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오로라 공주>(2013), SBS 드라마 <신기생뎐>(2011) 등 거침없는 스토리라인으로 인기를 끈 임성한 작가가 절필을 선언한 지 6년 만에 TV조선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이하 결사곡)으로 돌아왔다.
30~50대 부부들의 불협화음을 다룬 <결사곡>은 임성한 작가 특유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로 큰 화제를 모았다. 매회 상승세를 나타냈던 시청률은 최종회에서 9.7%까지 올라 TV조선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드라마의 화제성에 힘입어 함께 주목받는 이가 있으니, 30대의 매력적인 여성 ‘부혜령’ 역을 맡은 배우 이가령이다. 임성한 작가는 작품마다 신인이나 무명을 주연으로 기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은 곧 스타 반열에 오르는 등용문을 의미한다.
이번 드라마에서도 ‘임성한이 선택한 신인이 누구인가’가 하나의 관전 포인트로 꼽히기도 했다. 지난 2014년 임성한 작가가 집필한 MBC 드라마 <압구정 백야>에서 주연 물망에 올랐다가 불발됐던 이가령이 드디어 임성한 작가의 작품에 출연한다고 알려지면서 큰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녀는 ‘임성한의 신데렐라’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굴지의 배우들 사이에서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뽐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시청자의 관심에 보답할 수 있는 건 연기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또 어렵게 얻은 기회인데 칭찬에 심취하지 말고 잘해내야 한다고 항상 되뇌고 있어요.”
강렬한 눈 화장, 정갈한 가르마의 쪽머리 등 극 중 이가령 고유의 스타일링은 시청자들 사이에선 ‘연탄 메이크업’이라고 불린다. 다소 과할 수 있는 메이크업을 소화하는 외모, 모델과 같은 비율은 그녀를 향한 관심을 배가시켰다.
“‘너구리 화장법’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어요.(웃음) 짙은 눈 화장은 작가님의 제안이었어요. 제가 맡은 역할이 패션쇼에서 바로 걸어 나온 듯한 무드를 풍겨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제 배역을 부각시키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 덕에 제 이름은 몰라도 ‘눈 화장 짙은 주인공’이라고 알아보는 분들이 많이 생겼어요. 작가님의 전략이 대단하구나 싶어요. 몸매 관리는 지금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요. 오늘 많이 먹으면 내일은 적게 먹는 방식이죠. 식생활에 균형을 맞추는 게 관리 비법이에요.”
이가령에게 있어 현장은 배움의 공간이다.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든든한 선배 배우들과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 사이에서 차근차근 내공을 쌓아가고 있다.
“베테랑 배우들이 모인 자리인데 제가 많이 배워야죠. 작품에 합류하게 된 것도 기회지만, 대선배님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감정을 잘 표현했다고 해도 시청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잘한 연기가 아니잖아요. 가끔 모니터링을 할 때 ‘내가 뭘 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호흡을 맞추는 선배님들, 동료 배우들에게 도움을 청해요.”
이가령은 현장에 있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극 중 부부로 출연하는 배우 성훈, MBC 드라마 <불굴의 차여사>에서 모녀지간으로 출연했다 다시 만난 김보연, 이번 작품을 통해 만나게 된 김응수 등 모든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극 중 호흡을 맞출 일이 많은 성훈 선배님은 ‘츤데레’ 스타일로 챙겨줘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해 제가 편한 마음으로 연기할 수 있게 도와줘요. (성훈과) 예능에 같이 출연했을 때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저를 더 챙겨주려고 하는 게 느껴져서 감사했어요. 그리고 김보연 선생님은 극 중에서 대면할 일이 거의 없는데도 아낌없이 연기 조언을 해주세요. 그뿐만 아니라 힘든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해주셔서 정말 든든한 존재예요. 이태곤 선배님과도 만나는 신이 거의 없다가 한 번 뵈었는데, 현장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운이 좋으신 선배님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모든 분에게 감사해요.”
“임성한 작가의 선택이 맞았다는 걸 보여줄 거예요”
알고 보면 이가령은 올해 데뷔 8년 차를 맞은 배우다. <결사곡>이 첫 주연작으로 알려졌지만 2015년 <불굴의 차여사>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주인공이 사고로 사망하는 스토리로 하차 수순을 밟게 되면서 내막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앞서 <압구정 백야> 주인공 역에 캐스팅됐다가 다른 배우로 교체되는 고배를 마신 뒤 이어진 하차 소식에 ‘하차 배우’라는 지독한 꼬리표가 붙었다.
“연기력이 문제였어요. 준비되지 않은 상황인데 주어진 기회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차와 관련해선 제 잘못이 크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하차’라는 수식어가 끈질기고 지독하더라고요. 현장에 가고 싶은데 불러주는 곳이 없었어요. 배우로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모든 길이 막힌 거예요.”
버티면 기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의 문장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백기 앞에선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이가령 또한 8년간의 무명기를 거치며 ‘이제는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정말 굶어 죽을 거 같았어요. 쉬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생계유지가 어려워졌어요. 또 일을 하지 못하니까 자존감도 무너지고 생기를 잃어가더라고요. 막연한 자신감으로 버텨보기로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몇 년을 기다렸는데 기회가 오지 않는 거면 앞으로도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스스로에게 화가 나더라고요. 연기를 안 하면 뭐 하고 살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했는데 답이 없었어요. 배우로 살지 못하는 인생을 살 자신도 없었고요.”
이가령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항상 떠올리던 얼굴이 있다. 바로 임성한 작가다. 배우로서 활동하기에 부족하다고 느꼈던 때 손을 내밀어준 은인이기 때문이다.
“작가님이 저를 캐스팅하기로 결정한 게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결과적으로 <압구정 백야>에 주연으로 출연하지 못했지만 작가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셨던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작가님이 선택한 작품, 배우들이 전부 승승장구했는데 제가 오점으로 남으면 안 되잖아요. 비록 성공한 배우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연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간절함은 곧 이가령을 움직이게 했다. 그녀는 ‘한번 더 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독학을 통해 연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얻은 배움 또한 지금의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누군가가 저를 먼저 찾아주길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는 공부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찾아갔어요. TV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시청의 개념이 아니라 분석하면서 ‘나라면 어떻게 해석했을까’를 고민했어요. 또 다른 배우들의 해석력을 보면서 하나씩 깨달아갔죠.”
이가령은 임성한으로부터 두 번째 캐스팅 제안이 왔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고배를 마신 뒤 견뎌야 했던 긴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설렘이 있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가령은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평소 리액션이 큰 편이라 감정 표현에 솔직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날은 기쁜 마음이나 설레는 마음보다 부담감이 컸어요. ‘이번엔 제대로 해야 한다’ ‘내가 꼭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이전에 작가님 작품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가 역할이 바뀌게 된 적이 있다 보니 비중이 있는 배역을 주실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주연이더라고요. 모든 게 꿈같았어요.”
많은 시청자가 궁금해하는 점이 있다. 임성한 작가가 ‘왜 다시 이가령을 찾았냐’는 것이다.
“많은 분이 똑같은 질문을 하세요.(웃음) 그런데 저는 궁금하지 않아요. 저를 믿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셨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작가님을 알게 된 것만으로 인생이 달라졌어요. 제 인생은 임성한 작가님을 알기 전과 알게 된 후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요. 나중에 작품이 끝난 뒤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다시 기회를 주신 이유가 아니라 연기를 잘했냐고 물어보고 싶네요.”
이가령은 현재 대형 소속사 싸이더스HQ와 전속계약 만료 후 별도의 소속사 없이 홀로 스케줄을 관리하고 있다. 직접 일정을 조율하고 소통하며 전반적인 업무에 대해서도 알아가고 있다.
“공백기 동안 스케줄이 줄어들고 계약 기간이 끝나서 자연스럽게 소속사 없이 활동하고 있어요. 지금은 드라마 스케줄 외에는 바쁜 일정이 많지 않아 직접 관리하는 게 버겁지 않아요. 스케줄 조정을 어떻게 하는 건지 직접 알게 되는 점도 있어요.”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깍쟁이는 아니에요”
이가령은 아직까지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어색하다. 연기자로서 내세울 만한 본인의 재능이 무엇이냐고 묻자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뗐다.
“지금은 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요. 저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했을 때 과연 스스로를 배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어요. 사람으로 치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배우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의 생활이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고, 앞으로 저를 필요로 하는 분이 많았으면 싶어요. 가능성이 보이는 배우로 성장하면 더할 나위 없을 거 같아요.”
이어 이가령은 바쁜 스케줄 중 쉬는 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기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표정이 밝은 그녀다운 휴식 방법을 전했다.
“쉬는 날에도 대본을 봐야 마음이 편해요. 그래서 항상 손이 닿는 거리에 대본을 두는 편이에요. <결사곡> 시즌 2 촬영 전 휴식 기간이 길었을 때는 시즌 1을 몰아 봤어요. 본방송 당시에는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시청자 반응을 모니터링하면서 보느라 놓친 부분들이 있었는데, 다시 집중하면서 보니까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제가 맡은 캐릭터의 서사, 극의 전개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어요. 너무 재미없는 휴식이죠?”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준 털털하고 활발한 모습에 대한 질문도 이어갔다. 작품에서의 도도하고 새침한 모습과 달리 치아를 훤히 드러내고 호탕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을 터.
“외모만 보면 깍쟁이 같은 느낌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아요.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외향적으로 변한 부분이 있긴 한데 원래 모습 자체가 무던한 스타일은 아니라 리액션이 크고 표현을 곧잘 해요.”
수더분해서 더 정감이 가는 이가령. 그녀에게 오는 6월 중 방영될 <결사곡> 시즌2 관전 포인트에 대해 물었다. 앞서 공개된 <결사곡> 시즌2 1차 티저 영상에서 불륜을 들킨 부부들의 갈등이 극에 달하는 내용이 공개돼 궁금증을 자아냈다.
“저도 방송을 봐야 압니다.(웃음) 출연하고 있는 배우 중 한 명이지만, 저도 시청자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가 벌어질지 궁금해요. 대본을 읽으면서 ‘세상에 이렇게 전개가 된다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임성한 작가님은 반전을 다른 반전으로 뒤엎기로 유명하잖아요. 이번에도 기대해도 좋습니다. 시즌2니까 1보다 2배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좋을 거 같아요.”
연기와 현장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가령의 주변에 생기가 감돌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모습에서 파란 하늘을 수놓은 나뭇잎의 파릇파릇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