 보더라고요. 제게 ‘어떻게 그런 멘트를 해?’라면서 칭찬해주는데 제가 더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죠. 제가 네고에 성공하면 남편이 가장 행복해했어요. 그런데 재미없을 땐 누구보다 냉정해요.(웃음) 방송을 보면서 웃질 않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혼자서 ‘이번 방송은 재미가 덜 하구나’라고 느끼곤 했죠.”
장영란은 최근 첫 광고 촬영을 했다. <네고왕 2> 공약 중 하나였던 떡볶이 광고가 성사된 것. 그녀는 첫 광고 촬영을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동안 저는 스스로 나는 마지막에 불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늘 작가들이 메인 출연자들을 먼저 챙기고 저를 마지막으로 불렀거든요. 그래서 튀지 않고 끝자리에 앉아 있는 게 저라고 여겼죠. 그런데 광고 촬영을 갔는데 제가 앉을 의자를 준비해주면서 챙겨주니까 어색하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어요. 이런 순간이 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죠. 요즘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44살이라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열정을 되찾았죠.”
<네고왕 2> 출연 이후 장영란은 SBS FiL 예능 <평생동안-여자플러스4>에서 또 한 번 솔직한 모습으로 화제를 모았다. 질 건강을 주제로 한 방송에서 “질염과 방광염을 앓았는데 한번 걸리는 게 어렵지 그다음부턴 몸이 조금만 피곤해도 냉이 나오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더라”고 하는가 하면 “고된 육아와 힘든 일상으로 질 건조를 앓았다. 그로 인해 남편과 (잠)자리를 피하게 됐고 결국 선택한 게 윤활제였다”며 가감 없이 말했다. 그녀의 솔직함에 마치 ‘옆집 언니’ 같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장영란의 호감도가 상승한 것은 당연지사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요. 예전에는 저의 솔직함이 부담스러워 비호감 이미지가 생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젠 시대가 바뀌었어요. 젊은 친구들은 재미가 없으면 ‘노잼’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잖아요. 저의 솔직한 모습이 친근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된 거죠.”
방송인이 아닌 엄마의 삶
장영란은 방송은 물론, 육아와 내조까지 남부럽지 않게 해내는 자타 공인 ‘똑순이’다. TV조선 예능 <아내의 맛>에선 남편 한창 씨와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출연진에게 “쇼윈도 부부가 아니냐?”라는 놀림을 받는가 하면, 채널A 예능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에선 오은영 박사에게 육아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는 평가를 받는 등 일이면 일, 사랑이면 사랑, 육아면 육아까지 만능으로 해내는 그녀는 3040 여성들에게 ‘워너비’로 통하기 시작했다.
“저는 빈틈이 많은 사람이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해요. 이 모습을 좋게 봐주셔서 무척 감사해요.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제게 ‘언니 팬이에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가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어서 행복해요.”
그러나 장영란 역시 워킹맘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 첫째(딸) 지우와 둘째(아들) 준우의 육아를 방송에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전적으로 책임져왔다는 그녀다. 그렇게 육아를 시작한 지 어느덧 9년의 시간이 흘렀다.
“워킹맘의 삶이요? 쉽지 않죠.(웃음)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육출(육아 출근)’을 하니까 실질적으로 퇴근이 없잖아요. 항상 피곤하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 없어서 힘들어요. 아기를 낳으니까 여자의 인생이 180도 바뀌더라고요. 아이와 가족을 우선시하면서 내 자신은 뒷전이 됐죠. 남편은 제게 엄마가 되고 나서 강한 사람이 됐다고 해요. 예전엔 병뚜껑도 열지 못했는데 이젠 혼자 가구도 옮긴다면서요.(웃음)”
장영란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챙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직업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모든 것을 해내는 스스로가 대견하단다.
“엄마가 되고 나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저 자신이 멋있어요. 그 전까진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딸 바보인 아빠는 제가 친구랑 술을 마시면 새벽에도 데리러 올 정도로 다정하셨고, 엄마 역시 저를 살뜰하게 돌봐주셨어요. 결혼한 이후 남편이 그 역할을 대신했죠. 그래서인지 약한 면이 있었는데 엄마가 되니까 달라지더라고요.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나면 마음이 뿌듯해요.”
장영란은 엄마로서도 최선을 다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몸은 고단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엄마로서 삶에 집중했다. 현관문을 들어선 후엔 휴대폰도 보지 않고, 앞치마를 두른 후 자녀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려고 했단다.
“아무리 적은 시간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땐 더 많이 안아주고 뽀뽀해주면서 아이들에게 집중하려고 했어요. 제가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육아책만큼은 참고 읽었거든요.(웃음) 모든 육아책에서 말하는 공통점은 아이를 뜨겁게 안아주고 믿어주고 사랑하라는 것이었어요. 아이들과 상호작용을 해야 공감 지수가 높아지고 애착 형성도 잘된다고 해요. 그래서일까요? 우리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도 강하고 자존감도 높아요.”
스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소소하게 방송 출연을 하고 육아하고 살림하는 아줌마인 제가 좋았어요. 그런데 최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44살 아줌마라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대화의 힘
그녀 역시 자녀들이 어릴 땐 육아 스트레스가 있었다. ‘육퇴(육아 퇴근)’를 한 후, 매운 음식을 안주 삼아 맥주 한잔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때로는 체력적 한계로 예민함이 커져 사소한 일로 남편과 다투기도 했단다. 그런데 자녀들이 크면서 다툼 횟수는 자연스레 줄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남편이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남편이 육아를 도와주기 어려웠는데, 이제 아이들이 커서 남편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어요. 남편이 아이들의 숙제를 봐주는 동안 저는 준비물을 챙기는 식으로 분담해요. 육아를 분담하면서 대화가 더 풍성해지고 절로 스트레스도 풀리더라고요.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대화 같아요.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크지 않아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아도 돼요. 그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해소가 돼요.”
장영란·한창 부부는 연예계를 대표하는 잉꼬부부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부부의 ‘럽스타그램’이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두 사람은 자녀 앞에서 포옹 등 스킨십을 자주 한단다. 아빠와 엄마가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들 준우가 질투하지만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고. 사이좋은 부부관계의 비결은 말 한마디에 있었다.
“우리 부부가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고생했어’ ‘고마워’ ‘사랑해’예요. 의도적으로 하는 건 아닌데 서로 표현을 많이 해요. 남편이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왔는데 저도 모르게 ‘수고했어’라고 말할 정도로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말이에요. 빈말 같지만 그 한마디가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줘요.”
처음부터 두 사람이 말의 힘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SBS 예능 <진실게임>에서 인연을 맺어 부부가 되기까지 10년이란 시간 동안 서서히 깨달았다. 특히 부부가 함께 방송에 출연할 때면 말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더욱 깨닫게 된단다. 한창 씨는 방송에 동반 출연할 때마다 장영란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건넨다.
“남편과 함께 녹화를 마치면 남편은 제게 대단하다고 해요. 방송 녹화가 쉬운 일이 아니라면서 엄지를 척 올리더라고요. TV에는 제가 떠들고 웃는 모습만 나오니까 녹화를 가서 놀다 온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저의 직업을 이해해주니까 힘이 돼요. 또 남편이 공중보건의로 근무할 때 육아를 함께해서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도 알아요. 육아보다 환자 100명을 보는 것이 낫다고 말하면서 육아하는 엄마 모두 대단하다며 저를 인정해주죠. 서로의 힘듦을 인정하고 이해하니까 사이가 더욱 돈독해지더라고요.”
장영란은 남편 한창 씨를 만나 결혼한 것을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꼽았다. 첫아이를 낳고 모유 수유를 한 것과 첫 광고 촬영 역시 자신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사실 제가 욕심이 많지 않아서 스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소소하게 방송 출연을 하고 육아하고 살림하는 아줌마인 제가 좋거든요. 그런데 최근 저를 좋아하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다만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잘 유지하려고 해요. 일에만 몰두하다가 가족에게 소홀히 하고 싶지 않거든요.”
장영란은 가족이 있어야 내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고의 방송인이란 타이틀보다 가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그녀다. 그래야 방송인 장영란 또한 잘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우리 부부관계가 좋아야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고, 저 또한 방송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께서 ‘가화만사성’을 강조하셨는데, 제 가정을 꾸리니 가화만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더라고요.”
장영란은 10년 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장영란의 롱런은 우연이 아니다. 바야흐로 장영란 전성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