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엔딩 크레디트를 보는데 눈물이 나려고 했어요. 연기했던 과정이 쉽지 않아서 아쉬움이 더 커요. 여태까지 출연했던 작품 중 가장 떠나보내기 힘들었어요.”
올 상반기 브라운관을 뜨겁게 달군 tvN 드라마 <빈센조>. 매회 시청률을 경신한 데 이어 최종회에서 14.6%(닐슨 코리아 기준)라는 최고치를 기록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빈센조>의 중심에는 배우 송중기가 있었다. 그는 극 중 마피아 변호사 ‘빈센조’ 역을 맡아 사회의 악을 처단하며 시청자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그동안 주로 정의감 넘치고 선한 캐릭터를 맡았던 송중기의 악역 도전은 시작부터 관심을 모았고, 몰입도 높은 연기력은 연신 호평을 자아냈다.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는 주제는 선한 자만이 승리한다는 클리셰를 뒤엎어 시청자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송중기는 <빈센조>에서 처음으로 악인을 연기했다. ‘처음’이라는 단어에 따라붙는 일종의 부담감이 있었고, 악인으로 분해 또 다른 악인을 잔혹하게 처단하는 스토리라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크고 작은 어려움에 직면했던 작품이에요. 악한 이들에 맞서는 또 다른 악인의 역할, 그 캐릭터 안에 담긴 코믹스러운 요소까지 소화해내야 했거든요. 개인적으로 고민이 많았고, 촬영 내내 제 연기에 부족함을 느껴서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듭했어요.”
악인을 처단하는 악인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헷갈리는 지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정의를 위해 싸웠다고 하기엔 어느 정도 흑화된 캐릭터였고, 못된 캐릭터라고 여기기엔 악한 이들을 제거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전개에 시원한 사이다를 마신 것 같다는 평이 이어졌지만, 악인을 응원하게 만드는 데 대한 인간적인 회의가 따랐단다. 때문에 ‘다크 히어로’라는 극 중 캐릭터의 별명을 부르는 것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내놨다.
“악하게 살아온 캐릭터들을 처단했다는 것에 대해선 만족감이 있지만, 쓰레기를 치우는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결과적으로 봤을 때 ‘빈센조’ 또한 악인이니까요. 물론 더 잔혹하고 악랄하게 죄에 대한 벌을 내렸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청자의 의견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대신 복수해준 저를 영웅이라고 칭하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청자의 반응을 보고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헷갈린 적이 있어요. 이런 캐릭터를 응원하게 만드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죠.”
작품이 끝난 지금도 송중기의 고민은 진행형이다. 연기만큼은 쉽게 만족해선 안 된다는 그의 철학에 따른 것이다. 그렇기에 코믹적인 요소가 담긴 캐릭터를 제안받았을 때 스스로에게 ‘할 수 있겠냐’는 물음을 수없이 던졌다. 자문자답을 거듭한 후 도전한 캐릭터였기에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매회 촬영에 임했다. 송중기는 본인의 연기를 두고 10점 만점에 5점짜리였다고 평가했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코믹 연기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어요. 액션은 해본 적이 있지만 코믹한 연기 경험은 적었거든요. 이전에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캐릭터라는 점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스스로 잘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 책임감
송중기에게 현장은 단순히 일터의 개념이 아니다. 함께 호흡을 맞추는 동료들의 장점을 배우는 따뜻한 공간이다. 작품마다 각기 다른 현장, 배우들과의 만남에서 새로움을 느끼는 그다.
“시간이 갈수록 새로 깨닫는 점이 많아요. 코미디를 잘하는 선배님들, 동료 배우들과 합을 맞추면서 코미디라는 장르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았죠. 모든 감정 연기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걸 알게됐어요. 박재범 작가님도 ‘코미디는 권위 있는 인물이 망가질 때 시작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차!’ 싶었어요.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부분을 뒤집는 게 현장이라고 생각해요.”
송중기는 동료 배우, 스태프까지 살뜰히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유튜브 채널 <십오야>에 <빈센조> 주역들이 출연했을 당시 후배에게 자신의 센터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빈센조> 출연진도 송중기를 ‘송반장’으로 칭하며 촬영 현장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고 입을 모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지만 주연이라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빈센조>라는 한 작품을 만드는 데 노력한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저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고 하는 반응이 있었는데 저와 결이 맞는 박재범 작가님, 김희원 감독님을 만나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제 안에 있는 새로운 표정을 꺼내기까지 스태프들의 공이 커요. 역할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와 표현할 수 있는 현장을 만들어주셔서 마음 놓고 보여줄 수 있었어요. 또 호흡을 맞춘 배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저보다 한참 어린 곽동연 배우는 애드리브 하나까지 고민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친구예요. 동연 씨의 준비성과 표현력에 질투가 나기도 했어요.”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2019)로 인연을 맺은 배우 김성철의 ‘황민성’ 역 캐스팅 배경에도 송중기의 추천이 있었다. 김성철이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020) 이후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출연을 부탁했다고. 김성철은 특별 출연으로 합류했지만 극 중 송중기와 코믹한 브로맨스로 시청자의 눈길을 끈 ‘신스틸러’로 자리매김했다.
“특별 출연을 부탁한 것치고 분량이 많았는데 흔쾌히 작품에 합류해줘 고마웠어요. 대본에 없는 신에 출연해달라고 하기도 했는데 직접 의상까지 준비해 사진을 찍어 보내주더라고요.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 예뻤어요. 성철 씨에게는 두고두고 갚을 게 많다고 생각해요.”
빌런 ‘장준우’ 역을 맡은 그룹 2PM 출신 배우 옥택연을 두고는 ‘분위기 메이커’라고 말했다. 옥택연은 극 중에서 송중기와 팽팽한 대립 구도로 보는 이들에게 긴장감을 선사했다.
“택연 씨는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선한 사람이 악인을 연기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현장 분위기까지 신경 쓴 친구예요. 저는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라 제가 없는 현장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지 걱정했는데 택연 씨가 유쾌하게 만들어줘 든든했어요.”
극 중 러브라인을 형성했던 배우 전여빈을 향해선 ‘엄청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앞서 전여빈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송중기의 배려 덕분에 드라마 첫 주연의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바 있다.
“여빈 씨에게 밥을 많이 사준 효과가 있는 거 같네요(웃음). 제가 누구를 평가할 자격은 안 되지만 유독 저를 잘 따르고 배우려고 하는 모습이 예뻐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거 같아요. 여빈 씨를 보면서 제가 처음 주인공을 맡았을 때의 부담감이 떠올라 잘해주고 싶기도 했고요. 그리고 워낙 배려심이 많은 친구고 천성이 착해요. 앞으로 엄청난 배우가 될 친구이기도 하고요. 그런 배우의 시작을 함께했다는 것만으로 영광이고요. 사인을 미리 받아둘걸 그랬나봐요.”
송중기는 인터뷰 중 <빈센조> 방영 도중 일었던 중국 비빔밥 PPL 논란을 언급했다. 작품 속 크고 작은 잡음에 대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며 사과가 필요하다면 먼저 고개를 숙이고, 해명해야 한다면 설명을 주저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작품에 참여한 구성원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실망감을 안겨드려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시청자에게 최고의 재미와 감동만을 드려야 하는데 충분히 실망하고 비판할 사안이라고 생각해요. 논란이 일었을 때 앞으로 노력해서 방송을 재미있게 만들어 시청자에게 보답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했어요. 또 언젠가 한번은 짚고 넘어가 사과의 뜻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해당 사안에 대해 엄중히 생각하고 신경을 많이 썼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유독 외모 이야기가 많이 나온 거 같아요. 그동안 꾀죄죄한 역할만 해서 이번 역할을 좋게 봐주신 거 같아요.
“이제 저도 제법 나이가 찼어요”
송중기의 연기력만큼이나 화제가 됐던 게 ‘비주얼’이다. 그는 전작인 영화 <군함도>(2017),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등에서 보여준 헝클어진 모습을 벗어던지고 멀끔한 비주얼을 뽐내 여심을 뒤흔들었다. 제2의 리즈 시절을 맞았다는 평도 잇따랐다.
“리즈 시절이라니, 저도 이제 제법 나이가 찼는걸요(웃음). 이번 작품을 하면서 유독 외모 이야기가 많이 나온 거 같아요. 그동안 팬들이 ‘왜 매번 꾀죄죄한 역할만 하냐’고 말씀하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팬과 시청자들이 이번 역할을 좋게 봐주신 거 같아요. 저 역시 즐기면서 했어요.”
송중기는 어떤 작품이든 역할이 가진 무게와 배우로서 작품 완성도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영화 <쌍화점>으로 얼굴을 알린 이후 데뷔 14년 차 굴지의 배우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고. 상업적인 작품이 관객에게 주어야 할 가치에 대해 잊지 않고, 작품으로 대중을 만나기까지 여러 가지 고민을 거듭한단다.
“작품을 선택할 때 상업적 가치가 강한지, 예술적 가치가 강한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아요. 어찌 됐든 상업적 가치는 주연배우로서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요소예요. 작품에 투자한 비용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책임한 배우죠. 관객에게 ‘힘들게 찍었으니 잘 봐달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재미있게 만들어야 재미있게 봐주시는 거 아니겠어요?”
작품 선택이 탁월하다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서는 ‘끌리는 데 답이 있다’는 간결한 답을 내놨다.
“작품 선정을 두고 소속사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런데 끌리지 않는 작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마음이 가는 쪽을 택하는 편이에요. 그런 점에서 <빈센조>는 작품 선택의 폭을 넓혀준 작품이에요. 확신이 없는 상태로 맡은 캐릭터였는데 즐겁고 행복했거든요.”
MBC 드라마 <트리플>(2009), KBS2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2010), 영화 <늑대소년>(2012) 등으로 얻었던 ‘꽃미남’ 타이틀을 깨고 지금의 남성미 강한 모습을 갖기까지 그의 작품 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액션이 가미된 작품에 매력을 느끼게 된 지점은 무엇일까?
“고의적인 건 아니었어요. 캐릭터의 내면이 어떤 모습인지를 가장 크게 고려해요. 외면이나 어떤 장르인지는 부차적으로 고민하고요. 외적인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는 역할보다 내적으로 꽉 찬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는 거 같아요.”
송중기는 앞서 지난 2월 넷플릭스로 개봉한 영화 <승리호>에 이어 <빈센조>의 흥행으로 흥행 2연타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형 SF영화로 이름을 알렸던 <승리호>는 공개되자마자 스트리밍 영상 콘텐츠 순위에서 전 세계 1위를 차지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송중기는 한 해 두 작품의 연이은 성공 비결을 묻자 ‘성공한 것이냐’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서 종종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데 감사한 마음이에요.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은 ‘작품을 보니 현장 분위기가 좋아 보인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단합이 작품에 스며들었다는 것만큼 극찬이 있을까 싶어요.”
송중기는 이번 작품을 마치고 영화 <보고타> 촬영에 돌입한다. <보고타>는 1990년대 콜롬비아로 이민을 떠난 한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송중기는 낯선 땅에 정착하기 위해 애쓰는 이민자로 분한다.
“코로나19 때문에 중단됐던 영화 촬영이 한국에서 시작돼요. 제가 바꿀 수 없지만 모두가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주연배우로서 어떻게든 잘 마무리하겠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가벼움을 연기해도 무거운 책임감을 바탕으로 하는 배우 송중기. 동료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한다는 그의 말에서 배우로서 느끼는 무게와 좇고 있는 가치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