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을 기억하는가? 미국 건국 이래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그때를 말이다. 4년 후 재선에 성공하고, 퇴임할 때까지 60%에 가까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멋지게 퇴장한 그는 강력한 리더십보다 친근하고 수평적인 현대적 리더십을 보여주면서 ‘오바마 스타일’로 패션계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말끔하고 세련된 슈트를 즐겨 입으며 종종 재킷을 벗고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 셔츠 단추를 한 개 풀고,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린 격식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열심히 일하는 남자의 매력적인 이미지를 연출해 사랑받았다.
퍼스트레이디였던 미셸 오바마 역시 미국의 대중적인 디자이너 브랜드부터 제이크루와 H&M, 갭 같은 스트리트 브랜드를 선택하거나, 고급 브랜드의 드레스 위에 중저가 브랜드의 카디건을 매치하는 등 누구나 따라 입을 수 있는 패션을 선보이며 패션 아이콘으로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0년 11월, 미국의 제4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당선되면서 부통령에 이름을 올린 카멀라 해리스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오버랩되는 행보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 역사상 첫 여성이자 흑인이며 아시아계 부통령이라는 기록에 법률가 출신으로 정계에 뛰어든 이력까지 더해지며 전 세계 주요 언론으로부터 ‘여자 오바마’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의 패션 스타일 역시 뜨거운 이슈다. 그녀는 바이든 캠프에 합류하면서 주로 블랙, 그레이, 네이비 등 어두운 계열의 팬츠 슈트에 라운드넥 블라우스를 즐겨 입었다. 여기에 대학 시절부터 시그너처 아이템으로 착용해온 진주 목걸이와 귀고리로 포인트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상에 따라 심플한 디자인의 화이트 진주부터 두 줄로 된 진주, 골드 메탈과 믹스매치된 아이템, 시크한 블랙 진주까지, 다양한 디자인의 진주 주얼리로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으면서도 격식과 우아함을 더해 자신만의 유니크한 이미지를 구축해온 것.
그뿐만 아니라 스커트 슈트나 원피스에 스틸레토 힐을 매치하곤 했던 여성 정치인의 전통적인 관행을 깨고, 활동적인 팬츠와 함께 대중적인 슈즈로 잘 알려진 컨버스의 척 테일러를 매치해 젊은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화이트 스니커즈부터 블랙 레더 스니커즈, 슬립온 스타일부터 플랫폼 디자인까지 컨버스가 선보인 척 테일러 컬렉션의 거의 모든 아이템을 소장한 스니커즈 마니아임을 밝히기도 했다. 2020년 9월 위스콘신주 밀워키를 방문해 스키니 진에 블랙 컨버스 스니커즈를 매치한 모습으로 선거 유세에 나선 영상이 SNS에 공개되자 800만 번이 넘는 조회 수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영상 아래에는 “Laced up and ready to win,”이라는 문구를 더해 신발끈을 조여 매고 열심히 일하는 젊고 활기 넘치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10월의 플로리다 집회에서는 화이트 하이톱 스니커즈에 “Black Joy” “Stop Hate” 등 상징적인 문구를 담은 배지를 달아 정치 이념을 드러내는 명민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어두운 차콜 계열의 팬츠 슈트에 볼드한 진주 이어링을 매치한 시그너처 스타일로 2020년 11월호 패션지 <엘르>의 미국판 커버를 장식하며 수많은 여성의 패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세련되고 당당하면서도 실용적인 스타일로 워킹 우먼의 룩을 대변하는 패션을 선보인 그녀는 11월 7일, 조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을 선언하는 대국민 승리 연설에서 선거 캠페인 내내 처음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이트 컬러를 입고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중요한 정치적 행사가 있을 때 영국과 미국의 여성 정치인이 입는 흰색 옷은 참정권을 뜻하는 ‘서프러제트(suffragette) 화이트’로 일컬어지며 여성 인권을 상징해왔다. 또 그녀가 화이트 슈트에 함께 매치한 푸시 보 블라우스는 영국 첫 여성 총리인 마거릿 대처가 즐겨 입었던 옷으로, 일하는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넥타이의 여성 버전인 셈. 이날 그녀가 선보인 화이트 룩은 그동안 백인과 남성이 장악해온 백악관의 장벽을 깬 여성 정치인으로서 포부를 드러내는 정치적인 전략이었다.
자기표현의 방식 중 하나였던 패션과 스타일은 뉴 밀레니엄 시대를 거쳐 소셜 미디어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제 ‘이미지 메이킹’의 수단이자 도구요, 핵심 전략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치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옷은 말할 것도 없고, 헤어스타일부터 액세서리까지 TPO에 맞는 똑똑한 패션 전략은 선거의 당락을 좌지우지하는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미디어를 통해 보는 사소한 이미지 하나하나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인물에 대한 감정적 호불호를 결정짓기 때문.
화려한 컬러와 과감한 패턴 플레이를 즐기며 ‘패션 총리’라는 닉네임을 얻었던 테리사 메이 전 영국 총리, 스카프를 시그너처 아이템으로 선택해 모노톤 슈트에 우아하게 매치하는 시크한 파리지엔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 비비드한 슈트에 화려한 주얼리를 매치하는 등 강인한 정치 스타일만큼 과감한 패션으로 눈길을 끄는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밀레니얼 세대답게 슈트뿐만 아니라 저지 원피스, 점프슈트 등으로 자유롭고 파격적인 차림을 선보이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미 하원의원 등의 여성 정치인들은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메이킹의 중요성을 잘 알고 패션과 스타일을 무기로 사용해 여느 남성 정치인 못지않은 정치적 파워와 인지도를 만들어냈다.
패션과 스타일의 중요성은 이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옷 잘 입기로 소문났던 다른 여성 정치인들이 주로 고가의 명품 브랜드와 커스텀 메이드를 선호하던 것과 달리 가격이나 브랜드에 구애받지 않는 친근하고 멋스러운 ‘우먼 넥스트 도어’ 스타일링으로 대중의 마음을 활짝 열고 백악관 입성을 앞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 매끈하게 정돈된 차분하고 심플한 팬츠 슈트, 은은하고 우아한 빛을 내는 진주 주얼리에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은 활동적인 스니커즈로 그녀만의 시그너처 스타일을 구축하며 다양성을 포용하는 바이든 정부의 정체성까지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레드 카펫에 더 어울릴 법한 화려한 ‘파워 드레싱’ 대신 당장 따라 하고 싶은 워킹 우먼 룩을 선보이며 나이와 성별을 아우르는 지지층을 형성한 카멀라 해리스. 그녀가 자신의 스타일만큼 편안하고 친근한 리더십으로 전 세계에 영향력을 보여주길 기대해본다.
그래서 여성 정치인을 떠올릴 때 패션 스타일과 시그너처 아이템보다 공약과 정책, 정치적 업적이 먼저 떠오르는 부통령이 되길, 더 나아가 그녀가 대선 승리 축하 연설에서 언급한 ‘가능성의 나라’를 실현하며 전 세계 여성의 진정한 롤 모델이 돼주길 바란다. 우리는 예쁘고 옷 잘 입는 패션 리더가 아니라 국민을 대표해 열심히 일하며 희망을 꿈꾸게 만들어주는 ‘호프 리더’를 원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