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 S대 의대에 아이를 입학시킨 친구가 있다. 이 친구의 자녀 교육 열성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과목마다 아이의 진도를 꿰뚫고, 학교생활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런 친구가 나와 다른 점은 바로 아이의 아빠, 그러니까 남편의 자녀교육 참여였다.
친구의 남편은 자녀 교육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친구의 남편은, 의대 입시를 위해 학원 설명회를 모두 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전국 대표 의대의 특징과 장단점 등 세부 사항을 분석해 직접 표를 만들어 아이와 공유했다. 자료를 본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했다. 큰아이가 중학생일 때만 해도 학부모 모임에서 아빠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큰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니 상황이 확 달라졌다. 입학식 날, 아빠들의 모습이 제법 눈에 띄었다. 그러다가 둘째가 고등학교에 입할할 때는 ‘대부분’ 아빠와 동행했다. 깜짝 놀랐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고 있는 내 남편이 떠올랐다. 한데 요즘 상황을 들어보니, 유치원 때부터 자녀 교육에 몰입하는 아빠가 늘었다고 한다.
얼마 전, 의사인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중학생 아이를 둔 후배는 대뜸 하소연을 했다. 퇴근 후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이가 다니는 학원을 쫓아다니며 픽업하고, 어떨 때는 학원 앞에서 대기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한단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아내와 말다툼을 벌였다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한마디를 했다. “아무것도 안 할 거면 그냥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해. 한 사람이 리드하면 한 사람은 말없이 따라가야 성공해. 자꾸 부딪치면 결국 아이가 더 힘들어.”
대한민국 입시 지옥의 경쟁 속에서 진정한 아빠의 역할은 무엇일까? 뒷짐 지고 구경만 하던 아빠의 자녀 교육 참여가 당연시되는 지금. 아빠의 역할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방송됐던 모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달라진 1등 아빠의 조건을 논하며 바짓바람으로 대변되는 아빠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프로그램에서는 160여 명의 명문 S대생 설문조사를 통해 아빠의 역할을 정리했는데 많은 학생이 아빠로부터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었다고 털어놨다. 아빠와의 갈등은 거의 없었으며 아빠는 항상 성적에 대해 너그럽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전했다. 아빠는 ‘롤 모델’ ‘내 편’ ‘울타리’라고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좋은 성적을 유지한 학생은 아빠와의 관계가 편안했다는 결론이다.
수년 전, 대치동 바짓바람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한 아빠를 취재한 적이 있다. 아이 교육을 위해 강북의 집을 팔고 강남 대치동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는 열성적인 아빠였지만, 아이 사교육을 위해 학원 정보를 파악하거나 교육 정보를 알아오는 노력은 아빠가 하더라고 실제적인 학습이나 통제 등은 엄마가 맡고 있다고 했다. 아빠의 역할은 조금 더 큰 따뜻하고 편안한 울타리여야 한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고등학생이 되면서 입시의 현실에 발을 들이는 순간, 부모의 역할은 반드시 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적에만 초점을 맞춰 아이를 닦달한다면 아이의 고통은 위안받을 곳이 없다. 엄마든 아빠든 성적에 관한 일을 리드하는 몫은 한쪽이면 충분하다. 적어도 한 사람은 눈물을 닦아주며 어깨를 다독여줘야 한다. 들어주고 달래주는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다.
글쓴이 유정임
MBC FM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작가 출신으로 현재 부산·경남 뉴스1 대표로 근무 중. 두 아들을 카이스트와 서울대에 진학시킨 워킹맘으로 <상위 1프로 워킹맘>의 저자이다.