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는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들의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를 뜻하는 용어)’로 통하는 대표적 주제다. 그런데 요즘 이 불문율을 깨고 여자들의 관심을 끄는 군대 이야기가 있다. 바로 최정예 특수부대 출신 예비역들이 팀을 이뤄 각 부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밀리터리 서바이벌인 채널A 예능 <강철부대>다. 이 프로그램은 군대에서 축구를 했다든가, 어떠한 고초를 겪었다든가 등의 식상한 내용이 아닌 강인한 군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들의 숨 막히는 대결은 시청자에게 쫀득한 긴장감을 자아냈고 지난 3월 첫 방송에서 기록한 2.9%(닐슨코리아 기준)의 시청률은 7회에 6.3%까지 상승했다.
박군은 15년간 특전사로 복무하며 쌓은 경험에서 나오는 탄탄한 내공으로, 미션마다 전략을 세워 한계를 극복해 프로그램 속 대결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2019년 ‘한잔해’를 발매하며 트로트 가수로 데뷔, SBS 예능 <트롯신이 떴다2-라스트 찬스>(2020)에 출연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그는 <강철부대>를 비롯해 SBS 예능 <미운 우리 새끼> <정글의 법칙>, SBS FiL 예능 <당신의 일상을 밝히는가> 등 방송계를 종횡무진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에겐 아직까지 이 인기가 얼떨떨하다.
“인기가 실감되냐고요? 이제야 조금씩 느끼고 있어요. 예전엔 어머님들이 주로 저를 알아봐주셨는데 요즘엔 젊은 분들도 저를 알아보더라고요. 최근 SBS <인기가요>에 출연했을 땐 아이돌 선배들이 응원해주셨어요.”
지난 2019년 가수의 꿈을 품고 15년간의 군 생활을 정리한 그는 <강철부대>를 통해 국민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오랜 군 생활로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특전사의 강인함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군대에서 훈련했던 것보다 <강철부대>의 미션이 더 힘든 것 같아요. 체력도 많이 소모되지만 특전사를 대표한다는 생각에 정신적으로 느끼는 부담감도 있으니까요.”
특전사, 해병수색대, 707(육군 특수전사령부 제707특수임무단), UDT(해군 특수전전단), SDT(해군 군사경찰특임대), SSU(해군 해난구조전대)가 모여 대결을 펼치는 <강철부대>에서는 보기만 해도 혀를 내두를 만한 고난도의 미션이 줄을 잇는다. 영하 20℃의 날씨에 바다에 뛰어들어 인간형 더미를 구조한다든가 250kg에 달하는 타이어를 들고 400m를 이동하고, 40kg의 군장을 메고 가파른 산을 행군하는 식이다.
극한의 미션에도 <강철부대> 출연진은 최선을 다하고, 심지어 탈락이 확정된 순간에도 어느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보여주는 정신력과 끈기, ‘악바리’ 근성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모두 각 부대의 명예를 걸고 나왔으니까요. 내가 포기하면 우리 부대가 포기하는 거라는 생각에 팀원들이 합심해서 ‘으싸으싸’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죠. 포기하지 않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게 보이지 않나요? 극한까지 가서 미션 수행을 하면서 팀원들과 정도 들었어요. 저를 믿고 따라준 팀원 정태균, 박도현, 김현동에게 무지 고맙죠.”
박군은 한 인터뷰에서 다시 태어나도 특전사로 복무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가정을 꾸려 아들을 낳는다면 특전사에 복무시키고 싶을 정도로 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제가 가진 희생정신과 봉사 정신, 인내심은 모두 군대에서 배운 거예요. 함께 훈련하고 밥 먹고 청소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달았죠.”
군에서 쌓아온 것들은 연예계 활동을 버티는 원동력이 됐다. “단결” “식사하셨습니까?” 등의 인사를 하는 습관이 박군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줬고, 매일 했던 체력 단련은 고된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물론 연예계에는 군에서 느끼지 못했던 가혹함도 있다.
“군대에서는 모두가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해요. 예를 들어 행군에서 뒤처지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도우며 끌고 가요. 자신도 무거운 군장을 메서 힘들지만 뒤에서 밀어주면서 함께하죠. 그런데 사회에서는 무엇이든지 잘하는 것이 우선이잖아요. 그 점에서 부담감과 긴장감이 있어요. ‘내가 못 하면 나를 찾아주지 않겠지?’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때로는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버거울 때도 있어요.”
학창 시절엔 ‘내 삶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면서 펑펑 운 적도 많죠. 모든 상황이 끝이 없는 터널 같았거든요.
그의 간절함과 노력은 이제 빛을 보고 있다. 2년 전 발매한 ‘한잔해’(2019)로 SBS <인기가요>에 출연했고, <미우새> <정글의 법칙> <당신의 일상을 밝히는가> 등 예능에 출연하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선 데뷔부터 만류하는 이들이 많았다. 4년만 더 군 생활을 해 19년 근속을 하면 전역 후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제대해 살얼음판 같은 연예계로 진출한다고 하니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중 ‘한잔해’를 부를 가수를 뽑는 오디션 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했어요. 가수에 도전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모두 말렸죠. 안정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고, 이제 좋은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꾸리면 되는데 왜 어렵게 가려 하냐고 묻는 분이 많았죠. 그런데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흔히 인생에서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잖아요. 그중 하나라는 확신이 있었고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데뷔를 결심하고 활동명을 고민하던 그는 ‘박상사’ ‘박군기’ 등을 생각하다가 어머니가 평소에 아들을 “박군”이라고 불렀던 것이 떠올라 예명을 지었다. 자신과 어머니가 힘들고 외로울 때 노래가 큰 위로가 됐던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박군의 노래가 위안과 희망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요즘 정말 행복해요. ‘박군을 보면서 반성하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는 반응을 보면 힘이 나요. 70대 어르신이 저를 응원하고 싶어서 처음으로 댓글을 달았다고 할 때도 있는데 굉장히 뿌듯하죠. 제게 주시는 마음이 감사해서 뭐라도 더 해드리고 싶어요. 평소에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는데 어르신이 타시면 잽싸게 일어나서 양보하려고 늘 긴장하고 있어요. 저를 예뻐해주시는 게 너무 감사하고,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서요.”
한편으론 연예인의 삶이 외롭기도 하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다가 조용한 집으로 돌아오면 공허함이 밀려온다는 것.
“카메라 앞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분들을 즐겁게 만드는데 집에 가면 고요해요. 그럴 때면 공허함이 밀려오죠. 그래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집에 돌아왔을 때 북적거렸으면 좋겠고,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밥을 나눠 먹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메추라기를 키워볼까라는 고민을 했다는 그는 <정글의 법칙>에서 인연을 쌓은 개그맨 김병만에게 메추라기 집을 지어달라는 부탁도 했었단다.
“병만 형님은 메추라기 대신 앵무새를 키우라고 추천했어요. 전에 앵무새를 키웠는데 똑똑하고 애교도 많다면서요. 또 병만 형님이 연예계 활동에 대한 조언을 해주셨어요. 데뷔 전에 연예계 사람들은 냉정하다고 들었는데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했죠.”
언제나 보고 싶은 엄마
홀어머니 아래서 자란 박군은 중학교 2학년 때 말기암 선고를 받은 어머니를 대신해 가장이 됐다. 아침엔 학교에 가고 저녁엔 중국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왔다.
“모두 저와 같은 상황이라면 똑같이 했을 거예요. 제가 가장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하지만 쉽진 않았어요. 모든 상황이 끝이 없는 터널 같았거든요. 학창 시절엔 ‘내 삶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면서 펑펑 운 적도 많죠. 친구들은 공부를 하고 여자친구도 사귀는데 저는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늘 일을 했으니까요. 작은 동네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면 또래 여학생들이 보였는데,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하루빨리 어른이 돼서 회사를 다니고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고 생각했죠.”
까마득한 상황에서도 그를 버티게 한 원동력은 단연코 어머니다. 늘 자신을 대신해 생활비를 버는 아들을 가엾게 여기던 어머니가 있었기에 하루하루를 살았다. 말기암에 7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던 어머니는 그렇게 7년을 곁에서 박군을 지켰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학교를 갔다가 일을 하고 밤늦게 돌아와 잠든 저를 보면서 자주 우셨어요. 늘 손과 발을 주물러주면서 사랑을 주셨죠. 되돌아보면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우리 아들은 어떡하지?’란 생각으로 7년을 버티신 것 같아요.”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던 박군은 바쁘게 사느라 어머니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제일 후회된다고 말했다. 힘들 때마다 가수 배일호, 주현미, 박일준이 부른 트로트를 흥얼거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쉽다고.
“점점 희미해져갈 기억이 아쉬워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우리 어머니도 고생하며 사셨거든요. 맏이라서 재봉틀 공장에서 일하면서 동생들을 키우느라 글도 못 배우셨죠. 또 홀로 저를 키우느라 버거우셨을 거예요. 제가 군대에서 받은 월급으로 소고기는 사드렸는데 비행기는 못 태워드렸어요. 함께할 것이 많은데 하지 못해서 아쉬워요. 그래서 늘 지인들에게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잘하라고 이야기해요. 지금도 어머니가 꿈에 나올 때면 베개가 다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려요.”
이어 그는 6살 때 헤어진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항간의 이야기를 정정하고 싶다는 것.
“제가 6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셨어요. 저는 어머니와 계속 커왔고 아버지와는 2년 전 처음으로 통화했어요. 아버지가 휴대폰이 없으셔서 공중전화로 전화를 거셨는데 복무 중일 때라 제가 있는 곳으로 와달라고 부탁드렸죠. 휴대폰도 사드리고 맛있는 식사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오시지 않았고 그 뒤로 연락이 끊겼어요. 언젠가 다시 연락이 되면 경제적으로 편안하도록 도와드리고 싶어요.”
피를 나눈 가족과는 만나지 못하지만 박군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제대 후 갈 곳 없는 그에게 방 한 칸을 내줬던 친한 형과 팬들이다. 특히 형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제겐 아버지이자 형, 친구 같은 존재예요. 제가 군 생활을 오래 해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거든요. 지금도 무언가 결정할 땐 꼭 형과 상의해요. 또 항상 저를 응원해주는 ‘박군사단’ 팬들에게도 감사해요. 제가 팬들을 ‘가족님들’이라고 부르는데 진짜 가족이 생긴 것 같아서 따뜻하고 좋아요.”
역경 속에서 피어난 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이제 그는 꽃망울을 틔울 채비를 마쳤다. 박군에게 다가올 미래가 사랑과 온기로 충만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