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75세, 데뷔 55년 차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전 세계 영화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그는 배우라는 한길을 걸어오며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윤여정의 존재감은 예능에서도 드러난다. 나영석 PD와 함께한 tvN 예능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는 'Mrs. Yoon'이라는 하나의 타이틀을 만들었고,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할머니로 젊은 층까지 사로잡았다. 배우라는 직업을 넘어 하나의 장르가 된 윤여정의 성공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K-할머니'로 세계 사로잡아
영화 <미나리>를 향한 세계적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제36회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시작으로 2020년 미국 워싱턴DC 비평가협회에서 2개 부문을 수상하며 세계 영화상 61관왕, 131개 노미네이트라는 이례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이주한 한인 가족을 그린 영화로, 윤여정은 딸 '모니카(한예리 분)'와 사위 '제이콥(스티븐 연 분)'의 부탁으로 어린 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할머니 '순자' 역을 맡았다. 그는 딸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는 한국 엄마의 특성과 한국식 정서, 영어를 하지 못해 빚어지는 어린 손주와의 미묘한 갈등을 실감 나게 표현해 연기적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배우 윤여정 55년 연기 인생에 역대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유니크하고 강렬한 캐릭터를 많이 연기해왔는데 <미나리>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할머니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극찬하기도.
<미나리>에서 남다른 존재감으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윤여정. 현재까지 그가 받은 상만 21개에 달한다. 또 미국배우조합상에서도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 부문 후보에 올라 기대감이 더해지고 있다.
미국 영화 전문 매체 데드라인 등에 따르면 <미나리>는 크리틱스 초이스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 각본, 외국어영화상 등 10개 부문 후보로 선정됐다. 골든글로브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1개 부문 후보로 오른 것과 달리 크리틱스 초이스에서 10개 부문 후보로 올라 향후 아카데미상 시상식 후보 진출과 수상에 대한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전형적인 할머니, 전형적인 엄마, 나 그런 거 하기 싫어요. 조금은 다르게 하고 싶어요. 내 필생의 목적이에요." 어떤 역할도 자신만의 색깔로 소화하는 배우 윤여정. 그가 택하는 길에 성공이 따라붙는 이유다.
남달랐던 55년 연기 인생
데뷔 초부터 인상적인 연기와 미모로 시선을 끌었던 배우 윤여정. TBC 탤런트 공채에 합격한 뒤 작품 활동을 이어오던 그는 1971년 MBC로 이적해 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으로 분하며 스타 대열에 올랐다. 같은 해 스크린 데뷔작인 <화녀>에서는 주인집 남자를 유혹하는 가정부 캐릭터로 대종상영화제 신인여우상,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당시 언론은 '천재 여배우'라며 윤여정을 향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던 윤여정은 1974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하면서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공백기를 가진 그는 10여 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이혼 소식을 알렸다. 지난 2009년 MBC 예능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던 윤여정은 "결혼 생활이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은 아니었다. 이혼을 계기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정리를 했다"고 심경을 전하기도.
다시 배우의 길을 걸은 그는 <사랑이 뭐길래>(1991), <목욕탕집 남자들>(1995)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필모그래피를 채워나갔다. 영화 <여배우들>(2009), <돈의 맛>(2012), <죽여주는 여자>(2016),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 등 스크린에도 얼굴을 비추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했다. 특히 영화 <하녀>(2010)에서 선보인 인상적인 연기로 그해 대한민국 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싹쓸이하며 '10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윤여정의 연기 활동은 국내에 그치지 않고 세계 무대로 뻗어나갔다. 지난 2015년 워쇼스키 자매가 연출한 미국 드라마 <Sense8>에 카메오로 출연했던 그는 2017년 미국 드라마 <하이랜드>에도 참여하면서 글로벌한 배우로 거듭났다. 또 예산이 적은 독립영화 출연도 마다하지 않으며 배우로서 소신을 보여줬다.
윤여정의 히트 행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연기 연습을 해왔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노력형 배우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여정은 한 인터뷰에서 "타고난 재능이 있는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무섭다. 나는 타고난 게 없어 열심히 연습한다"고 말했다.
예능으로 젊은 층까지 사로잡았다
지난 2013년 tvN 예능 <꽃보다 누나>에 출연해 까다로우면서도 쿨한 모습으로 시청자를 만난 윤여정. 인생의 대부분을 대중에게 노출하면서 살아온 그가 예능에서 했던 말들은 어록으로 남았다. <꽃보다 누나>에서 남긴 윤여정의 말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SNS에 박제돼 돌아다니며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선사하고 있다.
<꽃보다 누나>를 통해 나영석 PD와 인연을 쌓은 윤여정은 이후 <윤식당>, <윤스테이> 등 자신의 이름을 딴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다. 노력형 인간이라는 그의 수식어는 예능에서도 돋보였다.
tvN 예능 <윤식당>에서 주방장으로 활약한 그는 부족함 없이 손님을 맞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하며 분주한 모습을 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어딘가 모르게 서툰 모습에선 친근함이 느껴지고, 실수를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련함에선 존경심이 생기기도.
윤여정표 예능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생관, 명언뿐만 아니라 남다른 패션 감각도 눈길을 끈다. 슬랙스에 낮은 단화, 심심하지 않은 컬러 조합은 여배우의 포스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또 질끈 묶은 파마머리에 독특한 모양의 안경까지 윤여정의 시그너처 포인트다.
예능에서 뽐내고 있는 영어 실력도 큰 화제다. 뛰어난 발음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윤여정식의 거침없는 문장 표현은 듣는 이들을 주목하게 하는 힘이 있다. 여기에 농담까지 섞으며 재치 있는 면모를 보여주기까지. 외국인을 상대로 한옥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포맷인 tvN 예능 <윤스테이>를 보면 윤여정과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들에게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윤스테이>는 <윤식당>의 고정 멤버였던 배우 윤여정, 이서진, 정유미, 박서준과 영화 <기생충>으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최우식이 새 얼굴로 합류해 남다른 케미를 선보이고 있다. <윤스테이>는 잔잔한 감동과 소소한 웃음을 선사해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8.2%로 출발한 시청률은 현재 11.6%를 넘었고, 더불어 방송의 주축이 되는 윤여정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윤여정 어록
배우 윤여정의 무심한 듯 따뜻한 말은 연령대를 막론하고 큰 위로가 되고 있다. 말이 곧 명언이 되는 그의 어록.
"아프지 않고 아쉽지 않은 인생이 어디에 있나.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고 계획을 할 수가 없다. 그냥 사는 거다" - tvN <꽃보다 누나> 인터뷰 중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이야. 그 서러움은 내가 극복해야 하는 것 같아. 나는 내가 극복했어." -tvN <현장 토크쇼-택시> 출연 당시
"우리나라가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잖아요. 친구들을 보니까 영화관에 많이 가더라고요. 그게 제일 돈도 안 들고 남의 인생을 보는 게 좋으니까요. <장수상회>가 잘돼서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또 나오고, 그러면서 노인네들이 영화를 많이 보러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영화 <장수상회> OSEN 인터뷰 중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면 된다. 어른이라고 해서 꼭 배울 게 있느냐?" -SBS <집사부일체> 출연 당시
"근사한 할머니 역을 맡고 싶다. 고집 세고 주책맞은 할머니 말고 잘 늙은 할머니 말이다. '늙어도 괜찮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다" - tvN <현장 토크쇼-택시> 출연 당시
"나이 60이 돼도 인생을 몰라요.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도 67세가 처음이야." - tvN <꽃보다 누나> 인터뷰 중
"젊은 사람들이 센스가 있으니 들어야죠. 우리는 낡았고 매너리즘에 빠졌고 편견을 가지고 있잖아요. 살아온 경험 때문에 많이 오염됐어요. 그런데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니들이 뭘 알아?'라고 하면 안 되죠." -연합뉴스 인터뷰 중
"좋은 연기는 돈이 급할 때 나온다." -JTBC <뉴스룸> 인터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